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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26

[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26화

 

 

 

익숙하게 차를 주차하고 방송국 안으로 들어가는 용선의 발걸음이 꽤나 비장했다. 경비 아저씨를 비롯한 동료들과 인사를 주고 받으며 어느새 도착한 드라마국. 방금 출근한 용선에게로 몇몇의 시선이 쏠렸다. 그 시선 중에는 별이도 있었다. 용선이 자리에 앉자마자 수영이 냉큼 일어나 용선의 옆으로 갔고, 이에 뒤질새랴 별이도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선배. 실검 봤어요? 우리 드라마, 아직도 실검 안 내려갔어요!"

 

 

한껏 들뜬 목소리로 수영이 말했다. 신이 난 얼굴을 하고 있는 수영과는 다르게 용선은 큰 감정의 동요 없이 차분해 보였다.

 

 

"댓글도 다 좋아요. 완전 다 호평!"

 

 

수영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도착해 자리에 앉아 겉옷을 벗고 정리를 하던 용선이 드디어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아직 들뜨긴 이르지. 이제 막 첫 화 나갔는데."

 

 

어제 저녁 10시. 드디어 드라마 <데칼코마니>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드라마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떨리는 마음으로 방송되는 드라마의 첫 회를 지켜봤다. 많은 드라마를 연출해본 용선도, 이제 막 드라마를 만들어가고 있는 별이도 드라마의 첫 방송은 떨리고 설레는 일이었다. 막상 방송되는 드라마를 보면서 용선은 '아 저기서 왜 저렇게 연출했지', '연기가 좀 어색한데 다르게 시켜볼걸' 하며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누구나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도 아쉬움은 남는 법이었으니까.

 

 

"그래도 시작이 반이래잖아요. 우리 이미 반 이상은 먹은 거예요."

 

 

별이가 옆에서 수영처럼 들뜬 얼굴로 말했다. 이미 반 이상은 신난 후배들과 달리 용선은 여전히 차분한 얼굴로 두 후배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저 둘처럼 신이 난 마음은 아니지만 다행이란 마음은 갖고 있는 용선이었다. 무엇보다 첫 방송 일주일 전에 터졌던 혜진의 열애설 때문에 시청자들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쏠릴까 보이지 않게 걱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다행히도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의 반응은 대부분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였다. 시청자들에게 배우 안혜진이 아닌 캐릭터 차지연이 더 부각된 것이었다. 그만큼 혜진의 연기가 드라마 속에 푹 녹아 들어 안혜진이란 존재를 잊히게 한 덕분이었다.

 

 

"선배! 시청률 떴대요!"

 

 

정신없이 울리던 메신저 알람을 보고 있던 수영이 기대에 찬 얼굴로 용선을 보았다. 지금까진 보이지 않는 성적표에 대해 떠들었다면, 이젠 눈으로 보이는 성적표를 받을 시간이었다.

 

 

"헐 대박. 전작 보다도 높게 나왔어요!"

 

 

시청률을 확인한 수영이 커진 눈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별이도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뜬 시청률은 <데칼코마니> 이전에 방송되던 미니시리즈의 마지막화 보다도 높은 시청률이었다. 물론 전작이 그닥 좋은 성적을 내던 드라마가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단편 드라마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성적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좋은 결과에 용선은 안도와 행복을 동시에 느꼈다.

 

 

"어? 근데 <무지개다리> 요즘에 계속 시청률 떨어지네요? 뭐 아직까진 시청률 1위긴 한데..."

 

 

쭉 줄지어 나온 시청률을 보던 수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수영이 말한 드라마는 현재 기훈이 연출하고 있는 드라마였다. 시작부터 줄곧 높은 시청률을 보이던 일일드라마였는데 요새는 이상하게 시청률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의문을 갖던 수영은 말없이 입을 다물고 있는 용선을 보곤 아차하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안녕하세요."

 

 

끝없이 시청률에 대한 감탄을 하고 있던 수영과 별이의 뒤편에서 들려오는 깍듯한 인사소리에 수영과 별이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인사소리를 받으며 이쪽으로 오고 있는 정체를 확인하곤 둘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 주인공에게 깍듯히 인사를 건넸다.

 

 

"국장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드라마국장의 등장에 용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글서글한 얼굴을 하고 있는 국장은 평안한 미소를 띠며 용선에게로 다가왔고 별이와 수영이 자연스럽게 길을 터주었다.

 

 

"안녕하세요, 국장님."

"어어, 그냥 가는 길에 들렀어."

 

 

별이와 수영은 까마득히 먼 국장의 등장에 쭈뼛거리며 서있었다.

 

 

"드라마 끝나고 좀 쉬었니?"

"네. 잘 쉬었습니다."

"신경을 좀 썼어야 했는데 워낙 바쁘다보니까 신경을 못 썼네."

"아닙니다."

 

 

용선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이번 드라마도 잘 했더라? 용선이 너, 진짜 재능 있어."

"아... 아니에요..."

 

 

국장의 갑작스런 칭찬에 민망해진 용선이 시선을 떨궜다.

 

 

"대학 막 졸업하고 볼살만 포동포동하던 막내가 언제 이렇게 커서."

 

 

10여년 전, 용선이 처음 방송국에 입사했을 때. 용선이 처음 조연출로 들어간 작품은 당시 방송국에서 잘 나가던 지금의 국장이 하는 드라마였다. 국장의 눈에는 아직도 막 대학을 졸업했던 사회초년생 용선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1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면서 용선은 하나의 드라마를 책임지는 메인 감독이 되었고 그때의 선배는 국장이 되었다. 어느새 훌쩍 자란 후배를 보는 국장의 눈에선 다정함이 흘렀다.

 

 

"연출도 갈수록 좋아지고. 이번에 시청률도 역대급인거 알아?"

"다들 잘해준 덕분이죠."

"포상 휴가라도 줄까?"

"주면... 당연히 받을게요."

"하하. 근데 포상 휴가까진 무리고... 다음 작품 성공시키면 그때 진짜 보내준다."

"그 말... <별이 빛나는 밤>때도 하셨던거 아세요?"

"크흠..."

 

 

국장은 헛기침을 내며 용선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다음엔 진짜로 보내줄께!"

 

 

국장이 괜히 큰 소리를 내며 말하자 용선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수고했어. 촬영하고 편집하느라 몸도 많이 상했을텐데. 다음 작품 때까지는 여유롭게 좀 쉬고. 급한 거 없으니까."

"네, 감사해요."

"다음에 밥이나 같이 먹자."

"네."

"그럼 수고해. 막내들도 수고하고."

"네. 들어가세요."

 

 

갑자기 찾아온 손님이 떠나자 용선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수영과 별이도 긴장했던 몸을 풀고 용선에게 다시 다가왔다.

 

 

"국장님... 선배 칭찬하러 온 거 맞죠?"

"보면 몰라?"

"이야. 역시 선배. 존경합니다."

 

 

수영의 쌍 엄지를 보며 용선은 별이를 슬쩍 쳐다보았다. 방송국에 입사할 때나 보고 직접 마주쳐본 적이 없는 국장이란 존재를 마주했다는 놀람과 자신이 좋아하는 용선의 위대함에 대한 감탄이 담긴 얼굴.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서있는 별이를 보며 용선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뱉으며 얼굴을 살짝 숙였다.

 

 

 

 

*

 

 

 

불그스름한 노을빛이 들어오는 오후. 혜진은 침대에서 내려와 주방으로 향했다. 방 문을 열자 정신없이 어질러진 거실이 보였다. 용선이 왔을 때 보였던 깔끔하던 집 안은 온데 간데 없고 난잡하게 어질러진 집. 온갖 색깔의 수건과 목욕 가운이 거실 소파에 너저분하게 걸쳐있고 컵라면 용기, 봉지라면의 봉지, 나무젓가락, 빵 봉지, 온갖 설거지거리가 주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밟히는 옷가지들을 무시한채 주방에 다다른 혜진은 차가운 물을 한잔 따라 마셨다.

 

♪♬♩♪

 

방 안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혜진은 마시던 컵을 아무데나 올려두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여보세요."

 

 

매니저였다. 혜진은 전화를 받으며 다시 방을 나와 소파로 걸었다.

 

 

-화보 촬영 더 늦어지면 안 된대. 그래서 내일로 잡았는데 괜찮지?

"그래. 어쩔 수 없지."

-최대한 미룰 수 있는 스케줄은 다 미뤄놨는데. 언제까지 미루려고?

 

 

소파에 앉은 혜진의 눈에 텅빈 현관이 들어왔다. 일주일 전, 저 곳에서 휘인과 처음으로 깊은 대화를 했다. 휘인이 화를 내는 모습도, 소리를 지르는 모습도 처음 보던 날. 그리고 방문 너머로 들리던 아주 작은 흐느낌까지. 아직도 생생하게 보이고 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러게. 언제까지 미룰까......"

-뭐 아직 급한 건 없으니까. 그래도 너무 오래 미루진 마.

"응. 그래. 오래는 안 미룰께."

 

 

전화가 종료되고 혜진이 들고 있던 폰이 소파 위로 내려왔다. 혜진은 두 눈을 꼭 감았다.

 

 

 

 

*

 

 

 

퇴근시간이 가까워지자 수영은 분주하게 움직였고 별이는 파티션 너머에 있는 용선을 흘긋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김수영."

"네? 네?!"

 

 

촬영에 들어가지 않은 이 꿀같은 기간에만 할 수 있는 칼퇴를 놓치고 싶지 않은 수영은 벌써 짐을 다 챙겨놓은 상태였다. 할 일도 없고 눈에 들어오는 일도 없어 시계만 보고 있던 수영이 용선의 부름에 놀라 당황한 얼굴로 용선을 보았다.

 

 

"퇴근해."

"헐. 정말요? 아직 퇴근 시간 아닌데?"

"가기 싫음 말든가."

"아니요! 사랑합니다, 선배. 제가 진짜 사랑해요."

"너한테 사랑 고백은 듣고 싶지 않은데..."

"히히. 가볼께요! 별아, 나 먼저 간다!"

 

 

용선이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퇴근하라는 용선의 말이 떨어진지 1분도 되지 않아 수영은 금세 짐을 챙기고 빠르게 드라마국을 빠져나갔다. 별이는 바람처럼 사라진 수영의 자리를 바라보며 눈을 꿈뻑였다.

 

 

"문별이. 너도 가."

 

 

별이가 고개를 휙 돌렸다. 고개를 숙인 용선의 정수리가 보였고 별이는 대답없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별이가 아무 반응을 하지 않자 용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안 가?"

"선배는요?"

"나도 좀있으면 갈거야."

"저도 그럼."

 

 

별이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책상을 보았다. 용선은 눈썹을 으쓱하더니 다시 자신이 보던 기획안으로 눈을 돌렸다.

 

용선은 퇴근 시간이 살짝 지나서야 짐을 챙겼다. 자리에서 일어난 용선은 의자에 걸려있던 겉옷을 챙겨 입었다.

 

 

"나 간다."

 

 

수영처럼 퇴근 몇 분 전부터 분주하게 움직이지도 않고, 평상시처럼 평범하게 앉아있다 일어나서 간다고 말하는 용선을 보며 별이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별이는 서둘러 보고 있던 노트북을 정리하고 어질러진 책상을 치웠다. 별이가 바쁘거나 말거나 용선은 바로 드라마국을 나가버렸고 더욱 급해진 별이는 울상이 된 얼굴로 확 노트북을 닫아버렸다.

 

밖으로 나온 용선은 차키를 꺼내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키를 꽂고 시동을 걸고. 출발을 하려는 순간.

 

탕-!

 

용선의 차 앞으로 숨을 거칠게 몰아 쉬는 별이가 보닛을 내려치며 그 앞에 섰다. 용선은 놀란 눈으로 창 너머의 별이를 보았다. 별이는 숨을 몇 번 고르더니 조수적 쪽으로 와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너 미쳤어?"

 

 

창문이 열리고, 용선이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저 타도 돼요?"

 

 

여전히 숨을 거칠게 내쉬며 별이가 씩 웃었다. 황당하단 얼굴로 앉아 있던 용선이 고갯짓으로 OK 신호를 보내자 별이가 재빠르게 조수석으로 올라탔다.

 

 

"너 내가 출발이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아니 사람 안에 있는데 그렇게 갑자기 치면 어떡해. 놀라잖아."

"놀랐어요?"

"놀라지 그럼 안 놀라?"

"미안해요. 선배 가버릴까봐. 헤헤."

 

 

용선이 나가자 급히 정리를 마무리하던 별이도 따라서 나왔지만 이미 용선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후였다. 별이는 아래에서 올라오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못하고 비상구로 두 계단씩, 세 계단씩 뛰어 내려왔다. 혹시라도 용선이 가버리면 어쩌나 불안한 마음으로 눈썹이 휘날리게 달렸다. 저 멀리 차에 타는 용선을 발견하곤 정말 미친듯이 달려서 여기까지 쾅-.

 

 

"안전벨트나 매."

"네에."

 

 

차가 출발하고 별이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별이를 슬쩍 보던 용선은 스틱 앞에 있던 물병을 꺼내 별이에게 건넸다. 물을 받아든 별이는 꿀꺽꿀꺽 남아 있던 물을 다 마셔버리더니 후- 하고 안정된 숨을 내쉬었다.

 

 

"선배 뭐 이렇게 빨라요."

"니가 느린거지."

"무뚝뚝한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건지."

"뭐가?"

"같이 좀 가지."

 

 

틱틱거리는 별이의 말투에 용선은 작게 올라오는 민망함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우리 오늘 같이 볼래요?"

"뭘?"

"데칼코마니요."

 

 

역시 퇴근시간은 너무 막혀- 용선이 답답하게 움직이는 차들 사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금세 또 마주한 빨간불에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든지."

"어디가 좋아요?"

"뭐가?"

 

 

신호를 기다리며 용선이 별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배 집? 아니면 우리집?"

 

 

용선이 빠르게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주시했다. 별이는 그런 용선의 모습 하나하나가 다 귀여워 입술을 물며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우리집에서 라며어언...!! 윽!!"

 

 

급출발. 용선이 엑셀을 확 밟아버렸다. 그 덕에 관성의 법칙으로 밀려 의자 쿠션으로 머리를 박은 별이가 머리를 살살 비볐다.

 

 

"선배 안전운전!"

"아, 미안."

 

 

저거 저거 분명 일부러 한거야- 별이가 성의 없이 사과의 말을 건네는 용선을 보고 눈을 부라렸다.

 

 

"집 갈 때까지 말 안 걸테니까 운전 꼭 안전하게 해요."

 

 

삐졌나...? 용선이 곁눈질로 별이를 보았다. 별이는 고개를 창가로 돌리고 턱을 괴고 있었다.

 

별이는 정말 그 후로 말을 걸지 않았다. 용선은 그런 별이가 신경쓰여 가끔씩 별이를 몰래 쳐다보았는데 그때마다 별이의 시선은 창밖으로 가있었다. 꽉꽉 막혀있던 도로가 풀리고 이제 차가 좀 속력을 내기 시작하자 용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

"아니요."

"나 졸린데."

"운전 바꿔줄까요?"

 

 

별이의 고개가 졸리단 말 한 마디로 용선에게 돌아왔다. 걱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별이는 정말 당장이라도 자리를 바꿔줄 눈치였다.

 

 

"됐어. 그냥 안 졸리게 재밌는 얘기나 해봐."

"크큼. 좋아요. 시작할게요. 옛날옛날에 어떤 아이가 있었는데 생긴 것도 엄청 예쁘고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좋았대요."

 

 

별이가 시작하는 이야기에 괜히 용선의 입에서 웃음이 삐져나왔다.

 

 

"그래서?"

"그 아이가 중학생이 됐는데 그때도 걔는 완전 인기가 많았대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아이가 좋아하던 애가 있었는데 양아치 무리가 그 애를 괴롭히는 걸 발견한거에요. 근데 그 아이가 완전 정의롭거든요? 여기서 이제 액션 느와르! 그 아이는 그 자리에서 바로 덤벼들었어요."

 

 

별이가 슬쩍 용선을 보았다. 용선은 흥미롭게 별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와 근데 어쩜 싸움도 잘하는지! 17대 1로 싸워서 이긴 거 있죠?"

 

 

픽- 용선이 바람빠지는 웃음 소리를 냈다.

 

 

"근데 문제는 그 때 이후로 그 아이가 약간 타락의 길을 걸었다는 거예요. 음... 얼떨결에 양아치 친구를 사귀어버린거죠. 이때부터 익숙한 청소년 드라마가 펼쳐져요."

"못 된 아이였구나?"

"부끄럽지만 그렇죠. 그 아이는 고등학교에 가서 힘들어하시는 부모님을 보고 자기 잘못을 깨달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아이가 좋아했던 애가 다시 다가오면서 정신을 차리게 되죠."

 

 

속력을 내며 달리던 자동차는 어느새 별이의 동네에 다다랐다. 이제는 익숙한 지리에 용선은 내비게이션의 안내 없이도 별이의 집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이번엔 좋아하는 그 애랑 대학생 때까지 청춘 드라마를 찍어요. 꽤 오래 아름답게요. 뭐 결국 그 끝은 새드엔딩이었지만."

 

 

골목 안으로 들어온 차. 이제 용선과 별이의 눈에 별이의 자취방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다 주차하면 되겠다- 건물 근처로 온 별이가 하던 말을 멈추고 빈 공간을 가리켰다. 용선은 능숙하게 차를 돌려 빠르게 후방주차를 시작했고 별이는 그런 용선의 모습을 보며 오늘도 어김없이 반하는 중이었다. 주차가 끝나자 별이가 먼저 차 문을 열었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용선도 곧 시동을 끄고 따라 내렸다. 앞장선 별이의 뒤를 따라 용선이 총총 걸음으로 걸었다. 1층 현관문을 통과하고 엘리베이터 앞에 선 별이가 버튼을 눌렀다.

 

 

"저 되게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죠?"

"그러게. 완전 주인공이었네."

 

 

꼭대기 층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한 층씩 내려오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별이의 손이 조금씩 땀에 젖고 있었다.

 

 

"선배는 여러 드라마 찍어봤잖아요."

 

 

별이가 시선을 돌려 용선을 보았다. 쿵-쿵- 너무 소리가 크다. 별이는 머리까지 울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에 아득해질 지경이였다.

 

 

"어떤 드라마가 제일 좋았어요?"

"음.... 아무래도 별이 빛나는 밤?"

"장르는요?"

"장르?"

"로맨스 드라마를 연출하는 입장에서, 로맨스 드라마는 어때요?"

"누구나 갖고 있는 이야기라 쉬울 것 같지만 쉽지 않은 장르지. 그리고 가끔은 판타지 같달까."

 

 

3, 2, 1. 엘리베이터가 내려왔다.

 

 

"그거, 저랑 할래요?"

 

 

띵-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서서히 문이 열리자 엘리베이터 빛이 새어나와 별이를 비췄다. 놀라 굳은 용선의 얼굴이 별이의 눈에 들어왔다. 별이는 침이 마르는, 아니,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도망가지 말고. 여기서. 나랑."

 

 

용선의 눈을 마주하던 별이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굳어 있는 용선은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서있었다. 별이는 다시 한 번 깊고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좋아해요."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용선의 시선이 별이에게 닿았다. 엘리베이터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있는 두 사람은 서로의 눈만 바라본 채 그렇게 서있었다. 별이는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꾹 눌렀다. 엘리베이터의 빛만 새어나오는 어두운 건물 안. 버튼을 누르고 있는 별이의 손가락이 작게 떨렸다.

 

그렇게 오래도록 닫히지 않았던 문은, 용선의 발이 온전히 떼어지자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용선의 발은 별이를 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신발 코가 맞닿으며 오래도록 닫히지 않았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완전히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