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외전 - 이별(1)

[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외전 - 이별

본편에서 미처 풀지 못했던 이야기. 헤어지게 된 그 때의 두 사람.

 

 

 

 

 

 

*

 

 

 

 

"나 오늘 자고 갈래."

 

 

하루를 가득 채운 스케줄을 마치고 온 혜진이 휘인의 침대에 드러누으며 말했다. <피아노맨>이 크게 성공한 이후 소위 스타가 된 혜진은 이젠 드라마와 영화, CF를 모두 오가는 슈퍼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만큼 강도 높은 스케줄이 줄줄 이어졌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었다.

 

 

"내일 아침부터 화보 촬영있잖아."

"매니저 언니한테 여기로 오라 그랬어."

"...... 요즘 너무 자주 자고 가는거 아니야?"

 

 

조심스런 휘인의 말에 꾹 닫혀있던 혜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 내가, 나를 사랑하는 애인에게서 무슨 말을 들은거지? 혜진이 조금씩 몸을 일으켰다.

 

 

"뭐라 그랬어?"

"너 좋은 집 놔두고 맨날 이 작은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하는데."

"그래서 그게 뭐?"

"너 요새 기자들도 많이 붙고..."

"왜? 너랑 스캔들이라도 날까봐 불안해?"

"그런 게 아니잖아."

 

 

휘인이 눈꼬리를 축 늘어트리며 혜진에게 걸어왔다. 이미 혜진의 표정은 상처를 받은 듯 차갑게 굳어 있었다.

 

 

"너 정말 힘들게 여기까지 올라왔잖아. 근데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야."

 

 

혜진의 앞에 선 휘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는 눈이 많아지고 듣는 귀가 많아질수록 조심해야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인터뷰에서 별 생각 없이 한 말이 와전되어 오해 받기도 하고, 예능에서 그저 열심히 하고자 한 일이 누군가의 눈엔 아니꼽게 보일 수 있었다. 그저 달콤할 줄만 알았던 스타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하지만 혜진에겐 힘들게 얻은 이 스타의 삶보다 힘들게 얻은 이 사랑이 더 소중했다. 

 

 

"너 나를 걱정하는 거야, 너를 걱정하는 거야."

"혜진아."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그럼 나보고 뭘 어쩌라는거야? 맨날 일하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그 와중에도 너는 보고 싶어 미치겠어. 근데 너는 내가 찾아가기 전엔 나한테 오지를 않잖아! 좋은 집 놔두고 왜 코딱지만한 니 작업실로 오냐고? 니가 안 오니까! 니가 안 오잖아!!"

"그만하자. 피곤할텐데 얼른 자."

"넌 항상 이런 식이지! 무슨 말만 하면 피하고 도망쳐. 너도 할 말이 있으면 해 봐!"

"싸우기 싫어. 그러니까 그만하자."

 

 

말을 마친 휘인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한 걸음씩 혜진에게서 멀어졌다. 휘인이 방을 나갔을 때, 혜진의 눈엔 금방이라도 떨어질 눈물이 한가득 맺혀있었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를 여기까지 오게 해 준 내 소중한 정휘인 작가님. 항상 고맙고 사랑해요."

 

 

휘인은 TV 속에서 제게 눈을 맞춰오는 혜진을 보며 볼을 붉혔다. 마지막 수상 소감을 마친 올해의 여우주연상은 큰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사라졌다. 멍하니 혜진이 사라진 화면을 지켜보던 휘인이 반갑게도 울려대는 벨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응."

- 휘인아 나 상 탔어!

 

 

한껏 올라가 있는 혜진의 목소리였다. 그 행복한 목소리에 휘인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응. 봤어. 축하해."

- 봤어? 나 말 잘했어? 나 너무 떨려 죽을 뻔 했어.

"잘했어. 너무 잘 하던데. 너무 예쁘고."

- 뭐야. 갑자기 훅 들어와...

 

 

애교 있게 툴툴거리는 혜진의 목소리에 휘인이 또 씩 웃음을 지었다.

 

 

- 나 상 받았는데 선물 안 줄거야?

"선물? 뭐 받고 싶은데?"

- 뭐든 줄거야?

"응. 말해봐."

- 너.

"어...?"

- 정휘인 주세요.

"야..."

- 약속했다? 나 집 가면 딱 준비하고 있어야 돼. 이왕이면 좀, 헐벗은 정휘인으로?

"야...!!!"

 

 

얼굴이 시뻘개진 휘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전화기 너머 혜진은 즐거운 듯 쿡쿡 웃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바로 끊어진 전화에 여전히 열을 뿜고 있는 휘인만 꺼진 화면을 동그란 눈으로 쳐다보며 숨을 고를 뿐이었다.

 

 

 

디리링-

 

현관문을 열자 작고 초라한 휘인의 작업실과는 달리 고급지고 화려한 혜진의 거실이 펼쳐졌다. 휘인은 사온 와인과 케이크를 주방에 두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시상식장에서 여기까지 30분 정도 걸리니까 12시쯤 오려나- 휘인은 시간을 확인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소파에 두 다리를 올린 휘인은 포털사이트 검색어에 걸려있는 '안혜진'을 눌러 아까 봤던 수상 영상을 켰다.

 

 

'내 소중한 정휘인 작가님. 항상 고맙고 사랑해요.'

 

 

다시 들어도 어딘가 뭉글뭉글한 느낌이다. 휘인은 몇 번이고 혜진의 수상 소감을 돌려보았다. 소파에 앉아서, 소파에 누워서, 소파에 엎드려서.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러갔지만 나타나야할 혜진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벌써 혜진이 도착할 거라고 예상했던 12시가 훌쩍 넘어간 시간. 설렘 가득했던 얼굴이었던 휘인의 얼굴이 설렘을 잃고 있었다. 휘인은 폰을 들어 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 수화음. 그리고 들리는 기계음. 휘인의 눈쌀이 조금 찌푸려졌다. 다시. 긴 수화음 그리고...

 

 

- 어, 휘이나!

 

 

혜진의 한껏 올라간 목소리. 그리고 혜진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시끄러운 현장음 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들어왔다.

 

 

"아직 안 끝났어?"

- 아 시상식은 끝났는데에~

 

 

뭐야. 술이 얼마나 들어간거야 벌써- 찌푸려진 휘인의 인상이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 갑자기 감독님이랑 다들 회식을 하자는거야. 나 집 가야 되는데 조금만 있다 가자고. 그래서 쪼금만 있다 가려고 왔어!

"......"

- 왜애? 휘이니 너 어디야?

"너네 집."

- 우리집에 왔어? 진짜? 진짜 내 선물 갖고 온거야?

 

 

이 순간 나는 누굴 탓해야할까. 매일 같이 기대를 주고 그 기대를 꺼버려, 오늘 같은 날 내가 너를 보러 온다는 믿음 조차 주지 못한 나를 탓해야할까. 아니면 나를 두고, 나를 잊은 너를 탓해야할까- 휘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 휘이니가 우리집에 왔어? 그럼 얼른 가야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휘인아!

 

 

밝은 혜진의 목소리가 들리고 시끄러웠던 전화가 끊겼다. 익숙했던 고요함이 무섭게 휘인을 감쌌다. 꽤 시간이 지나 무거운 고요함을 깨우는 도어락 소리가 들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 신발을 벗는 소리, 쿵쿵 걸어오는 소리.

 

 

"휘인아!!"

 

 

휘인의 기분과는 정반대로 밝기만한 혜진의 목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들어지지 않는 고개를 든 휘인은 혜진을 보며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툭- 가방을 바닥에 떨어트린 혜진이 빠르게 달려와 휘인에게 안겼다. 혜진에게서 술냄새가 가득 풍겼다.

 

 

"술 많이 마셨어?"

"아니. 조금만 마셨어."

 

 

거짓말... 휘인은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말을 삼키고 혜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잠깐만 휘인아! 이것 봐라! 나 상탄거야! 여우주연상 안혜진!"

 

 

혜진이 금빛 트로피를 꺼내들어 휘인에게 내밀었다.

 

 

"잘했네. 멋지다, 안혜진."

"너한테 제일 먼저 보여주고 싶었는데."

"근데 왜..."

 

 

근데 왜 빨리 안 왔어- 또 말이 입 밖으로 나가지지 않았다. 말을 하다 만 휘인의 모습에 혜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뭐?"

"아니야. 아... 나 와인 사왔는데... 못 마시겠지?"

"와인? 마실 수 있어. 나 조금밖에 안 마셨다니까."

 

 

신이 난 혜진이 주방에서 휘인이 사온 케이크와 와인을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우와. 정휘인. 이거 다 나 주려고 사온거야?"

"어...? 뭐... 그냥..."

"나 맨날 상타면 좋겠다. 그럼 정휘인이 맨날 이래줄 거 아니야."

 

 

기분이 좋은 듯 히히 웃는 혜진은 케이크를 꺼내면서도 큰 감탄사를 잊지 않았다.

 

 

"휘인아."

"응?"

"뭐 안 좋은 일 있어?"

 

 

와인을 한 두 잔 기울인 새벽. 반쯤 풀린 눈으로 혜진이 물었다. 티는 안 내려했지만 완전히 가려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면, 휘인의 연인인 혜진은 그런 미세한 표정마저 알아볼 수 있다거나.

 

 

"아니야. 오늘 같이 좋은 날에 무슨."

"그럼 나한테 할 말은 없어?"

 

 

서운해. 나 서운해 혜진아- 휘인은 또 목구멍에서만 맴도는 그 말을 꿀꺽 삼키며 미소를 지었다.

 

 

"여우주연상 축하해."

 

 

작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혜진이 와인잔을 빙빙 돌렸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 짧은 정적이 울리고,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혜진의 전화기가 빛을 뿜었다.

 

 

"여보세요? 네, 진우씨."

 

 

전화를 받은 혜진을 힐끔 쳐다본 휘인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아직도 놀아요? 아 어쩌죠... 저 지금은 못 가는데."

 

 

혜진이 슬쩍 휘인의 얼굴을 살폈다.

 

 

"음... 상황 봐서 갈 수 있으면 갈게요. 네. 재밌게 놀아요."

 

 

간다고? 지금? 설마. 아니지? 초조한 휘인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전화를 끊은 혜진이 소파에 깊게 몸을 뉘었다.

 

 

"휘인아."

"응...?"

"나 지금 잠깐 나갔다 와도 돼?"

 

 

쿵.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에 휘인이 마른 침을 삼켰다. 새벽 3시가 넘은 이 시간. 나를 두고 간다고? 갑자기 술이 확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머리가 윙윙 울리고 심장은 쿵쿵 뛰고. 휘인은 애써 제 모습을 감추기 위해 이를 악 물었다.

 

 

"어디...? 팀 회식?"

"응. 아직 감독님이랑 진우씨랑 많이들 남아 있나봐. 이번에 우리 영화가 나까지 상을 세 개나 탔잖아."

"그치..."

"나... 가? 가도 돼?"

 

 

혜진이 조심스럽게 물으며 눈을 마주쳤다. 휘인은 혹시라도 마음이 읽힐까 마주쳤던 눈을 재빠르게 피했다.

 

 

"너한테 중요한 자리니까."

 

 

겨우 마음을 다잡은 휘인이 다시 혜진과 눈을 마주쳤다.

 

 

"니가 필요한 자리라면 가야지."

 

 

잠깐의 정적. 그리고 조용한 혜진의 한숨 소리. 그리고 다시 두 사람 사이에 앉은 고요함. 혜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한 걸음, 두 걸음을 걸어 나간 혜진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너는?"

 

 

혜진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휘인이 고개를 돌렸다. 알 수 없는 혜진의 뒷 모습이 휘인의 눈에 들어왔다. 

 

 

"너는 내가 안 필요해?"

 

 

살짝 돌려진 혜진의 얼굴에서 슬픔과 원망이 느껴졌다. 다시 빠르게 고갤 돌린 혜진은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갔다.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던  휘인의 고개가 푹 땅으로 떨어졌다. 애써 꾹꾹 숨겨왔던 마음이 고개를 들며 휘인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가지 마, 가지 마 혜진아. 나는 네가 너무 필요해- 여전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되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