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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28

[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28화

 

 

 

 

또각또각. 복도에 울려퍼지던 구두 소리가 멈췄다. 목적지에 도착한 혜진은 걸음을 멈추고 벽에 등을 기댔다. 선글라스를 벗어 주머니에 넣은 대신 꺼낸 휴대폰. 곧 익숙한 이름을 찾아 손가락이 움직였다.

 

 

 

 

*

 

 

 

오늘 하루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흘려버린 휘인은 큰 한숨을 쉬며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책이라도 읽으면 머리가 정리될까 싶었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답인 듯 했다.

 

♪♬♩♪

 

고요했던 하루를 깨는 벨소리가 울렸다. 폰 화면엔 익숙한 이름이 떴지만 휘인은 그 전화를 바로 받을 수가 없었다. 떨리는 눈동자로 화면만 계속 쳐다보던 휘인은 노랫소리가 끝나기 전에 폰을 잡아 들었다.

 

 

"여보세요."

 

 

고요하다. 작은 숨소리조차 삼킬 정도로.

 

 

-안녕.

 

 

전화기 너머로 착 가라앉은 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는 못 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듣는 첫 대사는 너무나도 평범했다.

 

 

"안녕."

 

 

휘인 역시. 흔하고 평범한 그 대사를 내뱉었다.

 

 

-잘 있었어?

 

 

아니. 잘 있지 못했어. 혜진과 그렇게 깊은 대화를 나누고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그 시간은 휘인에게 제일 괴롭고 힘든 시간이었다. 한 시간이 하루 같고, 하루가 1년 같은 시간. 휘인은 대답없이 입만 뻐끔거렸다.

 

 

-나는 잘 못 지냈어.

 

 

 혜진의 말에 휘인의 고개가 숙여졌다.

 

 

-난... 똑같아. 그때나 지금이나.

"혜진아."

 

 

전화기 너머로 작은 소리가 들렸다. 휘인은 그 소리가 오랜만에 휘인이 불러주는 자기 이름이란 사실에서 새어나온 혜진의 웃음이라는 것은 알 수 없었다.

 

 

-헤어졌던 커플이 다시 만나 잘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폰을 들고 있는 휘인의 손이 떨렸다. 답을 알고 있지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휘인은 그저 입술만 깨물었다.

 

 

-나는 사실 무서워. 우리가 다시 만나면 달라질까? 행복해질까? 데칼코마니 때문에 널 다시 만났을 때, 사실 나 기대했어.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

"......"

-근데 넌 예전과 달라진 게 없었잖아.

 

 

자꾸 대답할 수 없는 말만 한다. 휘인은 미안하단 사과도, 아니라는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애꿎은 입술만 불어터지게 물고 뜯을 뿐이었다.

 

 

-너는 드라마를 쓰는 사람이잖아. 그래서 너는 그런 기적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몰라. 니가 쓰는 드라마처럼.

"나는..."

 

 

굳게 닫혀있던 휘인의 입이 드디어 떨어졌다. 어느새 촉촉해진 눈으로 폰을 들고 있는 손엔 힘을 꽉주고, 휘인이 한 마디 한 마디 힘있게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까지 내 맘대로 드라마를 써왔어. 갈등도 내 맘대로 만들었고 그래서 푸는 것도 내 맘대로 할 수 있었어. 등장인물이 해피엔딩으로 끝날지 새드엔딩으로 끝날지 그것도 다 내 맘대로 했어."

 

 

휘인이 작게 숨을 골랐다. 흔들림 없이 나오던 목소리가 작게 떨리며, 휘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드라마가 하나 있더라."

 

 

휘인은 눈물이 차오른 얼굴로 슬픈 미소를 지었다.

 

 

"갈등도 제 멋대로 생겨. 예측할 수 없게. 그래서 어떻게 푸는 지도 몰라. 거기다 이 드라마의 끝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매일 불안에 떨어."

 

 

조용히 휘인의 말을 듣고 있던 혜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그 드라마는 평생 니가 어떻게 할 수 없을거야.

"알아."

 

 

침을 한번 삼킨 휘인이 흔들리던 목소리를 바로 잡았다.

 

 

"그래도 써야지. 내가 드라마 쓰는 사람인데."

 

 

말을 마친 휘인의 입에 미소가 걸쳤다. 대답도 소리도 없는 조용한 공기가 전화기 사이를 오갔다.

 

 

-휘인아.

"어?"

-난 아직도 무서워.

"혜진아."

-응?

"너 지금 어디야?"

 

 

휘인이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고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가 겉옷을 챙겼다.

 

 

"내가 갈게. 너 어디야?"

 

 

빠르게 옷을 걸쳐 입고 신발에 발을 욱여 넣은 휘인이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기세였던 휘인은 문이 활짝 열리자 보이는 혜진의 모습에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섰다.

 

 

"나 여기. 니 앞에."

 

 

벽에서 등을 뗀 혜진이 몸을 바로 세웠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던 목소리가 그 어떤 장애물 없이 휘인의 귀에 들려왔다.

 

 

"넌 어디 있어?"

 

 

혜진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휘인의 귀에 대어져 있던 폰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나 여기... 니 앞에."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휘인을 보며 혜진도 귀에 대고 있던 폰을 아래로 내렸다.

 

 

"안 보였잖아. 문이 가리고 있어서."

 

 

혜진의 말에 울컥한 휘인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본 혜진이 한발자국 앞으로 걸어나왔다. 젖은 눈으로 자길 바라보는 휘인을 보며 혜진이 천천히 입을 뗐다.

 

 

"휘인아. 너 기다리는 거 잘하지?"

 

 

혜진의 질문에 휘인이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혜진의 입꼬리가 살포시 올라갔다.

 

 

"기다려. 내가 갈게."

 

 

 

 

 

휘인이는 맘대로 되지 않는 그 드라마를 그래도 쓸 거라고 했다. 자기는 드라마를 쓰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쓸 거라고. 휘인이는 드라마를 쓰는 사람이니까 드라마 같은 삶이 정말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래서 맘대로 되지 않아도 쓴다고 말하는 걸까? 그런데 말이야 휘인아. 니가 그랬잖아. 드라마는 혼자 만드는 게 아니라고. 우리가 같이 만드는 거라고. 그러니까 이 드라마도 너 혼자 하는 거 아니야. 우리 같이 하는 거야. 나도 드라마를 하는 사람이니까. -혜진의 독백

 

 

우리 사이에 있는 문은 하나였다. 내가 무서워서 열지 못한 문은 혜진이에게 가는 문만이 아니었다. 내가 내 방에서 나가는 문이기도 했다. 나는 혜진이의 문을 여는 게 아니라 내 문을 여는 걸 무서워했는지도 모른다. 혜진이의 문 앞에서 기다린 게 아니라 내 문 앞에서 벌벌 떨고 있던 거였는지도 모른다. 혜진이는 항상 자기 문을 열고 내게 들어왔다. 이제 그 문을 여는 건 내 몫이다. -휘인의 독백

 

 

 

*

 

 

 

까만 밤하늘에 몇 개 안 되는 별이 떴다. 지상엔 하늘보다 더 많은 불빛들이 가득했다. 옥상에 올라온 용선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막 한 모금을 빨아들이는 순간, 용선의 손에 들린 담배를 누군가가 낚아챘다.

 

 

"?! 야 문별...!"

 

 

담배를 채간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기 무섭게 용선의 입이 그 사람의 입으로 막혔다. 매캐한 담배향이 입을 맞춘 별이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점점 목구멍까지 들어오는 담배향에 별이의 얼굴이 점점 찌푸려졌고 결국 참다 못한 별이가 급히 입을 떼고 거칠게 기침을 내뱉었다.

 

 

"켁! 켁, 켁. 콜록. 콜록."

"괜찮아?"

 

 

놀란 용선이 별이의 어깨를 잡으며 허리를 숙여 별이의 상태를 살폈다.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몸 안에 남아 있는 모든 담배 연기를 빼낼 듯이 기침한 별이가 겨우 숨을 고르며 허리를 폈다.

 

 

"별아. 괜찮아?"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용선을 보며 별이가 피식 웃음을 보였다.

 

 

"죽는 줄 알았네."

"그러게 왜 그랬어!"

 

 

용선이 손바닥으로 별이의 등을 한대 내리쳤다. 아픈 척 등을 구부린 별이가 난간에 기대며 용선을 바라보았다.

 

 

"담배도 도망가고 싶어서 피는 거예요?"

 

 

정곡을 찔린 용선은 대답이 없었다. 용선이 담배를 배운 이유가 드라마 때문이었으니까. 용선은 입을 꾹 다문 채 별이의 옆에 섰다. 지금 꺼낸 담배도 드라마 때문이었다. 복잡하게 터져버린 기훈의 드라마. 옥상 아래로 보이는 야경을 보며 용선이 입을 열었다.

 

 

"별아. 넌 안 무서워?"

"뭐가요?"

"다. 그냥 다. 드라마도 삶도."

 

 

차가운 밤 바람이 용선의 머리를 흩트렸다. 별이는 용선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용선의 양 팔을 붙잡고 자기 앞으로 돌려 세웠다.

 

 

"드라마가 힘든 거 알지만 힘들다고 시작도 안 하면 드라마는 안 나오잖아요."

 

 

별이가 용선의 눈을 올곧이 마주치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촬영 들어가면 잠도 잘 못 자고, 밥도 잘 못 먹고. 찬 바람 불면 찬 바람 부는 대로 떨고, 더우면 더운 대로 땀내고. 비 와도 맞고, 눈 와도 맞고. 그런데 선배. 힘들 거 알면서도 찍잖아요."

 

 

밤 하늘의 별보다, 밤 도시의 야경보다 빛나는 눈동자가 보였다. 별이가 마주치는 눈을 피하지 않으며 용선은 그 빛나는 두 눈동자를 마주 봤다.

 

 

"힘들 거 알면서도 다시 또 찍을 거잖아요."

 

 

피식. 용선이 미소를 보였다. 별이는 천천히 용선을 자기에게로 당겼다. 별이의 왼손이 부드럽게 용선의 허리를 감싸고 별이의 입술이 사뿐히 용선의 입술 위로 내려 앉았다. 별이의 오른손이 용선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감싸면 용선의 왼손이 별이의 등을 천천히 타고 올랐다. 그렇게 한동안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지자 별이가 미소를 지으며 용선에게 속삭였다.

 

 

"도망갈 곳이 필요하면 이제 나한테 도망쳐요."

 

 

두 사람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그리고 이번엔 용선이 별이를 잡아 당겼다. 별이의 양 볼을 잡고 당겨서 마주친 입. 용선의 팔이 자연스럽게 별이의 목을 감쌌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항상 도망갈 곳이 필요했다. 그게 드라마였다. 드라마에선 항상 낭만적이고 신비로운 일이 벌어졌다. 너무나도 흔하게 권선징악도 개과천선도 이루어졌다. 그래서 드라마를 좋아했다. 그런데 이제 드라마보다 더 도망가고 싶어지는 곳이 생겼다. 사실 거기선 드라마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흔한 교훈도 공식도 성립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아니 성립되지 않는다. 이미 첫 번째 공식부터 틀렸으니까. 도망갈 곳이 필요해서 좋아하게 된 게 아니라 내가 너를 좋아하기 때문에 너에게로 도망가고 싶은 거니까. -용선의 독백

 

 

선배는 자꾸 도망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보는 선배는 한번도 도망친 적이 없다. 도망가면 다신 돌아오지 않는 법인데 선배는 항상 다시 돌아왔으니까. 그래서 나는 선배가 도망가는 게 아닌 잠시 쉬러가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드라마가 삶이고 삶이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우리 삶에서 감독은 김용선, 조감독은 문별이다. 그러니까 선배가 하고 싶은 대로, 선배가 하는 대로 따라갈테니까 선배는 그냥 지금처럼 계속 찍으면 된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별이의 독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