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외전 - 이별(2)

[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외전 - 이별

본편에서 미처 풀지 못했던 이야기. 헤어지게 된 그 때의 두 사람.




 

 

 

 

*

 

 

 

시간이 지날수록 능력을 인정받은 작가와 배우는 더욱 더 바빠졌다. 새로운 작품과 늘어나는 스케줄에 휘인도 혜진도 정신 없는 하루들이 이어졌다. 둘에게 찾아온 바쁨은 서로를 소홀하게 만들었고 그 소홀함을 익숙하게 만들기도 했다. 얼굴을 보며 만나는 날이 줄어들었고, 연락을 주고 받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여유가 생기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혜진이 휘인을 다시 찾았지만 점점 바빠지는 혜진 덕에 겨우겨우 이어가고 있던 만남의 빈도 조차 줄어들고 있었다.

 

 

"하아..."

 

 

펄펄 끓는 열 기운에 휘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작품이 끝난 후 휘인에게 찾아오는 저주같은 몸살병. 보일러의 온도를 크게 높이고 두꺼운 이불을 둘둘 말았지만 오한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휘인은 손을 더듬거려 폰을 집어 혜진의 연락처를 켰다. 

 

연락할까, 말까... 고민이 담긴 휘인의 손가락이 폰 화면 위에서 멈춰버렸다. 요새 혜진은 영화를 찍고 있는 중이라 매우 바쁜 상황이었다. 덕분에 얼굴을 못 본지도 2주일이나 지났고 전화통화를 못한 지도 이틀이나 되었다. 휘인의 입에서 뜨거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바쁠텐데- 결국 밝았던 폰 화면이 다시 어두워졌다. 폰을 내려 놓은 휘인이 몸을 돌려 바로 누웠다.

 

 

 

디리링-

 

늦은 새벽. 어두운 휘인의 작업실 현관 센서등이 켜졌다. 신발이 벗겨지고 어둠 속으로 들어온 발이 익숙하게 휘인이 잠들어 있는 방을 향했다. 어둡고 깜깜한 방 안. 그리고 침대에 누워있는 휘인. 혜진은 침대 옆으로 걸어 가 잠든 휘인의 이마를 짚었다. 여전히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손을 타고 느껴졌다.

 

 

"멍청이..."

 

 

혜진이 들고 있던 약봉지를 휘인의 베개 옆에 내려놓았다. 한동안 말없이 휘인을 바라보던 혜진은 휘인의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불덩이처럼 뜨거운 휘인의 몸을 끌어안았다. 휘인의 몸을 가득 채운 열을 빼앗아버릴 것처럼.

 

 

 

 

*

 

 

 

"아녜진...."

 

 

쉬어버린 휘인의 목소리가 혜진을 깨웠다. 눈을 뜬 흐릿한 혜진의 시야에 인상을 찌푸리고 내려보는 휘인의 얼굴이 보였다.

 

 

"으응. 휘인아. 잘 잤어?"

"너 왜 여기서 자. 감기 옮으면 어떡하려고."

"감기 옮겨. 내가 아픈 게 낫지. 너 아픈 거 못 보겠어."

 

 

휘인이 콜록 마른 기침을 내뱉었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킨 혜진이 휘인의 이마를 짚었다.

 

 

"아직도 뜨겁네."

"괜찮아."

"괜찮긴 무슨. 너 엄청 아파보이거든."

"좀 있으면 괜찮아져."

 

 

말이나 못하면. 혜진이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휘인을 쳐다보았다. 

 

 

"전화하지."

"너 바쁘잖아."

"바쁘다고 내가 아픈 애인 무시할까봐?"

"너 일하는데 신경 쓰이잖아."

"난 이렇게 니가 아픈 데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더 신경 쓰이거든?"

 

 

혜진이 조금 억양을 높여 말했다. 아프면 아프다, 싫으면 싫다 말을 하지 않는 휘인의 모습은 3년을 사귀어도 답답할 뿐이었다. 그나마 휘인이 작품이 끝나고나면 항상 아프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이렇게 눈치를 채고 알아서 찾아왔지. 처음 휘인이 아프던 날엔 얼마나 당황했었는지 모른다.

 

 

"... 미안."

"미안하면 당분간 꼼짝 말고 있어. 나 최대한 촬영 미뤄놨으니까-"

"왜 그랬어!"

"니가 이런데 내가 잘도 나가서 촬영하겠다!"

"... 미안."

"미안하단 말 한번만 더 해봐. 그땐 진짜 아픈 거고 뭐고 밖에 내쫓아 버릴 거야."

"미.. 아, 아니야."

 

 

혜진의 눈치를 보던 휘인은 혜진의 손길에 이끌려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휘인은 이불 위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 혜진을 올려다보았다. 혜진의 알 수 없는 표정을 살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휘인아."

"으응...?"

"따라해봐."

"뭘...?"

"나 아파."

"응...?"

"따라하라고. 나 아파."

"나... 아파..."

 

 

어린 아이에게 말을 가르치듯 혜진이 천천히 말을 뱉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휘인은 그저 혜진의 눈치를 보느라 하라는 대로 얌전히 말을 따라했다.

 

 

"나 힘들어."

"... 나 힘들어..."

"나 안 괜찮아."

"나 안 괜찮아..."

"나 니가 필요해."

"나... 니가 필요해..."

 

 

다 큰 어른을 이렇게 가르칠 일인가. 혜진이 크게 숨을 내뱉으며 휘인을 내려다봤다. 한껏 눈치를 보고 있는 휘인의 눈동자가 혜진의 눈을 마주하자 파들짝 놀라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말 해. 말해야 아니까."

 

 

말을 마친 혜진이 침대를 내려갔다. 방 밖으로 나가는 혜진의 뒷모습을 휘인의 눈동자가 끊임없이 뒤를 따랐다.

 

 

 

 

*

 

 

 

시간이 흘러 혜진이 찍고 있는 영화의 크랭크업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혜진의 스케줄도 바빠졌다. 보고 싶은 감성을 이성으로 억누르며 휘인은 언제나처럼 묵묵히 기다리고 얌전히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 니가 필요해. 분명 혜진이 몇 번이고 휘인에게 가르쳤던 말이지만, 그 말은 휘인의 입에서 먼저 나오는 날이 없었다.

 

 

"어? 언제 왔어? 왔으면 연락하지!"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혜진이 현관에 놓인 휘인의 신발을 알아보고 빠르게 안으로 들어왔다. 자정을 넘겨서 들어온 혜진은 약간 피곤해보이는 얼굴이었다.

 

 

"너 바쁠까봐."

"바빠도 우리 애인 연락인데."

 

 

혜진이 살풋 웃으며 휘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오늘 촬영은 어땠어?"

"액션씬이 많아서 좀 힘들었어."

"다친 데는 없고?"

"아니. 나 너무 아파. 얼른 호 해줘."

 

 

혜진이 울상을 지으며 휘인에게 안겨들었다. 애교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다고 말하는 혜진을 보며 휘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 나 우선 씻고 와야 겠다. 씻어야 우리 자기 품에 안기지."

"뭐, 뭐라는거야..."

 

 

당황해 얼굴을 붉히는 휘인을 보며 혜진이 장난스럽게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입술에 쪽소리가 나게 버드 키스를 남기곤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욕실에서 물 소리가 들렸다. 거실에 혼자 남은 휘인은 혜진을 기다리며 쌓여있는 대본 더미를 뒤적거렸다. 벌써부터 다음 작품이 여럿 들어온 모양인지 꽤 높이 쌓인 대본과 기획안에 휘인이 흥미로운 듯 하나 둘 꺼내보았다.

 

이건 드라마. 김주현 선생님 작품 꺼네. 이거 우리 혜진이가 해도 좋겠다. 아, 이건 좀 야한데. 안혜진 설마 이런 영화들 찍는 거 아니겠지.

 

하나 둘 작품들을 둘러보던 휘인의 움직임이 하나의 기획안에서 우뚝 멈춰섰다.

 

 

'자기랑 잘 어울릴 거 같아서. 추천! (내가 남주라서 그런거 아니야)'

 

 

노란 포스트잇에 붙어있는 흘겨쓴 글씨체. 처음 보는 글씨체였다. 휘인의 시선은 그 어디도 아닌 '자기'라는 단어에 꽂혀있었다. 저 단어의 뜻이 뭘까. 저 단어의 의도가 뭘까. 복잡한 혼란이 휘인의 머릿속을 매섭게 휘몰아쳤다. 휘인이 기획안을 한 장 넘겼다. 감독과 작가의 이름. 그리고 남자 주인공 배우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김진우. 저번에 혜진과 같은 작품을 했던 상대 배우의 이름이었다.

 

 

'네 진우씨.'

 

 

휘인의 머릿속으로 혜진의 모습들이 하나 둘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보니 어느 순간부터 꽤 자주 들리던 이름이었다. 처음엔 아무렇지 않게 통화를 하던 혜진이 시간이 지나며 휘인의 눈치를 보며 자리를 뜨곤 했었다. 그저 일적인 대화를 나누는 거라 자리를 피한 거라고 여겼던 그 모습들이 갑자기 의문 투성이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니야. 정휘인. 너 혜진이 못 믿어?'

 

 

휘인이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들고 있던 기획안을 다시 내려놓고 다른 대본과 기획안으로 덮어버렸다. 눈에서 보이지 않게. 그러나 휘인의 눈은 보이지 않는 그 포스트잇의 메모를 계속 보고 있었다. 자기... 자기... 자기... 어떻게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눈을 질끔 감은 휘인이 소파에 털썩 등을 기댔다.

 

 

지이잉- 지이잉-

 

 

질끈 감았던 휘인의 눈이 떠졌다. 진동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 거리던 휘인의 시선이 혜진의 코트 주머니에 닿았다. 터벅터벅 걸어가 주머니 안에서 폰을 꺼내든 휘인은 발신자를 확인하곤 차갑게 굳어버렸다. 잊으려고 무시하려고 그렇게 밀어냈던 그 이름이 혜진의 폰 화면에 떠있었다.

 

받지 않은 전화는 부재중을 남겼다. 그리고 곧바로 메시지를 남겼다.

 

 

[ 잘 들어갔어? ]

 

 

화면에 고스란히 보이는 메시지 내용에 휘인이 이를 악 물었다. 3년 동안 사귀며 한 번도 혜진의 핸드폰을 들여다 본 적이 없었다. 들여다보고 싶지도 않았고 들여다 볼 이유도 없었으니까. 연인의 핸드폰을 몰래 들여다본다는 건, 휘인의 자존심도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부들거리는 휘인의 손가락이 익숙하게 잠금 화면을 열었다.

 

 

'휘인아. 내 비밀번호는 다 0417이다~'

 

 

해맑던 혜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렇게 말하던 혜진은 정말로 온갖 비밀번호를 0417로 설정해 놓고 살고 있었다. 이 집의 현관 비밀번호도, 노트북 비밀번호도, 이 폰의 비밀번호도.

 

휘인이 확인할 건 단 한 사람과의 연락이었다. 휘인의 이름보다 더 많은 통화 내역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 잘 들어 갔냐는 메시지를 남긴 사람. 다른 메시지들을 확인하는 휘인의 표정은 차갑다 못해 슬프게 일그러져가고 있었다.

 

 

지이잉- 지이잉-

 

 

차근차근 두 사람의 메시지를 곱씹고 있던 휘인이 다시 찾아온 전화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이번엔 아까와 달리 통화버튼을 눌러 받았다.

 

 

- 자기야, 카톡 봤으면서 왜 답장 안 해.

 

 

휘인은 그 목소리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들리던 물줄기 소리가 뚝 끊겼다. 그렇게 온 집 안을 찾아온 고요함에 시끄럽게 쿵쿵 대는 휘인의 심장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 자기야? 혜진아? 안 들려?

"휘인아. 나 다 씻었어."

 

 

하얀 샤워 가운을 걸친 혜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젖은 머리카락을 하고 성큼성큼 다가오던 혜진은 딱딱히 굳은 채 폰을 귀에 대고 있는 휘인을 발견하곤 아무 것도 모르는 얼굴로 걸음의 속도를 줄였다.

 

 

"통화해? 급한 전화야?"

 

 

혜진이 목소리를 낮췄다. 휘인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그러자 꺼졌던 화면이 밝아지며 발신자의 이름이 고스란히 혜진의 눈에 들어왔다. 곧 전화가 꺼지고 다시 진동이 울렸다. 당황한 혜진의 모습에 휘인은 억지로 밀어냈던 사실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휘인아..."

 

 

혜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휘인은 그런 혜진의 얼굴을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휘인의 시선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아무 것도 없는 휑한 바닥이 텅 비어 버린 휘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휘인아... 그게..."

"......"

"미안해... 미안해 휘인아..."

 

 

어느새 휘인의 앞으로 다가온 혜진이 휘인의 손을 붙잡았다. 혜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렁그렁 맺혀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뚝 떨여졌다.

 

 

"휘인아... 미안해..."

"아니야."

"휘인아."

"아니야. 아무 말도 하지마."

"휘인아... 미안해 근데... 나 진우씨랑 그런 사이..."

"아무 말도 하지마!"

 

 

빨개져버린 휘인의 눈이 눈물로 젖은 혜진의 눈과 마주쳤다. 휘인은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듣고 싶은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고? 정말 나를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났다고? 아니면 오해라고? 화가 났다. 제 연인인 혜진에게 화가 났고, 제 자신에게 화가 났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눈물에 휘인이 이를 악 물고 혜진에게 잡혀있던 손을 빼냈다.

 

 

"휘인아...!"

"......"

 

 

화를 내고 싶었다. 소리치고 싶었다. 그런데 휘인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혜진이가 왜 그랬을까.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휘인은 아무 것도 몰랐다. 어떻게 해야할 지도 몰랐다.

 

 

"오늘은... 오늘은 나 그냥 갈게."

"휘인아...! 나랑 얘기 좀 하고 가."

 

 

등을 돌려 나가려는 휘인의 손목을 혜진이 잡았다. 그러나 휘인은 다른 손으로 혜진의 손을 잡아 떼고 혜진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점점 휘인이 멀어져갔다. 혜진은 이미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혜진의 울음 소리가 따갑게 휘인의 귀를 찌르고 가슴을 찔렀다. 빨간 휘인의 눈에서도 눈물이 한방울 흘러내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현관문을 열어젖힌 휘인이 재빠르게 문을 닫았다. 닫힌 문에 기댄 휘인의 몸이 힘없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두 손으로 눈물이 새어나오는 두 눈을 막아보지만 한번 터진 눈물샘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날 두 사람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장 괴롭고 가장 외로운 눈물을 쉴새없이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