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썬] 인연
*4화
검정색의 긴 장우산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멈췄다. 도착한 집 앞에서 별이를 힐긋 보니 아쉬움이 묻어 나는 눈치였다. 오늘 하루종일 '같이 살면 좋을텐데'를 입에 달고 살았으니, 뭐 이상한 일도 아니였다.
"같이 살면..."
또 그런다, 또.
"좋을텐데. 그치?"
내 말에 별이가 깜짝놀란 눈을 하고 바라봤다.
별이에게 가졌던 질문 첫 번째. 사람인가 귀신인가. 아무 때나 멋대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보면 틀림없이 사람은 아니다. 그럼 두 번째. 정말 착한 천사인가 아니면 내게 달라 붙은 악마인가. 아직 내 수호천사라고 한 것 치고 한 일은 없는 것 같지만, 생긴 것과 달리 순진한 모습을 보아하니 악마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같이 살아야 되는지 이유 좀 말해줘 봐."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별이가 눈알을 빠르게 굴렸다. 그리고는 잽싸게, 이유를 늘어 놓기 시작했다.
"내가 있으면 아침에 알림도 필요 없어. 그리고 내가 밥도 해줄 거고 청소도 해줄거야."
지금까지는 아주 솔깃한 이유. 좋아.
"그리고 우리 집 엄청 좋아. 이 집은 세 놓고 우리 집에서 살면 너는 좋은 데 살면서 돈만 버는 거야! 알바할 필요도 없어!"
천사가... 물질주의자였어...? 근데 아까 이유보다 더 마음을 흔드는 이유다. 공짜로 좋은 집을 살면서 돈을 벌 수 있다니. 유산이라고 할 것도 없는 유산과 최저시급을 겨우 받는 아르바이트 비용으로 하루하루를 살아 가는 내겐 더없이 좋은 이유였다.
"그리고."
이미 이유는 충분했다. 굴러 들어올 돈 생각에 입가가 씰룩거렸다. 낡고 오래된 집이긴 하지만 세를 놓으면 지금 하는 아르바이트 비용보다는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올라가려는 광대를 겨우 붙잡으며 입술을 꾹 물었다. 하지만 별이는 아직 말하지 못한 남은 이유들이 있어 보였다.
"비가 오면 내가 데리러 갈거야. 비가 안 와도 데리러 갈게. 집에 들어 오면 항상 내가 있을게."
이렇게 빨리 돈 생각이 머릿속에서 사라질 줄은 몰랐다. 꿈틀거리던 광대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웃음을 참으려 꾹 물었던 입술에 힘이 풀렸다.
"늦은 밤 천둥번개가 치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현관문을 두드려 무서울 때 내가 옆에 있을게. 혼자 밥을 먹거나 혼자 잠들기 싫을 때 내가 옆에 있을게. 아무도 니 옆에 없을 때 내가 있을 거야."
우르르쾅- 창밖으로 번쩍이는 번개와 땅을 흔들 것 같은 천둥이 울릴 때. 아무도 없는 작고 낡은 집은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무서웠다. 어렸을 때부터 잠자리를 지켜준 사자 인형을 아무리 껴안아봐도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이불을 뒤집어써도 무서웠고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도 무서웠다. 택배 아저씨든 앞집에 사는 아줌마든 혼자 있을 때 들려오는 노크 소리는 항상 내 숨을 죽이게 했다. 그 어떤 인기척도 내지 않고 항상 보이지 않는 문 앞의 누군가가 사라질 때만을 기다렸다. 겨우 문 밖에서 발 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너랑 항상 같이 있고 싶어. 그게 이유야."
별이는 그렇게 거절할 수 없는 이유들을 내게 말했다. 별이가 던진 많은 이유들 중 거부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외로웠던 나는 하루 아침에 생긴 내 편의 손을 그렇게 잡게 되었다.
*
"허얼... 이게 니 집이라고?"
드라마에서나 보던 마당 딸린 단독주택에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못했다. 예쁘게 정돈된 마당을 지나 집 안에 들어왔을 땐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 진짜 여기 사는거야? 공짜로? 진짜?"
"그렇고 말고. 엣헴."
한껏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별이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신이 나 이 방 저 방 문을 다 열어제쳤다. 1층에만 퀸사이즈 침대가 들어가는 큰 방이 두 개나 있었고 2층엔 작은 다락방과 널찍한 다용도 공간이 있었다. 어딜 가도 감탄사를 뱉을 풍경 뿐이었다. 신이나 온 집 안을 먼지나게 뛰어다녀도 계단을 세네번 왔다갔다해도 힘들긴 커녕 기분만 하늘로 솟구쳤다.
"조심해. 그러다 다친다."
2층을 다 구경하고 나와 다시 1층 구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예쁘게 꾸며 놓은 마당과 밤 하늘이 아주 잘 보이는 전망이 좋은 방. 그러니까 이 방은 내꺼야!
"이 방 내가 찜!"
"그래 맘대로 해."
문별이가 수호천사긴 수호천사인가보다. 이런 마법같은 일이 나한테 일어날 수가 없지. 그래 그렇고 말고. 하, 신이시여. 이제야 제게 빛을 내려주십니까. 감사합니다. 더 착하게 살겠습니다.
"맘에 들어?"
"응!"
"다행이다."
"근데 천사가 집도 있어? 너 알고보니 돈도 엄~청 많고 그런 거 아냐?"
"집이 한 세 개 정도 있고, 일 안 해도 충분히 놀고 먹을 정도니까 돈도 많지 아마."
"뭐? 집이 세 개? 세 개라고? 니가 그 조물주보다 위라는 건물주였어??"
천사가 원래 이런거야? 막 이렇게 세속적으로 살면 하늘에서 노하지 않는거야?
"살다보니까 이 세상이 돈 없으면 안 되는 세상이더라고. 그래서 돈 좀 벌어놨지. 나중에 너 만나면 다 쓰려고."
아 이 착한 천사! 나는 와락 별이를 품에 안았다. 갑자기 품에 안긴 별이는 당황해서 그런지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품에서 떼어낸 별이는 볼이 발그레하게 올라와 멍한 눈으로 허공을 보고 있었다.
"너 진짜 내 수호천사 맞구나!"
"다,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여전히 분홍색의 얼굴로 별이가 헛기침을 뱉었다. 나는 널찍한 침대에 활짝 드러누워 큰 숨을 들이마셨다. 좋은 집이라서 그런가. 공기부터가 다른 기분이다. 깨끗하고 높기만한 천장에 곰팡이 하나도 들지 않은 벽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저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속 시원하게 터진 시야. 시원하다 못해 짜릿한 기분에 팔 다리를 기분 좋게 휘저었다.
"잠깐만, 잠깐만. 문별이. 이리 와봐."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별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별이의 팔을 잡아 당겨 별이를 침대 위에 앉히자 서서히 원래 색으로 돌아오던 얼굴에 다시 분홍빛이 감돌았다.
"이제 같이 살거면 확실히 할 건 확실히 하고 가야지."
"뭐를?"
"너 아까 니가 청소도 다 하고 빨래도 다 한다고 했다. 그치?"
"빨래는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냐. 니가 밥도 하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한 댔어."
"......그래?"
"응. 완전."
"뭐 그런 것들은 나한테 일도 아니니까."
"나중에 딴 말 하기 없기다?"
별이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살 때 가장 힘든 게 집안일이었는데 이렇게 일이 덜다니. 아니 가만히 있어봐. 확실히 하려면 종이로 남겨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우리 뭐 계약서 같은 거 쓰자. 나중에 너 말 바꾸면 안 되잖아."
종이를 찾으려 일어나려는데 내 팔을 붙잡아 다시 침대에 앉히는 별이 덕에 다시 엉덩이가 침대에 붙었다. 뭐야... 벌써 말 바꾸려는건가...?
"그런 건 필요 없어. 난 널 위해 존재하니까 니가 원하는 건 다 해줄거야."
"그래...?"
그렇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하면... 믿을 수밖에 없잖아. 어쩔 수 없이 계약서를 쓰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다. 목을 긁적이다 여전히 붙잡혀 있는 팔에 시선이 닿자, 뭐에 놀란 건지 별이가 화들짝 놀라며 잡은 손을 떼었다.
"뭐... 계약서는 안 쓰는 걸로 하고.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이란 말에 별이가 다시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몸을 살짝 비틀어 별이를 바로 마주했다.
"아무 때나 나타나지 좀 마."
귀신이든 천사든 마법사든간에 갑자기 나타나는 통에 매번 심장이 덜컹한다. 거기다 자칫 소리라도 지르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눈초리를 피할 수가 없다. 이상한 사람이 되거나 민폐 인간이 되거나. 갑자기 불쑥불쑥 별이가 나타났던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싫어?"
"싫은 게 아니라. 놀라잖아! 넌 나타나는 당사자니까 모르겠지. 내 입장이 돼 봐!"
"으음... 알았어. 근데 너 보고 싶으면 어떡해?"
"나 보고 싶으면...!"
잠깐만. 이거... 갑자기 되게 부끄럽다. 뭔데 되게 부끄럽지 이거.
부끄러운 기분은 나 혼자 느끼는 듯 했다. 별이는 여전히 초롱초롱한 눈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고 싶으면 어떡하냐니. 천사들은 원래 저런 말 아무렇지 않게 하고 그런건가... 그렇겠지.
"폰이 있으면 좋을텐데."
"살까?"
"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걸 용케도 들은 별이가 금방이라도 나갈 기세로 되물었다. 형편상 폰은 커녕 집 전화도 없이 사는 나였고, 당연히 저쪽 천사는... 천사라서 없어보이는 폰의 존재.
"그거 사자. 폰 사서 나 간다고 말하고 가면 되는거지?"
어어... 그럼 되기는 하는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별이. 나는 빠르게 다시 별이의 팔을 잡았다.
"어디 가?"
"사러!"
"너... 실행력 무지 빠르구나...?"
별이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보였다. 이게 돈 가진 자의 여유라는 건가.
"나도 조건 말해도 돼?"
"어...?"
당황한 두 눈동자가 빠르게 깜빡였다. 내 요구 말할 것만 생각했지 별이가 바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별이도 요구할 게 분명이 있을텐데, 너무 내 요구 말하기에만 정신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별이를 잡았던 손을 놓았다. 어떤 조건을 말할지,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내 조건은 날 찾는 거야."
"어...?"
"그러니까..."
일어서 있는 별이가 한쪽 손으로 내 어깨를 잡고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맞췄다.
"내가 필요하면 꼭 나를 찾아."
별이라는 이름과 잘 어울리는 맑고 반짝이는 눈. 그 안에 담긴 내 모습이 보였다.
"아플 때, 외로울 때, 도움이 필요할 때, 심심할 때 언제든. 폰으로 연락하지 않아도 돼. 너는 그냥 아무 때나 나를 불러. 그러면 언제 어디든 내가 갈거야."
별이는 어깨에 올려 놓았던 손을 내리고 다시 허리를 곧게 폈다.
"예전처럼 혼자 참지 마. 나는 니가 날 찾아줬으면 좋겠어. 내 조건은 그거야."
별이는 또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지킬 거라고 보장할 수도 없지만 지키지 않을 거라고 큰 소리 칠 수도 없는 조건. 대답없이 끄덕이는 고개에 별이가 활짝 웃으며 내 팔을 잡아 당겼다. 순식간에 침대에서 벗어나 별이의 품에 안겨 나를 내려다보는 별이를 올려다봤다.
"이제 폰 사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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