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27화
보글보글 국이 끓는 소리와 일정하게 도마를 내리치는 소리가 들린다. 방 안 가득 수면욕보다 식욕을 깨우는 음식 냄새에 용선이 눈을 떴다. 눈을 뜨니 보이는 익숙한 뒷 모습. 흐렸던 그 모습이 조금씩 선명해지면, 용선이 자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잘 잤어요?"
냉장고쪽으로 몸을 틀던 별이가 잠에서 깬 용선을 보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용선은 퉁퉁 부은 눈으로 눈을 깜빡였다. 별이는 그런 용선의 모습에 씩 한번 웃고는 냉장고에서 달걀을 꺼냈다.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해요."
별이가 다시 싱크대로 고개를 돌리자 용선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곤 화장실의 위치를 확인하고 바로 직행. 쿵- 하고 화장실 문이 세게 닫혔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 용선은 거울 속 자기 모습을 확인하곤 급히 물을 틀었다. 꼴이 이게 뭐야- 빠르게 세수를 마친 용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선배. 아침 다 됐어요."
문 너머로 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용선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볍게 두드리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선배. 원래 그렇게 아무데서나 잘 자요?"
"어?"
"그러면 좀 곤란한데."
용선이 상 앞에 앉자 별이가 수저를 용선의 앞에 놓아주었다.
"머리에 베개만 닿으면 잠들던데요."
어제의 일이 생생하게도 떠오른 용선은 얼굴을 붉혔다. 별이에게 들었던 설렜던 고백과 함께 보낸 밤. 용선은 말없이 숟가락을 들어 된장찌개를 떠먹었다.
"귀여워."
부끄러워하는 용선을 보며 별이가 턱을 괴었다. 눈에 꿀이 떨어진다는 게 이런 거라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용선을 보는 별이의 눈은 참 반짝였다.
"... 말이 짧다."
"왜요~"
턱을 괴고 있던 별이가 손을 내리고 두 팔을 상 위로 올렸다. 그리고 몸을 조금 숙여 용선에게 다가갔다.
"내가 반말하면 혼낼 거예요?"
"당연하지."
"그럼 그냥 혼나고 반말할래. 어때, 용선아?"
용선의 동공이 순식간에 확장됐다. 놀란 용선은 손에 쥐고 있던 숟가락으로 별이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둔탁한 마찰음이 들리고 별이가 맞은 이마를 움켜잡았다.
"아!"
"까마득한 선배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선배 아니고! 애인이잖아요!"
"너랑 나랑 몇 살 차인지는 알아?"
"우리 엄마가 위 아래로 다섯살까지는 다 친구랬어요."
"우리 여섯살 차이거든?"
"...... 그러니까..."
왜 그럴까... 당황한 별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들었다. 용선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별이는 용선의 눈치를 보며 놓인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연애 한번 하기 힘드네."
별이가 입을 삐죽 내밀고 중얼거렸다. 그런 별이를 힐끔 본 용선은 코를 슬슬 긁더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조금씩 떨어트렸다.
"너... 연애 잘 했잖아..."
"네?"
"아니, 너... 그...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사귄 애 있다며."
별이의 젓가락에 들려있던 계란말이가 툭하고 떨어졌다. 별이는 자길 쳐다보지도 못하고 얼굴을 붉히는 용선을 보며 씰룩이는 입꼬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
"아니 그건 과거잖아요."
"첫사랑 아니야?"
"어... 맞아요."
"아 그래. 첫사랑이었구나. 첫사랑은 가슴에 묻는다던데."
용선의 볼이 오늘따라 더 부풀어올랐다. 국어책을 읽듯 내뱉는 용선의 말에 별이가 들고있던 젓가락을 내렸다.
"묻었죠. 아주 오래 전에."
"아 그래 묻으셨어? 그래서 언제든 보고 싶을 때 파보려고?"
"선배는 무덤도 막 파고 그래요?"
"아. 무덤이었어?"
젓가락으로 밥알만 괴롭히는 용선을 보며 별이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선배 지금 질투하는 거죠?"
"아닌데."
"맞는 거 같은데."
"아니라고오."
턱을 들이밀며 용선이 말을 끌었다. 별이는 한손으로 얼굴을 쓸며 계속해서 번지는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비석엔 뭐라고 썼는데?"
"아 진짜. 선배!"
얼굴 가득 웃음을 담은 채로 별이가 소리를 높였다.
*
"작가님. 대학 특강 제의 들어왔는데 잡을까요?"
"당분간 아무 것도 안 할거야."
커피를 든 휘인이 주방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지영은 계속 폰을 확인하며 그런 휘인의 뒤를 따랐다.
"인터뷰도 들어왔는..."
"안 한댔지."
우뚝 걸음을 멈춰선 휘인이 고개를 돌려 지영을 바라보았다. 흔히 볼 수 없는 차가운 눈. 지영은 알 수 없는 냉함에 마른 침을 삼켰다. 차갑게 지영을 노려보던 휘인이 다시 쌩하니 고개를 돌렸다.
"너도 당분간 오지마. 나한테 연락도 하지말고."
"네?"
"두 번 말하게 하지마."
휘인이 다시 멈췄던 걸음을 뗐다. 휘인이 뿜어내는 차가운 공기에 지영은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
"작가님..."
"혼자 있고 싶으니까 제발 가."
커피를 든 휘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처음 보는 휘인의 모습에 지영은 당황한 눈으로 이리저리 방황하다 거실 소파에 올려 놓은 가방을 챙겼다.
"쉬세요..."
지영이 나간 이 공간엔 적막만이 감돌았다. 휘인은 방 안으로 들어가 책상에 커피를 내려놓고 앉았다. 아, 안 돼- 휘인이 급히 고개를 치켜들곤 눈을 감았다. 안 돼, 제발- 이를 악물던 휘인은 주먹까지 꽉 쥐어가며 온 몸에 힘을 주었다.
"하."
위로 올라가있던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자 휘인의 발 옆으로 눈물 한 방울이 번졌다.
*
출근한 용선은 오늘따라 혼란스러운 드라마국의 분위기에 이상함을 느꼈다. 큰 소리가 오가고, 사람들이 급히 뛰어 다니고. 이건 무슨 일이 터져도 터졌다는건데. 자리로 온 용선이 근처에 있던 수영에게 넌지시 물었다.
"무슨 일이야?"
"<무지개다리>요. 김희영 선생님이 잠수 타셨대요."
"뭐? 선생님이?"
일이 터진 건 기훈이 맡은 드라마였다. 그리고 일의 원인이 된 사람은 다름 아닌 연륜이 꽉찬 원로배우였다. 용선은 이 혼란함의 원인이 자신들보다 수많은 작품을 하며 살아온 대선배라는 사실에 의아함을 느꼈다. 용선도 함께 일을 해본 적이 있던 터라 더욱 그랬다. 그 배우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며 연기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용선은 한껏 심각해진 얼굴로 털썩 앉았다.
"야! 이시우, 한혜진 촬영 당겨. 당장 오라고 해. 그리고 무조건 선생님 찾아! 집을 가든 회사를 가든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
성난 발걸음으로 드라마국에 들어온 기훈이 큰 소리로 소리쳤다. 기훈의 팀은 바쁘게 움직였고 기훈도 다음 촬영을 위해 바로 자리를 떴다. 큰 천둥번개가 치고 갔지만 여전히 드라마국은 폭풍 속이었다. 팀 하나의 분위기가 온 드라마국을 점령하고 있었다. 화장실을 다녀오던 별이는 씩씩거리며 나가는 기훈을 피하고 드라마국 안의 눈치를 보며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어벙한 얼굴로 앉아있는 별이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어려워 하고 있었다.
"들어보니까... 저 팀 계속 삐걱거리고 있었대요. 한 달 전부터 완전 생방송처럼 굴러가서 스탭들이고 배우들이고 죽어가고. 어제 방송도 방송시간 5분 전에 들고 왔다는 거 있죠."
수영이 용선 쪽으로 의자를 끌어 속닥거렸다. 별이도 이야기를 듣기 위해 수영 쪽으로 의자를 끌었다.
"다들 겨우 참아가면서 버티고 있었는데 어제 제대로 일 하나 터졌나봐요."
"뭔데?"
용선의 얼굴은 꼭 자기 일인 것 마냥 심각했다. 수영은 좀 더 용선 쪽으로 의자를 끌었다.
"이동 중에 주연 배우 접촉 사고요. 지금 저기 여주 신인인거 아시죠?"
"강희연?"
"네. 그래서 어제 기훈 선배가 몸 상태 입원할 정도 아니면 그냥 하자고 했나봐요. 근데 신인이 무슨 힘이 있겠어요. 안 그래도 촬영 급해죽겠는데 병원 갈 시간도 없는거죠."
수영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별이의 입은 다물어질줄 몰랐다. 너무나도 심각하게 드라마가 촬영되고 있었다. 별이는 저런 환경을 아직 자기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 뿐인지, 아니면 저기만 특이 케이스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병원 안 보내고 촬영 했다는 거야?"
"네. 근데 그거 때문에 김희영 선생님이 엄청 화내셨다고 그랬거든요. 저도 듣기만 한 거라 현장에서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저도 선생님 뵌 적 있는데 되게 인자하셨거든요. 화도 잘 안 내시는 편이었는데 엄청 화내셨다는 거 보면..."
용선이 관자놀이 부근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상하게 머리가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
"나 저기에 좀 세워줘."
스케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혜진의 건조한 목소리에 매니저가 백미러 너머로 쳐다보았다.
"갑자기?"
"갑자기 아니야."
차창 너머로 도로변의 건물들이 지나갔다. 어둠이 내린 밤에도 모든 건물들은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혜진은 손가락으로 창을 만졌다. 차가운 창의 기운이 뜨거웠던 손가락을 금세 차갑게 만들었다.
"기다렸다 태워줘?"
"아니. 집은 내가 알아서 갈게. 걱정마."
"알았어."
차는 혜진이 말한 위치에 부드럽게 멈춰섰다. 혜진은 옆좌석에 놓여있던 선글라스를 챙기고 문을 열었다. 만졌던 창보다 더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자 혜진이 옷을 여몄다. 오가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 골목으로 혜진은 천천히 걸어 들어 갔다.
*
퇴근시간이 되었지만 아무도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매일 같이 칼퇴를 하던 수영마저도 눈치를 보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씨X!"
자리를 지키고 있던 기훈의 팀 조연출이 내뱉는 욕짓거리에 모든 드라마국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조연출은 급히 전화를 들고 초조한 마음으로 상대가 받기를 기다렸다.
"선배. 기사 떴어요."
조연출의 한 마디에 드라마국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한 대 맞은 사람들처럼 변했다. 곧 조용했던 드라마국 안에 키보드와 마우스 소리가 가득찼다. 별이도 서둘러 포털 사이트로 들어갔다. 기사를 찾을 필요도 없이 이미 검색순위가 현 사태를 버젓이 알려주고 있었다.
"하..."
용선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별이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용선을 보다 폰을 집어 들었다.
[잠깐 바람 쐬고 올래요?]
별이가 보낸 메시지에 용선이 숙인 고개를 들었다. 둘의 눈이 마주치고, 용선이 천천히 눈을 한번 꾹 감았다 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용선을 따라 별이가 걸었다. 드라마국을 나와 걷는 용선의 발걸음이 착잡해 보였다.
"씨X! 얘는 왜 또 전화를 안 받아!"
엘리베이터 옆을 걷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거친 욕을 뱉는 기훈이 나왔다. 폰을 부수기라도 할 듯 노려보고 있던 기훈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 용선과 눈이 마주쳤다.
"쌤통이지?"
기훈이 비릿하게 웃으며 물었다. 왜 또 시비야- 옆에 선 별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기훈을 보았다. 용선은 언제나 그렇듯 변함없는 표정이었다.
"넌 좋겠다. 니 드라마 시청률도 최고라며. 하... 넌 진짜 운이 좋아. 아니 실력인가."
기훈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마음껏 비웃어. 비웃을 수 있을 때 비웃어야지. 니가 내 꼴 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잖아."
여전히 용선은 변함이 없었다.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용선을 보던 기훈은 얼굴 근육을 꿈틀거리더니 용선을 지나쳐 드라마국 안으로 들어갔다.
"하, 진짜. 저 인간은...!"
띵- 다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기훈의 뒷모습을 쫓으며 말하던 별이는 국장의 등장에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어, 용선아. 어디가니?"
"아니요."
"그럼 어서 들어와. 전달할 말 있으니까."
국장은 굉장히 급해보였다. 움직이는 발걸음도 표정도 그랬다. 잠깐 밖을 나가려했던 둘은 어쩔 수 없이 다시 드라마국 안으로 들어갔다. 국장의 등장에 모든 드라마국 피디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주목하기 시작했다.
"국장님...!"
"어, 박감독. 선생님한텐 내가 연락 드렸어."
"하... 다행이다."
"......"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기훈을 보는 국장의 얼굴은 편치 않았다. 기훈에게서 고개를 돌린 국장이 모든 피디들에게 말했다.
"<무지개다리>에 지원이 필요하다. 연출 둘. 지금 작품 안 하고 있는 피디들 중에 해줬으면 좋겠어. 지금 상황 많이 급한 거 알지?"
"와, 국장님. 감사합니다!"
국장의 갑작스런 공지에 드라마국 안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국장의 뒤에 있던 기훈은 두 손을 모으며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다시 기훈을 바라보는 국장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넌 메인 내려와. 지금부터 최시형이가 맡을거야."
"네? 무슨..."
"용선아. 너 끝난지 얼마 안 된 거 아는데, 좀 도와줄래?"
딱딱한 얼굴로 기훈을 보던 국장이 미안한 표정으로 용선을 바라보았다. 입을 다문 용선의 눈이 국장에게서 기훈으로 갔다.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온갖 그 분노를 담아 용선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기훈에겐 화풀이 할 상대가 필요했으니까. 기훈을 바라보던 용선의 눈이 다시 국장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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