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썬] 인연
*1화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정말 내 삶이 끝일 거라고. 하지만 눈을 떴을 때 내 앞에 보인 건, 죽일 듯이 달려오는 트럭이 아니라 활짝 웃고 있는 새하얀 얼굴이었다. 반짝이는 은회색 머리,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은색 코트. 그 안에 깔끔하게 차려입은 셔츠와 청바지. 처음보는 낯선 여자는 나를 품에 안고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누, 누구세요...?"
이 여자가 마법이라도 부린건지 횡단보도 위에 서있던 나는 어딘지도 모를 건물 옥상에 올라와있었다. 그녀의 얼굴 뒤로 맑고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만큼이나 새하얗게 맑은 구름이 금방이라도 닿을 듯.
"수호천사."
분홍빛 입술이 떨어지며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나왔다. 꽤 도도해보이는 외모와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미...쳤어..."
아아. 이건 꿈이야. 꿈일거야. 꿈이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잖아. 서둘러 그녀의 품에서 벗어난 나는 두 눈을 꼭 감고 애꿎은 양 볼을 찰싹찰싹 때렸다. 꿈이라면 얼른 꿈에서 깨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뭐 하는 거야. 때리지마."
너무나도 생생한 촉감이 전해져온다. 내 팔을 잡는 그녀의 손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생생한 촉감. 생생한 온도. 아무래도 이건 꿈이 아닌가봐.
"누구세요 진짜."
"말했잖아. 수호천사라고."
"말도 안 돼."
천사가 이렇게 생겼어? 날개는 어딨어? 머리 위에 고리는? 천사는 다 한눈에 반할 만큼 예쁜... 그래. 외모는 그렇다 치고.
길거리에 가다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차림새를 한 이 여자는 천사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인간이다. 인간이야. 이리보고 저리봐도 인간 같은데.
"왜 그렇게 봐? 나 천사처럼 안 생겼어?"
그걸 말이라고.
"나는 너의 행복을 위해 나타난 너만의 수호천사야."
의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나 따위는 신경도 안 쓰이는 모양이다. 자칭 수호천사는 아무 것도 모르는 내게 자신의 소개를 늘어놓았다.
"나는 니가 행복해지길 도울거야."
"...... 그럴거면 진작 나타났어야지."
수호천사고 뭐고. 당신이 진짜 내 수호천사라면 이미 내가 태어났을 때. 아니. 적어도 내가 힘들었던 수많은 시간들 중에 나타났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남편이었던 자가 버리고 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 가난하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을 때. 가난한 집 딸이라는 이유로 도둑으로 누명을 썼을 때. 동네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을 때. 유일한 가족이었던 엄마가 하늘로 가버렸을 때. 당신이 나타났어야 했을 때가 얼마나 많았는데 이제서야?
입술을 물었다. 주마등처럼 떠오른 떠올리기 싫었던 과거에 결국 눈물이 맺혔다. 자칭 수호천사는 그런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
"당신 없이도 충분히 잘 살았어."
"알아."
그녀가 살풋 미소를 지었다.
"너, 정말 강하더라."
결국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영영 네 앞에 나타나지 못할까봐 걱정이 들 정도로."
한번 터져버린 눈물샘은 그치지 않고 터져나왔다. 양 볼을 적시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끅끅 거리는 울음 소리가 섞여 나왔다.
"지금이라도 날 찾아줘서 정말 다행이야."
다시 한 번. 나는 그녀의 품에 안겼다. 따뜻하고 포근한, 너무나도 그리웠던 누군가의 품에.
"이제 내가 널 행복하게 해줄게."
*
수호천산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이든 초능력이든 부리는 건 확실했다. 자칭 수호천사는 눈 깜짝할 사이 나를 시험장으로 데리고 갔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순간이동이란 마법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입이 떡 벌어졌지만 그런 감상을 하기엔 너무나 급박한 상황이었다.
하. 이 난리를 치고 시험을 잘 볼 수 있을까. 자리에 앉은 나는 머리를 쥐어쌌다. 컨디션이고 페이스고 이미 다 틀린 것 같은데. 재수는 어떻게 하지. 돈은 어떻게 하고.
"걱정마. 너 시험 잘 볼 거야."
히익...!
"뭐야 당신 왜...!"
"쉬잇."
깜짝 놀라 고개를 든 내 입을 그녀가 급히 막았다. 주변에 있던 다른 아이들이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나만 힐끔 쳐다보았다. 나만...?
"지금 다른 사람들 눈엔 내가 안 보여."
"뭐야. 당신 귀신이였어?!"
"천사라니까 그러네."
내 입에서 손을 뗀 자칭 수호천사는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당신 아니라 문별이."
"...?"
"내 이름이야."
"문... 별이...?"
"그렇지."
자칭 수호천사가 이름을 가르쳐줬다. 자신의 존재처럼 참 특별한 이름이다. 별이란다. 별...이가 자기 이름을 말하고 있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쨌든 걱정 하지마. 내가 있는 한 시험 망칠 일은 없을거야."
"나 시험 보는데 옆에 있을 거야?"
"어우! 아니! 나 시험장에 있는 거 너무 싫어! 밖에 나갈거야."
질색팔색을 하며 인상을 찌푸리는 별이는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미 망칠 것 같아... 틀렸어."
"그건 봐야 아는 거지. 잘 하고 이따 보자."
앞에 있던 별이의 형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놀란 눈을 깜빡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지만 어디에도 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 지금은 사라져주는게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이제야 단전에서 나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하루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펼쳐진 믿기지 않는 일들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고개가 저어졌다.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자칭 수호천사라는 사람... 아니 귀신인가... 무튼 자칭 수호천사를 만나고. 태어나서 처음 순간이동이란 걸 해보고. 귀신이랑 혼자 대화도 해봤다. 와. 김용선 인생 살다살다 별 일이 다 일어나는구나.
심신안정 시간은 앞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선생님을 보며 끝이 났다. 선생님의 손에 들린 묵직한 시험지를 보며 잊고 있던 현실이 다시 와닿았다. 그러자 잊혔던 긴장도 서서히 올라왔다. 긴장으로 가득찬 고요가 교실 안을 채웠다. 잠시 후 시험을 알리는 종이 치고 손에 누런 시험지가 쥐어졌다. 마른 침을 삼키며 샤프를 잡아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렸을 땐 모든 시험을 아주 편안하게 마치고 마지막 답안지를 제출하고 있었으니까.
"잘 봤어?"
"아씨, 깜짝이야!"
시험을 마친 학교에선 수많은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교문 앞에는 학생들을 기다리는 많은 부모님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부모님의 품에 달려가 위로를 받고 위안을 얻었다. 그런 만남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재빨리 지나치려 했는데, 지금까지 사라져있던 별이가 갑자기 내 옆으로 나타나며 내게도 예상치 못한 만남 하나가 생겼다.
"잘 봤지? 그치?"
"뭐... 그럭저럭..."
"봐봐. 내가 뭐랬어. 걱정 말랬지?"
"설마 니가 무슨 짓 했어? 나한테 마법이라도 걸었어?"
"아니. 마법은 무슨. 그냥 내가 있다는 것만으로 니 마음이 편해진거야. 넌 그냥 실력발휘만 한 거고."
거짓말 같지는 않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별이도 군말 없이 내 옆을 나란히 걸으며 따랐다. 시험이 끝나 홀가분한 표정이 된 아이들, 망쳐버려 울상이 된 아이들. 그런 아이들과 함께 하는 많은 가족들을 지나쳤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많이 외로울 줄 알았는데.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별이를 올려다보았다.
"흐음... 근데 말이야."
이크.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별이의 눈을 서둘러 피했다.
"너 왜 갑자기 반말 하는 거야?"
걸음을 우뚝 멈춘 별이를 따라 나도 걸음을 멈췄다. 별이는 동그래진 눈을 꿈뻑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너도 반말하잖아."
"너 내가 몇 살인지 알아?"
"몰라."
"내가 자그만치 1000살이 넘었어!"
"허어어~ 자랑이다."
놀라는 척 대충 반응을 해주곤 시큰둥하니 별이를 지나쳤다. 별이는 내 태도가 맘에 안 들었던 모양인지 콧방귀를 끼며 쿵쿵 거리는 발걸음으로 내 뒤를 따랐다.
"어린 것이 버릇이 없구나!"
"네, 할머니."
"뭐? 할머니?? 할, 머, 니?"
할머니란 단어가 꽤 충격적이였는지 별이의 표정이 황당하게 벌어졌다.
"지금 내 얼굴을 보고도 할머니 소리가 나와? 어?"
"천 살이라며. 그럼 할머니지. 아냐. 증조 할머니? 고조 할머닌가? 아니지 아니지. 조상님 아니야?"
별이는 놀람을 금치 못한 듯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요즘 어린 것들은... 너무나 맹랑하구나."
진짜 옛날 사람이 쓸 것 같은 말투로 말하는 별이를 보며 나는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도도하고 차갑게 생긴 외모와 달리 이렇게 허점 투성이인 존재였다니. 별이가 눈치 채지 않게 서둘러 씰룩거리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저기... 용선아."
"왜애."
"그... 참 좋은 단어가 하나 있던데."
"무슨 단어?"
충격받은 기색을 정돈하고 다시 내 옆으로 선 별이가 콧잔등을 긁으며 눈알을 굴렸다.
"그 있지 않느냐. 손위 형제를 일컫는 말이라던가. 나이가 많은 상대를 부르는 그 좋은 단어 있지 않느냐."
왜 또 사극톤인거야. 어둑해진 길거리를 걸으며 잠깐 잠깐 비추는 가로등 빛에 별이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부끄러워 하는 듯, 설렘 가득한 얼굴로 헛기침을 하며 따라 걸어오는 별이를 보며 다시 걸음을 멈췄다.
"손위 형제면... 아."
뭔 지 알 것 같다.
"언니?"
별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가로등 빛이 필요없을 정도로 밝아졌다. 언니라는 단어 하나에 이렇게 좋아할 일이야...?
"그래 그거!"
"싫어."
"왜!"
니가 이러니까. 뒷 말은 속으로만 삼키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별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린 아이처럼 칭얼댔다.
"그 좋은 단어를 두고 왜 안 쓰는 거래..."
"아휴... 엄청 투덜거리네..."
별이는 집 앞에 다다를 때까지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내가 대꾸를 하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고. 천 살은 거꾸로 먹은 모양인지 별이의 모습은 천 살 할머니가 아니라 열 살 아이 같았다.
"나 다왔어."
"어? 그러네."
별이가 고개를 들어 낡은 빌라 건물을 올려다봤다. 가만히 팔짱을 끼고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있던 별이가 팔짱을 풀고 내 눈을 마주봤다.
"용선아."
"응?"
"나랑 같이 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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