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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썬] 인연

[문썬] 인연 03

[문썬] 인연

 

 

 

 

 

 

*3화

 

 

 

 

수능을 끝낸 등교길은 가벼웠다. 물론 망했더라면 결코 가볍지 않을 등교길이었지만 나는 잘 봤으니까.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서서 초록불이 들어오길 기다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최근 들어 이렇게 기분이 좋았던 날이 있던가. 이 기분이 그저 하루종일 계속 되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흥얼거리던 콧노래는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에 일시정지가 되고 말았다. 나올 때 하늘이 흐리긴 했으나 오늘 비가 온다는 예보는 없어서 우산을 챙기지 않았는데. 분무기처럼 내리던 빗물이 조금씩 무거워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우산이 없기는 똑같았다. 다들 갑자기 내리는 비에 허둥지둥 움직였다. 서둘러 편의점으로 들어가 우산을 사는 사람도 있고 아직은 맞을 만한 비라 그런지 그냥 서있는 사람, 어디든 비를 피하려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는 사람 등 제각각이었다.

 

횡단보도 신호등에 초록불이 들어오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집에 있는 우산들을 생각하면 여기서 우산을 사는 건 돈 아까운 일이다. 한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처지에 몇 천원 하는 우산 마저도 사치였으니까. 점점 두꺼워지는 빗방울에 대한 답은 빨리 학교를 가는 것. 그것 뿐이었다.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횡단보도를 달려가던 중 내게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고개를 돌렸다. 얇은 손목을 따라 올라가면 검은색 우산을 들고 씩 웃고 있는 별이가 있었다.

 

 

"문별이..."

 

 

오늘도 어김없이 예고도 없이 등장한 모습에 멍하게 서있자, 별이가 반짝이고 있는 신호등을 보곤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5초 남았다. 얼른 가자."

 

 

그리고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사뿐히 잡은 손으로 날 끌었다. 별이의 몸에 밀착해 뜀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자 반짝이던 신호등이 바로 빨간불이 되었다.

 

 

"너 뭐야...?"

"나? 니 수호천사."

 

 

여전히 방긋 웃는, 나보다 살짝 높은 키를 가진 별이를 올려다봤다. 이 놈의 수호천사는 아무 때나 나타나는 게 취미인 듯 싶었다.

 

 

"봐봐. 우리가 같이 살았으면 내가 우산 챙겨줬을텐데. 같이 안 사니까 비맞고 가잖아."

 

 

오호라. 이렇게 영업을 하시겠다. 별이를 따라 나란히 걷자 두꺼워진 빗방울이 우산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토토토톡. 어느새 쏟아지는 비에 사람들은 피를 피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침엔 잘 일어 났어?"

"일어나기 쉬운 아침이 어딨어."

"그러니까. 우리가 같이 살았으면 내가 매일 개운하게 일어나게 깨워줄텐데."

"......"

"밥은 먹고 나왔어?"

"아니."

"봐봐. 우리가 같이 살았으면 내가 매일 아침밥도 챙겨줄텐데!"

 

 

지금 별이가 나타난 목적은 아무래도 영업인 듯 했다. 우리가 같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어떻게든 찾아내며 별이가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학교 앞에 도착할 때까지 별이는 우리가 같이 살았으면 좋았을텐데를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벌써 다 왔네."

 

 

교문 앞에 다다르자 별이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오늘 하루도 좋은 하루 보내고. 비오면 또 데리러올게."

"우산 있잖아. 안 데리러 와도 돼."

"내가 우산이 없잖아."

 

 

내 손을 잡고 있던 손을 떼고 별이가 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러니까 같이 쓰고 가야지."

 

 

입고 있는 자주색 코트에 두 손을 콕 박은 별이가 우산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어, 젖잖...! ...... 아..."

 

 

나타날 때처럼 사라질 때도 제 멋대로구나. 어느새 사라지고 없는 텅 빈 눈 앞을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면 간다, 오면 온다 말 좀 하고 다니지."

 

 

제 멋대로인 별이가 왔다 간 흔적인 우산을 꼭 쥐며 천천히 교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

 

 

 

수능이 끝난 직후의 교실은 어수선했다. 가채점을 해보며 시험을 잘 본 친구들은 기쁨의 미소를 숨기지 못했고 평상시보다 시험을 망친 친구들은 좌절했다. 누군가는 시험 결과에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12년의 긴 싸움은 순식간에 막을 내렸고 길었던 시간에 비하면 결과는 너무나도 짧은 순간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아침보다는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가 되었다. 점심시간을 가장 좋아하는 학생들은 빠르게 급식실로 뛰어갔다. 나도 느긋이 급식을 받아 들고 빈 자리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푸짐한 오늘 메뉴에 입맛이 감돌았다.

 

 

"뭐야? 너 친구 없어?"

"히익...!!!"

 

 

아오, 이 귀신!!! 진짜!!! 하루 아침에 내성이 생겨서 그나마 다행인가. 소리를 지르는 건 겨우 참았다. 또 예고도 없이 나타난 별이를 보며 눈에 힘을 주고 별이를 노려봤다.

 

 

"너 죽을래?!"

"나 이미 죽은 몸인데 또 죽이려고?"

"와 진짜... 그럼 한번 소멸해볼래?"

"야아...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는거야..."

 

 

별이가 축 쳐진 눈으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갑자기 튀어 나오면 어떡해! 놀라잖아!"

"아니 난 그냥... 너 뭐하나 궁금해서..."

"여기서 내가 소리라도 질렀으면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겠어? 미친 사람 취급할 거 아니야!"

"미안해..."

 

 

별이는 손가락으로 애꿎은 테이블을 문지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참자. 참아야지. 화를 꾹 누르고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 앞에서 화를 내지 말자.

 

 

"근데 왜 혼자 먹어?"

"혼자가 편해서."

 

 

내 주변에 친구들은 없었다. 같은 반 친구들도 내 옆에서 같이 밥을 먹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연히...

 

 

"김용선. 너 수능 잘 봤다며?"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옆으로 다가온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식판을 들고 서있는 우리 반의 반장이자 전교 1등 이꽃님과 그 무리들. 내가 혼자 밥을 먹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좋겠네. 하긴. 공부라도 잘해야 인생 필 기회가 생길 거 아니야."

 

 

꽃님의 말에 옆에 있던 무리들이 기분 나쁘게 비웃기 시작했다.

 

 

"근데 돈이 없어서 원하는 대학이나 가겠어? 그냥 돈이나 벌러 나가는 게 어때?"

 

 

점점 표정을 관리하기가 어렵다. 이꽃님이 내게 시비를 거는 이유는 하나였다. 열등감. 부유한 집안에서 모자랄 것 없이 사랑 받고 인정 받으며 자라온 존재가 나처럼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터리와 비교된다는 열등감. 그게 싫었던 이꽃님은 나를 순식간에 외톨이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가진 강력한 집안은 학교 선생님들마저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이 학교에 아무도 내 편은 없게 만들었다.

 

 

"어머. 오늘도 밥 많이 받았네? 하긴. 급식이라도 많이 먹어야지. 집에 가면 먹지도 못 하잖아."

 

 

들고 있는 젓가락을 부술 듯 꽉 쥐었다. 요새 잠잠하다 했더니 수능 결과가 금세 이꽃님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내가 막판에 퇴학을 하는 한이 있어도... 아무래도 너는 죽이고 가야겠다. 그런 마음으로 들고 있던 젓가락을 테이블 위로 쾅 내려 놓는 순간. 뒤에 있던 다른 아이에게 밀린 꽃님이 중심을 잃고 몸이 기울어졌다. 식판이 의자에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사방으로 튀는 국과 반찬들. 그 모든 광경이 슬로우모션처럼 눈에 담기는 순간 자주색 코트가 눈 앞에 보였다. 그리고 내 얼굴을 감싸는 별이의 손길.

 

 

쿠당탕탕!

 

 

별이의 품에 가려 앞은 보이지 않은 채,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나를 꼭 안고 있던 별이가 나를 품에서 떼어 천천히 옆으로 물러나자 별이에게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았던 광경이 나타났다. 텅 비어버린 식판과 사방으로 퍼진 식판에 담겨있던 음식들. 그 음식들을 고스란히 맞아 얼굴이고 교복이고 망가진 꽃님 무리의 아이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급식실 바닥에 철푸덕 넘어져 식판에 담겨 있던 음식들을 그대로 머리로 옮긴 꽃님까지. 나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을 천천히 손으로 가렸다.

 

 

"누구야! 누가 나 밀었어?!"

 

 

모두가 숨을 죽여 조용한 급식실에 꽃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급식실 끄트머리에서 밥을 먹던 선생님들은 놀라 허둥지둥 이쪽으로 달려 오고 있었다. 꽃님은 글썽이는 눈과 붉어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다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하게 달려온 선생님들의 부축을 받으며 꽃님과 꽃님 무리가 급식실 밖으로 사라지자 조용했던 급식실이 다시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찼다.

 

 

"아씨. 이 옷 비싼건데."

 

 

이 상황엔 관심이 없는 듯, 별이는 음식물이 튄 자신의 옷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아! 김치! 김치 묻었어! 김치 국물 빼는 게 제일 어려운데!"

 

 

뭉크의 절규처럼 그 자리에서 주저 앉으며 별이가 무릎 속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주저 앉은 별이를 슬쩍 보니 고급스런 코트에 반찬들이 튄 게 보였다. 반면 내 교복을 내려다보니 국물 하나 튀인 곳 없이 말끔하기만 했다.

 

 

"별..."

"내 코트... 내 아름다운 코트..."

"별아."

 

 

푹 파묻혀있던 고개를 빼꼼 드는 별이.

 

 

"고마워."

 

 

이 말이 뭐라고... 왜 이렇게 열이 나는 것 같지.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재빨리 별이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놓았던 젓가락을 집고 밥을 콕콕 집었다.

 

 

털썩-

 

 

바닥에 주저 앉아 있던 별이가 일어나 비어 있던 앞 자리에 앉았다. 민망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겠는데 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식판 앞 쪽에 놓인 별이의 뽀얀 손이 보였다.

 

 

"나 그래도 멋지지?"

"어?"

 

 

별이가 몸을 숙여 얼굴을 내쪽으로 내밀었다. 살짝 놀라 고개를 드니 별이가 빤히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이런 거 옷에 튀어도. 나 멋지지?"

"아... 어... 멋지지..."

"역시. 이런 거 튄다고 내 패션이 죽을 리가 없지!"

 

 

단순한 건가. 별 생각이 없는 건가. 별이를 보며 느리게 눈을 꿈뻑거렸다.

 

 

"괜찮아?"

 

 

별이의 질문. 이번엔 아까 질문보다 훨씬 조심스러웠다. 나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됐어."

 

 

나를 보며 웃는 별이를 보며 이상하게 울컥 감정이 올라왔다. 항상 내 편이 없었던 이 곳에... 지금 이 순간. 내 편이 하나 있구나. 내 입가에도 살포시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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