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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썬] 인연

[문썬] 인연 05

[문썬] 인연

 

 

 

 

 

*05화

 

 

 

 

 

"용선아 일어나."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으며 일어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를 깨우는 목소리는 너무도 따뜻해 꼭 꿈인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할 정도였다. 무거운 눈을 겨우 뜨면, 나를 보고 웃고 있는 얼굴이 있었다. 아직도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면 내 두 손을 잡아 끌었고 내 양 어깨를 주물렀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식탁엔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고 현관 옆엔 책가방이 놓여 있었다. 고요하기만 했던 아침에 나와 함께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담겼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일상이지만 내게는 꿈같았던 일상이 별이로 인해 만들어지고 있었다.

 

 

"용선아!"

 

 

누군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게 이렇게 좋은 일인 줄 몰랐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여우가 그런 말을 했었다. 니가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할 거라고. 학교가 끝나기 한 시간 전, 아니 그 전부터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별이 생각에 행복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듯, 교문 앞에는 항상 날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별이가 있었다. 

 

 

"오늘은 어땠어? 학교는 언제까지 나가야 되는 거야? 점심은 맛있었어?"

 

 

매일 보면서. 아침에도 보고, 저녁에도 보고. 평일에도 보고 주말에도 보면서. 별이는 항상 내게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이제 다 끝나. 이 지긋지긋한 고등학교 생활도!"

 

 

이제 정말 고등학교 생활도, 10대의 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다. 19살의 12월은 어떨까 궁금했었는데 막상 맞이한 12월은 그닥 특별할 건 없었다. 그냥 딱 19살의 12월. 고3의 12월. 그것 뿐이었다.

 

 

"오늘 저녁은 뭐야?"

"된장찌개를 끓여 놓긴 했는데. 먹고 싶은 거 있어? 장 보고 들어갈까?"

"심심한데 장 보고 가자."

"그래."

 

 

횡단보도 앞에 서서 별이와 대화를 나누던 중,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두리번 거렸다.

 

 

"엄마. 저 누나 이상해."

 

 

목소리를 따라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나를 보고 있던 시선의 주인공은 엄마 손을 잡고 있는 대여섯살의 꼬마. 아이는 정말 이상한 것이라도 본 것 마냥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약간 겁에 질린 것도 같고.

 

 

"저 누나 혼자 말 해. 귀신이랑 말 하나 봐."

 

 

옆에 있던 꼬마의 엄마는 당황해서 급히 아이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내게 어색하게 웃어 주는데... 저 웃음에 나도 어색하게 답해줘야지. 다행히도 때 맞춰 초록불이 들어왔고 아이의 엄마는 급히 아이를 끌고 횡단보도를 먼저 건넜다.

 

 

"하아... 역시 애들은 솔직해. 분명 저 꼬마 말고도 나 이상하다고 생각한 사람 많았을 거야..."

 

 

옆에 있는 사람이 이상해도 말은 걸지 않는 이 시대의 어른들이었기에 분명 별이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도 입을 다문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민망해졌다. 아까 꼬마처럼 대놓고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여태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거였다.

 

 

"어떡해... 나 진짜 이상한 사람처럼 보였겠다."

 

 

별이는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별아. 너 나한테 밖에 안 보여? 인간의 모습으로 현신 같은 거 못해?"

"할 수 있는데?"

"뭐?!"

 

 

목소리가 너무 컸다. 이번엔 순수한 꼬마가 아니여도 나를 이상하게 보는 많은 눈들이 따랐다. 급한 대로 별이의 손목을 잡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골목 안으로 들어왔다.

 

 

"너, 왜, 너...! 너 현신 할 수 있으면서 안 했어?"

"해야... 했나...?"

"그걸 말이라고 해?! 너 때문에 나만 이상한 사람 됐잖아! 사람들이 미친 사람처럼 봤을 거야!"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어."

"니가 어떻게 알아!"

"오래 살면 생기는 감 같은 게 있거든."

 

 

지금 너 칭찬하는 거 아니거든? 왜 우쭐하는거야, 저거.

 

 

"와 진짜... 나 그럼 한 달 동안 뭐 하고 다닌거야... 와..."

 

 

갑자기 띵-하고 머리가 울려와 이마를 짚었다. 별이가 나타나고 지금까지 길거리에서 중얼거린게 얼마더라. 셀 수도 없다. 매일이었으니까.

 

 

"나는 니가 나한테밖에 안 보이는 존재인 줄 알고."

"응. 나 너한테만 보여."

"현신할 수 있다며!"

"응. 근데 현신 안 하면 아무도 나 못 봐."

 

 

말을 말자. 어찌 됐든 지금이라도 알았으니까.

 

 

"이제부터 다른 사람들 눈에도 보이게 현신해."

"알았어."

 

 

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가만히 별이를 쳐다보아도 별로 달라지는 게 없었다. 여전히 멀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긴 한거야...?

 

 

"된거야?"

"뭐가?"

"현신."

"응."

 

 

뭐 이렇게 간단해. 만화영화에서처럼 불빛이라도 새어나오는 줄 알았더니... 그건 역시 만화였나. 하지만 아직 확신을 하긴 이르다. 나는 별이의 손목을 잡고 다시 골목 밖으로 끌어 옆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카운터에 있던 점원이 보고 있던 폰을 내려놓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혹시 얘 뭐 입었는지 보여요?"

"네?"

 

 

점원에겐 미안하지만, 다짜고짜 별이를 가리키며 질문을 던졌다. 점원은 꽤 많이 당황하는 눈치였으나 내 손가락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리고 별이에게 닿았고. 별이를 훑었다.

 

 

"베이지색 코트요...?"

 

 

하아. 나만 보이는 거 아니구나 이제.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하아. 다행이다."

"풋."

 

 

옆에 있던 별이가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누구 때문에 이 짓을 하고 있는데 웃어 웃긴!

 

 

"나 못 믿은거야?"

"확실히 할 건 확실히 하는 게 좋지."

"똑같네."

"뭐가?"

"니가."

 

 

편의점에 나와서도 별이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뭐가 재밌는지 계속 싱글벙글이었고 장을 보는 동안엔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어딘가 괘씸했지만 그래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별이를 알아 보는 사람들을 보며... 참았다. 이제 더 이상 내 눈에만 보이는 존재가 아니니까. 오늘은 그걸로 됐으니까.

 

 

 

*

 

 

 

티비를 틀고 소파에 앉은 별이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배부르게 먹은 저녁 식사에 이대로 있다간 잠이 솔솔 올 것 같았다. 별이는 아직도 적응 중인 스마트폰을 만지며 놀고 있었다.

 

 

"용선아."

"응?"

"너는 20살 되면 뭐를 제일 하고 싶어?"

 

 

20살? 음...

 

티비를 보려고 틀었던 몸을 바로 했다. 별이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별이가 보고 있던 폰을 내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돈 벌어야지."

"대학은 정했어?"

"전문대 가서 빨리 취업하거나 4년 장학생으로 받아주는 국립대 가려고."

 

 

내 대답에 별이가 말없이 시선을 깔았다. 

 

 

"그런 거 말고."

 

 

별이가 다시 내게 눈을 맞추며 말했다.

 

 

"니가 하고 싶은 거."

 

 

내가 하고 싶은 거...?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게 있었나. 있었다면 그때는 언제일까. 너무나도 까마득한 과거에 내가 하고 싶은 게 뭐였는지 쉽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거'라는 게 무얼 뜻하는지도.

 

 

"별이 너는 하고 싶은 게 뭔데?"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별이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별이는 가만히 생각하다 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너랑 칼싸움 하는 거?"

"뭐?"

 

 

무슨 뚱딴지같은 말을 하는 거람. 오만상을 쓰며 별이를 보자 별이는 그런 내 모습이 웃긴지 웃음을 터트렸다.

 

 

"너랑 놀러도 가고 싶다. 너무 평화로워서 따분할 정도인 그런 곳으로."

"나도... 가고 싶다. 여행."

 

 

살며 여행이라고는 동물원이 전부였던 내가 하고 싶은 것.

 

 

"그리고?"

 

 

별이가 소파 위로 두 다리를 올렸다. 양반다리를 한 자세로 내 쪽으로 몸을 틀곤 내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맛있다고 소문난 맛집엔 다 찾아가서 음식도 먹고 싶어. 보고 싶은 영화도 다 보고 싶고 PC방에서 12시간 넘게 게임도 할래! 비행기! 비행기도 타고 싶어!"

 

 

생각을 하면 할수록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하고 싶은 것 따윈 없는 줄 알았는데. 없다고 착각했던 거였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마음이 편했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가수 앨범도 왕창 살거야!"

"누구?"

"있어 솔라라고! 노래도 진짜 잘하고 완전 예뻐!"

"어... 솔라가 그렇게 좋아...?"

"엉! 너 몰랐지? 나 솔라 완전 팬이야!"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니 그 기쁨은 더욱 커졌다. 행복에 젖어드는 나와 달리 앞에 앉은 별이는 무언가 조금 언짢은 눈치지만 뭐.

 

 

"그래서. 솔라 앨범 사려고 돈 많이 벌려는 거야?"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 토라진 말투와 얼굴로 별이가 물었다. 입술을 깨물며 가만히 생각하던 나는 크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니가 하고 싶은 일은 뭐야?"

"일?"

 

 

별이가 다시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이번 질문도 그리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입을 꾹 물 수밖에 없었다.

 

 

"응. 갖고 싶은 직업이나 하고 싶은 일. 그게 아니면 좋아하는 일도 괜찮아."

"그런 거 없어."

"나는 무사가 되고 싶었어."

"어?"

 

 

별이가 앉아 있는 나를 갑자기 두 손으로 끌었다. 붙은 무릎과 성큼 가까워진 얼굴.

 

 

"아주 의롭고 옳은 무사. 그게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었어. 어렸을 때 나보다 검술이 뛰어난 벗이 하나 있었거든. 그 애랑 매일 같이 치고받고 하다보니 어느새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있더라. 그래서 나는 무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

"나는..."

 

 

별이가 먼저 꺼낸 자신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데 효과가 있었다. 아무 것도 없다고 착각했던 또 다른 속마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음악이 좋아!"

 

 

차분하게 내 대답을 기다리던 별이는 아주 깊숙한 속에서 꺼낸 내 대답을 듣고 살짝 놀란 듯 싶더니 금세 방긋 웃었다. 

 

 

"영화가 좋아!"

"?"

"게임이 좋아!"

"......"

"솔라 콘서트도 좋아!"

 

 

방긋 웃었던 별이의 표정은 점점 난감한 얼굴로 변해갔다. 하지만 내가 꺼낸 모든 말들은 내 속에서 꺼낸 진심들이었다. 정리되지 못한 채 그저 구석 여기저기에 박혀있기만 했던 진심들.

 

 

"그래. 그럼 우리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일도 모두 잃어버린 내게 별이는 재촉하지도 않고 나무라지도 않았다. 누군가는 잘못됐다고 고개를 가로저을 내 진심들을 별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늦지도, 잘못되지도 않았다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별이는 언제나 그랬듯 내 눈을 바라보며 활짝 웃어주었다. 그런 별이의 눈을 마주할 때면 나는 가끔 속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온전히 내 편인 두 눈. 나만을 담고 있는 두 눈. 그럴 때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나는 별이의 품에 얼굴을 파묻어 버린다. 지금처럼. 그럼 별이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나를 꼭 안아준다.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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