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썬] 인연
*2화
막 씻고 나온 뒤편 욕실에서 새하얀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말리며 나오다 떠오르는 아까의 상황에 모든 움직임이 우뚝 멈춰섰다.
'나랑 같이 살래?'
입에서 어처구니 없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귀신인지 사람인지 갑자기 내 눈 앞에 나타난 것도 모자라서 이번엔 같이 살자고 말을 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황당한 눈으로 바라본 별이의 눈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싫어.'
'어? 왜? 왜 싫은데?'
'내가 뭘 믿고 너랑 같이 살아?'
'뭘 믿긴! 나 못 믿어? 나 니 수호천사라니까?'
'그것부터 못 믿겠는데.'
같이 살자는 제안에 당연히 따를 것이라고 생각한건지. 싫다고 말한 대답에 별이는 많이 당황한 눈치였다. 길 잃은 강아지처럼 혼자 눈알만 굴리며 끙끙거리던 별이는 입이 삐죽 나와선 아쉬운 표정을 한껏 지었었다.
'정말이야...?'
'응. 정말.'
'알았어...'
생각했던 것과 달리 별이는 금방 꼬리를 내렸다. 왜 자기를 못 믿냐고 꼬치꼬치 묻고 따질 줄 알았는데 혼자 슬픔에 잠겨버리더니 조심스럽게 한번 되묻고는 금세 제안을 꺾었다. 조금 더 치근댈 줄 알았는데.
'그럼 저녁은?'
'어?'
'나랑 저녁 먹자!'
'싫어.'
사실 지금 생각하면 왜 별이의 제안에 다 싫다고 대답한 건지 잘 모르겠다. 저녁 정도야 같이 먹을 수 있었는데 왜 굳이 싫다고 했을까. 싫다고 말했을 때 나오는 시무룩한 별이의 표정이 보고 싶어서 그랬던걸까. 아니면... 아직은 누군가와 함께인 것이 어색해서 그랬던 걸까.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 물을 꺼냈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니 코 끝이 찡해지는 기분이었다. 냉장고에서 고개를 돌리니 텅 빈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작고 낡은 이 집에서 그나마 가장 넓은 공간. TV도 없는 집에는 고요함만 항상 가득했다.
"오늘은 좀... 외로운 것 같네."
똑똑.
뭐지? 우리집 문을 두드리는 거 같은데? 이 시간에 우리집에 올 사람은 전혀 없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온 몸에 공포심이 돋았다. 요즘 세상이 너무 위험하단 말이야. 나는 마시던 물을 내려놓고 거실 한 편에 놓여있던 청소봉을 잡았다.
똑똑.
다시 들려오는 노크 소리. 나는 숨을 죽이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저 밖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5초, 10초, 20초가 지났다. 밖에선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그렇다고 문 앞을 떠나는 발 소리도. 쥐고 있는 봉을 더 강하게 쥐었다.
톡톡.
"으악!!!"
식은땀이 흘러내릴 것 같은 긴장감 속에 갑자기 누군가 내 왼쪽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몰아치듯 올라오는 공포심에 온 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잡고 있는 봉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으악! 으아아악!!"
귀신이면 얼른 꺼지고 사람이여도 얼른 꺼져라! 뭔가를 때리고 있는 느낌은 났지만 무서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있는 힘껏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열심히 때릴 뿐이었다.
"아! 아! 잠깐만! 잠깐만! 용선아!!"
용선...? 내 이름과 어느새 익숙해진 목소리에 질끈 감았던 한쪽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조금씩 시야가 밝아지며 바닥에 엎어져 온 몸을 웅크리고 있는 별이가 보였다. 자신을 힘차게 내리치던 매질이 멈추자 별이도 조심스레 고개들 들었다. 고개를 든 별이와 눈이 마주치자 금방이라도 내리치려고 들었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문별이...?"
바닥에 엎어져있던 별이가 몸을 일으켰다. 얼굴을 잘못 맞은 모양인지 눈가에 작은 상처가 보였다. 별이는 내가 잡고 있던 봉을 잡아 가져갔다.
"이거는 잠깐 치워둘게."
별이는 부엌 제일 구석에 청소봉을 숨기다시피 놓고 다시 내 앞으로 걸어왔다. 맞은 데가 아픈 모양인지 팔과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으며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 내 앞에 다가온 별이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니 빨갛게 상처가 그어진 별이의 눈가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너 진짜 힘 세구나."
별이가 맞은 머리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너 왜 여기 있어...?"
"노크 해도 반응이 없길래. 그냥 들어와 봤지."
"이거 주거침입이야. 불법이라고."
"그러게... 다신 이러지 말아야겠다. 그랬다간 내 몸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아."
별이가 맞은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아 여기 멍들 것 같아- 별이가 맞은 팔뚝을 살피며 울상을 지었다.
"내 잘못 아니야. 니가 잘못해서 맞은거야."
괜히 찔리는 마음에 툴툴거리며 별이에게 말하자 별이가 힐끔 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면 어쩔건데! 이건 명백하게 니가 잘못한거야!
"두 번 잘못했다간 나 두 번 죽겠다."
"뭐?!"
"아니... 밥 먹었어?"
내 쪽에서 큰 소리를 내니 오히려 별이가 내 눈치를 살폈다. 얼마 보지 않았지만 역시 차갑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본 성격은 순진하고 귀여운 것 같았다. 힐끔힐끔 내 표정을 살피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별이를 보며 흥-하고 콧방귀를 한번 뀌었다.
"당연히 먹었지."
"거짓말."
"니가 거짓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난 다 알 수 있어."
"너 막 우리집에 CCTV 달아놓고 그런거 아니지? 어? 그랬어? 그랬으면 수호천사고 뭐고 당장 신고해버릴꺼야!"
"아니야... 그런거...!!"
당황한 표정의 별이가 두 손을 급히 저었다. 생각보다 이거, 놀리는 재미가 있는 것 같다. 큰 소리만 내면 놀라서 눈치를 보는게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갈 것만 같았다.
"싱크대에 물기가 전혀 없고 설거지 한 흔적도 안 보이니까 당연히 저녁 안 먹었겠거니 한거야."
생각보다 코난이구나...? 괜히 민망해진 나는 별이의 눈을 피하며 코를 비볐다.
"나랑 밥 먹자."
"싫다고 했잖아."
"내가 너랑 먹고 싶어서 그래."
침이 꼴깍 넘어갔다. 순순히 물러나던 아까와 달리 물러나지 않고 조용히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별이였다. 사실 싫은 이유는 없었다. 같이 밥을 먹으면 안 될 이유도 없었다. 그런 이유들은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
"그니까 나랑 밥 먹자."
"밥 못 먹고 죽은 귀신이 붙었나..."
"아니야. 나 생각보다 잘 먹고 다녔어."
아... 그래...? 대답을 바라지 않은 말에 대답하는 별이를 보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별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내 허락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반짝이는 눈을 보고 있으니 별이의 눈가에 난 상처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작더라도 상처는 상처. 오히려 작은 상처가 더 아픈 법인데. 따갑지는 않을까.
"잠깐만 이리 와봐."
"왜...?"
"얼른."
별이의 팔을 잡아 끌었다. 별이는 영문을 모른 채 내게 끌려 소파에 앉았다. 멀뚱히 앉아 있는 별이를 뒤로 하고 찬장에 놓인 구급상자를 가져와 별이의 앞에 앉았다.
"가만히 있어."
상처약을 꺼내 손가락에 작게 짜고 별이의 상처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다친 눈가의 눈을 꼭 감은 별이는 내 손이 닿을 때마다 꼭 감은 눈을 움찔 움찔 거렸다.
"따가워?"
"아니. 안 아파."
"아프냐고 안 물었는데. 따갑냐고 그랬지."
"...... 안 따가워."
약을 다 바르고 다시 구급상자를 뒤져 작은 크기의 반창고를 꺼냈다.
"반창고 붙여줄까? 아니면 그냥 놔둘래?"
"붙여줘."
그래. 별이는 반창고를 뜯는 내 손을 내려다보다 그대로 올라가는 내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 시선은 어느새 내 손에서 내 얼굴로 옮겨져 있었다.
"...... 눈 감아."
결국 별이의 시선을 못 이기는 건 나였다. 너무나도 가까운 위치에서 빤히 쳐다보는 별이의 시선이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별이는 순순히 눈을 감았고 그제야 맘이 좀 편해진 나는 떨리지 않는 손으로 별이의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줄 수가 있었다. 붙인 반창고를 따라 바로 옆에 놓인 별이의 감긴 눈이 보였다. 속눈썹 한 가닥까지도 잘 보일 거리에서 어느새 시선은 별이의 얼굴을 천천히 담고 있었다. 오똑하게 솟은 코와 앙 다문 입술. 잡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와 날렵한 턱선. 그렇게 별이의 얼굴을 한 바퀴 돌다 다시 눈가로 돌아왔을 땐, 아까와 달리 번쩍 뜨여 있는 별이의 두 눈동자가 반기고 있었다.
"흐익!!"
놀라버린 나는 그만 별이의 얼굴을 한 손으로 밀어버리고 말았다. 온 얼굴이 손에 짓눌린 채 소파로 털썩 넘어지는 소리가 나자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번뜩 정신이 들었다.
"미, 미안..."
별이가 천천히 뉘인 몸을 일으켰다.
"내가 그렇게 싫어?"
"어?"
몸을 일으킨 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치도 못한 말이었다. 왜 밀었냐 화를 내거나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을 줄 알았는데 그 어떤 것도 내 예상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진심으로 자기가 싫냐고 묻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낯선 눈빛으로 별이는 내게 그렇게 물었다. 자기가 싫냐고.
"얼굴 밀어 버릴 만큼 내가 보기 싫은 거야?"
진지하게 물어오는 별이의 대답에 나는 거짓말도 장난도 칠 수가 없었다.
"아니야. 그런 거."
"정말...?"
"응. 너 안 싫어. 지금은 실수였어. 미안해."
실연 당한 주인공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별이는 싫지 않다는 내 대답에 바로 표정이 밝게 변했다. 씩- 별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도."
생글생글 미소를 짓고 있는 별이가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나도 싫어하지 않아. 하나도."
그 미소와 말투는 오늘 하루 만난 별이의 모습 중 가장 행복하고 설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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