[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외전 - 이별
본편에서 미처 풀지 못했던 이야기. 헤어지게 된 그 때의 두 사람.
*
늦은 오후 잠에서 깬 휘인이 뒤늦게 폰을 들었다. 혜진에게서 온 수많은 메시지와 전화들이 휘인의 폰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초점을 잃은 두 눈은 무엇을 담는 지도 모르고, 환히 켜져 있던 폰 화면은 다시 어둡게 꺼져 버렸다. 휘인은 혜진에게서 온 연락을 받을 용기가 없었다. 혜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은 어떻게 될지 휘인에겐 온통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으니까.
결국, 대답없는 휘인을 먼저 찾은 건 혜진이었다.
자정이 넘은 밤. 스케줄을 마친 혜진은 휘인의 작업실 문 앞에 우두커니 멈춰섰다. 다른 때라면 익숙하게 도어락 비밀번호를 치고 안으로 들어갔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혜진은 그 딱딱한 문 앞에서 꽤 오랫동안 혼자 서있었다. 추위에 떠는건지 두려움에 떠는건지 모를 떨림이 혜진의 온 몸에 퍼졌다. 혜진은 힘겨운 숨을 내뱉었다. 지푸라기 같은 용기로 들린 혜진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띵동-
1초, 2초, 3초... 아무 대답도 없이 가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다. 이 무겁고도 무서운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휘인아."
방 안은 어두웠다. 잠을 자고 있었던걸까. 아니. 야행성인 휘인이 이 시간에 잠들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럼 영화를 보고 있었을까. 아니. 그러기에 집 안은 너무나도 고요하고 어두웠다.
"왜 여기로 왔어. 피곤한데."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는 평상시에 듣던 말과 다를 게 전혀 없었다. 휘인이 내뱉는 목소리, 말투 모든 것이 다 그대로였다. 마치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휘인아."
"화보... 잘 나왔더라."
혜진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차올랐다.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이 화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건지 명쾌한 해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혜진의 숨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졌다. 빨갛게 달아오른 눈동자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정, 정휘인..."
"응."
"지금... 3일 동안 아무 말도 안 해놓고... 한다는 말이... 그거야?"
갈라진 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를 내야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인 것 같은데, 왜 너는- 누굴 향한 원망인지 알 수 없는 혜진의 눈빛이 휘인에게 닿았다.
"......"
"화를 내야지. 성에 안 차면 때리기라도 해야지."
혜진이 입술을 세게 물었다. 뜨겁게 떨어지는 눈물은 볼을 타고 혜진의 얼굴을 가득 얼룩지었다.
"너 나 사랑해?"
울음기 담긴 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혜진은 여전히 원망스런 눈으로 휘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나 사랑했니?"
휘인의 입이 작게 달싹거렸다. 그러나 그 작은 움직임만 있을 뿐,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원망이 담긴 혜진의 눈과 슬픔이 담긴 휘인의 눈이 맞닿았다.
"사랑해..."
휘인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진심이고 또 진심인 말. 그러나 그 진심을 들은 혜진의 표정은 괴롭게 변했다. 혜진은 그저 눈물만 쉴새없이 흘릴 뿐,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서있던 혜진이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그 어떤 말도 없이 뒤를 돌았다. 성큼성큼, 휘인은 자기에게서 멀어지는 혜진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악 물었다. 혜진이 집 밖을 나가 모습이 사라지자 휘인의 다리에 힘이 확 풀렸다. 그 자리에서 주저 앉은 휘인은 애써 감췄던 눈물을 흘리며 자기를 탓하고 꾸짖고 원망하며 소리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
'인기 여배우 안혜진의 남자친구 스토킹 피해 사실이 알려지며 큰 파장이 일고 있습니다. 안혜진씨의 전 남자친구인 김모씨는 같은 작품에서 만났던 유명 남배우로 이별을 통보받자 악의적인 스토킹과 협박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온갖 뉴스에서 헤드라인으로 보도하는 혜진의 소식에 휘인은 덜덜 떨리는 몸을 숨길 수가 없었다. TV를 틀어도, 인터넷을 들어가도 혜진의 이름은 가득차있었다.
그렇게 혜진을 떠나보낸지 한 달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차갑게 뒤돌아 가버린 혜진은 언제나처럼 먼저 휘인을 찾지 않았다. 그렇다고 휘인이 혜진을 찾지도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도 서로를 찾지 않은 채, 헤어져버렸다. 휘인은 서둘러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거칠게 차를 몰고 익숙하게 향했던 혜진의 집으로 갔다. 혜진의 아파트 입구엔 벌써부터 수많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주차장에 주차를 마친 휘인이 혜진의 집 앞까지 가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상아색 문 앞에서 휘인은 걸음을 멈췄다. 여기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지만 생각없이 움직이는 건 딱 여기까지인 듯 싶었다. 휘인의 손이 도어락과 초인종 사이에서 방황했다. 움찔거리던 손가락은 금세 용기를 잃고 주먹쥐어지고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번엔 휘인이 폰을 꺼내 들었다. 집 앞까지 찾아온 것처럼 빠르게 혜진의 연락처를 찾았지만 딱 거기까지. 화면에 뜬 혜진의 이름을 보는 것, 거기서 더이상 진도가 나아가지 않았다. 휘인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휘인은 자기자신에게 조금씩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부르르 몸을 떨던 휘인이 거칠게 들고 있던 폰을 내던졌다. 휘인의 손을 떠난 폰이 바닥에 강하게 부딪히며 산산조각이 난 채 바닥을 뒹굴었다. 깨지고 조각난 화면은 휘인의 마음과도 같았다.
결국 휘인은 닫혀있는 문을 열지 못했다. 꾹꾹 닫혀있는 문 앞에서 소리없이 울고 몇 시간을 서있었지만 차마 그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이별은 두 사람을 찾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별을 맞이했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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