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에필로그
2년 후.
틱, 틱, 틱. 벽에 걸린 시계 초침이 어둡고 고요한 작업실 안을 채웠다. 새벽 3시. 모두가 잠든 시간. 캄캄한 현관과 거실과 달리 여전히 밝은 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방 한 켠에는 책상 위에 엎어진 휘인이 있다. 커서가 깜빡이고 있는 노트북 화면에는 현재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의 공개되지 않은 후반부 대본이 한창 쓰여있었다.
띠리링. 시계 소리만 가득했던 곳에 다른 소리가 잠시 섞이고 현관문이 열리며 어둠 속으로 한 인영이 들어왔다. 지친 발걸음으로 어둠을 뚫고 밝은 빛으로 들어간 혜진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엎어져있는 휘인을 보며 눈썹을 한번 씰룩이곤 천천히 다가갔다.
"휘인아. 정휘인."
"으응..."
"누워서 자. 불편하게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안 돼... 빨리 해야돼..."
잠에 푹 잠긴 목소리로 휘인이 중얼거렸다. 빨리 해야한다는 말과는 달리 여전히 엎어진 몸은 쉽게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혜진은 그런 휘인의 어깨를 잡아 의자 등받이로 끌어 당겼다. 감긴 눈으로 힘없이 들린 휘인의 몸은 물 먹은 종이처럼 의자에 걸쳐졌다.
"지금 몇 시야?"
"3시."
"3시... 어? 3시? 무슨 3시?"
감겨있던 휘인의 눈이 번쩍 떠졌다. 고개를 이리저리 휘휘 젓던 휘인은 노트북 화면에 보이는 시간을 보곤 한탄하며 울상을 지었다.
"미쳤어... 나 4시간이나 잤어."
"지금 자야 되는 시간이거든."
"아... 내일까지 보내주기로 했단 말야."
휘인이 양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근데 넌 지금 끝난거야?"
슬슬 잠에서 깬 휘인이 혜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혜진은 대답없이 고개만 한번 끄덕거렸다.
"아... 용선언니 너무하네. 사람을 언제까지 붙잡아두는거야."
"그 너무하신 용선언니는 아직도 촬영 중이야."
"......"
데칼코마니 이후 혜진은 다시 용선과 새로 합을 맞추고 있었다. 몇 개월 전에 들어간 미니시리즈였는데 막바지가 가까워질수록 촬영 강도가 세지고 있어서 요즘엔 집에 들어가기도 힘들어질 지경이었다.
"나 오늘 키스씬 찍었어."
"뭐...?"
나 오늘 밥 먹었단 얘기처럼 흔한 얘기인 듯 무심하게 말을 뱉는 혜진을 휘인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NG가 한번 나서 다시 찍었는데 용감독님이 한번만 더 하자고 해서 한 3번 찍었나?"
"......"
"아니다. 내가 한번 더 찍자고 해서 4번이다."
"......"
혜진은 놀라 굳은 휘인을 뒤로 하고 방 안을 천천히 걸어 구석에 있는 침대 위에 걸터 앉았다. 휘인은 허공에 붕 떠있던 시선을 천천히 내려 다시 혜진을 쳐다보았다. 작은 공간 안에 짧은 정적이 퍼졌다.
"정휘인."
"...어...?"
"할 말 없어?"
"......"
"나 좀 서운하려고 하는데."
혜진이 다리를 꼬며 팔짱을 꼈다. 휘인의 눈동자는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다.
"나 그냥 다음 작품 노란 꽃 찍을까봐. 화끈하게 안혜진 배우 인생에 베드씬 하나 남겨볼까."
"야!"
휘인이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바퀴 달린 의자는 휘인의 힘에 밀려 벽에 탁- 부딪혔다.
"너, 너, 너 왜, 그거 안 찍는다 그랬잖아!"
"아니. 내가 뭘 찍든 상관 없어 보여서."
빨개진 얼굴로 말을 더듬기까지 하는 휘인과 달리 여유롭기만한 혜진이 팔짱낀 팔을 풀고 침대 위로 두 손을 얹었다.
"상관 있거든?"
"아 그래?"
"너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지?"
살짝 비꼬듯 말하는 혜진의 말투에 휘인이 표정을 굳혔다. 도발하기 성공. 혜진은 휘인의 모습을 보며 혜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싸울까?"
"싸워서 달라진다면 싸워야지."
말을 마친 휘인이 성큼성큼 혜진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세지 않게 혜진의 어깨를 밀어 침대 위로 눕혔다. 위로 올라탄 휘인을 보며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던 혜진이 휘인에게 물었다.
"뭐하는건데?"
"키스씬."
진지한 얼굴을 한 휘인의 손이 혜진의 옷 속으로 들어가 허리를 쓸었다.
"그리고 베드씬."
휘인이 혜진의 입술을 삼킬 듯 물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손이 서로의 몸을 탐했다. 약간 숨이 찬 소리가 들리자 휘인이 살짝 물었던 입술을 놨다.
"이번 씬은 원테이크야. 중간에 컷 같은 건 없어."
낮은 목소리로 읊조린 휘인이 다시 혜진의 입술을 물었다. 휘인의 행동엔 어떤 기다림도 없었다. 혜진은 바르르 잘게 떨리는 휘인의 손을 느꼈다. 얼마 되지 않아 침대 아래로 입고 있던 옷이 하나 둘 떨어졌다.
*
"야 이 새끼야!!"
촬영장에 쩌렁쩌렁 울리는 용선의 목소리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용선이 외친 '새끼'의 정체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막내였다. 새 막내는 매일같이 사고를 쳐준 덕분에 하루라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오늘은 배우들에게 스케줄을 잘못 전달하는 바람에 촬영이 꼬여버려 일정까지 미뤄진 상황이었다. 막내는 벌벌 떨며 눈물을 보이고 있었고 용선은 헤드셋을 던지다시피 테이블에 놓았다. 촬영이 끝날 때까지 꾹꾹 화를 눌러참았던 용선은 촬영이 끝나자마자 막내에게 온갖 쓴소리를 쏟아 부었다.
"그 따위로 할 거면 다신 내 촬영장에 나오지마."
거칠게 말을 내뱉던 용선은 그 자리에서 등을 돌려 촬영장을 벗어났다. 별이는 울고 있는 막내를 토닥여주곤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용선의 뒤를 서둘러 쫓아갔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화장실 뒤편에 있는 외지고 어두운 공간. 용선이 뭔가를 찾는 듯 주머니를 툭툭 만졌다. 그때, 쫓아온 별이가 용선의 앞에서 손을 내밀었다.
"뭐..."
"담배."
"없어."
"거짓말하지 말고."
별이가 다시 한번 활짝 핀 손을 용선의 앞에 들이밀었다. 용선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뒷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 별이의 손바닥 위에 올려놨다. 별이는 손에 들린 담배를 내려다보곤 콱 움켜쥐어 자기 주머니 안으로 넣었다.
"이리와요."
별이는 지치고 토라진 얼굴로 서있는 용선을 살짝 끌었다. 그리곤 숙여져 있는 용선의 고개를 살짝 들어올려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왜 이렇게 담배를 못 끊어."
별이가 약간 혼내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용선은 별이의 시선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러는데 잘도 끊겠다."
"뭐라고요?"
"끊었다고..."
"끊었는데 담배를 왜 갖고 있어?"
"그거야...!"
말을 하다 말고 용선이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별이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다가 잡고 있던 용선의 팔을 놓고 고개를 숙여 떨어진 용선의 시선에 맞췄다.
"힘들었죠?"
"알면서 뭘 물어봐."
"그래도 오늘 촬영 잘 끝났잖아. 그죠?"
"잘은 아니지."
"그래서 그만둘거야?"
"이게 선배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용선이 살짝 인상을 쓰며 별이를 쳐다보았다. 별이는 그 모습을 무서워하기는 커녕 피식 웃음을 흘리며 용선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니까요 선배. 우리 감독님."
별이가 용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헝클어트렸다. 부끄러워진 용선은 별이의 손을 탁 쳐내며 쳐낸 별이의 팔을 잡았다.
"그래. 내가 니 감독이라고."
그러니까 까불지말라고- 용선이 별이를 잡은 팔을 아래로 내렸다.
"네, 감독님. 뭐든 디렉하시죠."
웃음기가 서린 얼굴로 별이가 어깨를 슬쩍 폈다. 뚱한 표정으로 별이를 보고 있던 용선은 그런 별이의 태도에 웃음이 난 모양인지 결국 바람빠진 웃음을 보이고 말았다. 용선은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로 별이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아줘."
용선의 말에 별이가 한 걸음 다가가 용선을 품에 안았다. 확실히 담배보다 효과가 좋아- 용선은 좀 더 별이의 품에 파고 들며 별이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별이는 그런 용선의 등을 토닥토닥거리다 뒷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별이의 품에 얼굴을 콕 박고 있던 용선이 고개를 들었다.
"키스해줘."
별이가 용선의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아."
"응?"
"컷은 내가 하는거야. 알지?"
이가 보이게 웃음을 터트린 별이는 다시 고개를 끄덕여주며 천천히 용선에게 입을 맞췄다.
*
그들은 오늘도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 누군가는 이 드라마에 분명 위기가 있을 거란 걸 알면서도, 누군가는 이 드라마에 예측할 수 없는 갈등이 나타난다는 걸 알면서도 각자의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 이 드라마의 결말을 알아도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하고, 결말을 모르면 모르는 대로 부딪힌다. 그들이 드라마를 만드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저 드라마를 좋아하니까. 그저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이니까.
여전히 그들은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서로의 드라마가 되어준 사람과 함께, 우리는 우리의 세상을 만들고 있다.
- 그들이 사는 세상 END -
지금까지 <그들이 사는 세상>을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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