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썬] 인연
* 11화
20살 대학생의 첫 날. 시간은 빠르게 지났다. 나는 3월이 오기까지 별이와 평범하기만 한 날들을 보냈다. '평범하다'고 표현을 했지만 순탄치 않았던 삶을 살았던 내게는 처음 갖는 시간들이었다. 평범하게 밥을 먹고, 평범하게 잠을 자고, 평범하게 놀러 다녔다. 그 어떤 두려움도 걱정도 없이 말이다. 그 평범함이 너무 좋아져버린 탓인지 대학 입학식도 오리엔테이션도 다 빠져버렸지만. 뭐, 아싸의 인생은 이미 예전부터 걷고 있었으니까 상관 없지.
"나도 가면 안 돼...?"
"안 돼."
"왜애~ 나 몸 숨기고 니 옆에만 붙어 있을게."
"안 돼. 집에 얌전히 있어."
몇 개월을 24시간 붙어 살다 떨어지게 되니 별이는 많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나도 정이 많이 들어 별이가 없는 대학 생활은 어떨지 조금 걱정되기도 하고. 그치만 이러다간 진짜 세상과 등지고 문별이랑만 살게 될 것 같단 말이야.
"나 오늘 수업 3시면 끝나. 끝나고 바로 올테니까 혼자 놀고 있어."
"쳇... 알았어..."
저렇게 풀이 팍 죽어버리면 신경 쓰이는데... 별이는 울상이 된 얼굴로 무거운 손을 흔들었다.
*
태양관... 태양관... 아 저긴가? 첫 수업이 이뤄지는 건물을 찾아 학교 앞에 놓인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혹시 몰라 지도 사진도 하나 남기고 재빨리 발을 옮겼다.
3월의 캠퍼스는 활기가 가득 찼다. 예쁘게 꾸민 사람들과 활짝 핀 얼굴들. 무리를 지어다니며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 테라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벌써부터 도서관으로 향하는 사람들. 고등학교와는 전혀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 속에 나도 잘 물들 수 있길, 그런 기대를 작게 품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지나쳤다.
태양관 619호. 늦지 않게 강의실로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강의실은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난 뒷 자리가 좋은데 벌써 괜찮아 보이는 자리들은 다 나간 것 같았다. 하나만 있어라, 하나만...! 있다! 창가 쪽 뒤에서 세 번째 자리를 발견한 나는 누가 뺏어가기라도 할까봐 빠르게 강의실을 가로 질렀다.
"어..."
아... 왜... 왜 그러는데...
자리 하나만 보고 돌진하던 나는 뒷문에서 다가온 나와 달리 앞문에서 이 자리를 노리고 온 아이와 책상을 앞에 두고 마주쳤다. 긴 갈색 머리에 작은 키. 대충 입은 것 같은데 되게 분위기 있어 보이는 옷차림. 귀염상 얼굴과는 달리 당황과 경계가 함께 담겨있는 눈. 나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이제 남은 자리는 앞자리 뿐이었다. 앞엔 가고 싶지 않은데...
"앉으세요."
아, 감사합니다! 착한 사람이었구나. 정말 고마워요- 나는 쏟아나오는 감사 인사를 숨기고 재빨리 안쪽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옆 자리로 다가오는 인기척에 숨을 멈췄다.
"......"
왜... 왜 다른데 안 가고 여기 앉는 거예요... 나 어색한 거 진짜 싫은데... 다른 자리로 갈 줄 알았던 여자는 많고 많은 자리 중 하필이면 내 옆 자리를 골라 앉았다.
"20학번 이세요?"
어색한 공기를 뚫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옆에서 가까이 들으니 꽤나 매력있는 음색. 나는 뻣뻣한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구나. 제가 오티를 안 가서 동기들 얼굴을 몰라요."
여자는 멋쩍게 한쪽 볼을 긁으며 말했다. 슬쩍 보니 보이는 뺨에 보조개가 패어 있었다.
"저도 오티 안 갔어요."
"아. 정말요?"
나름 동지애가 생긴 건가. 내 말에 여자가 처음보단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이 되었다. 물론 나도.
"어... 그럼 20살이에요?"
"네. 그...쪽..."
이름을 모르니 뭐라 칭할 수 없는 난감한 호칭에 여자가 당황해 말을 얼버무렸다.
"저도 20살. 김용선이에요."
"저는 정휘인."
휘인이라. 꽤 괜찮아 보이는데... 첫 친구가 될 수 있으려나...
"혹시 이거 끝나고 또 수업있어요?"
휘인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내 고갯짓에 휘인은 씩 웃으며 한껏 들어간 보조개를 보여주었다.
"그럼 나랑 같이 점심 먹을래요? 나 친구가 없어서..."
나도 없어 친구... 다행이다. 다행이도 나 첫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것 같아, 별아.
*
"용선아!!!!"
현관문을 열자마자 집이 떠나가라 울리는 별이의 목소리에 눈을 찌푸렸다. 누가 보면 대형견 한 마리 키우는 줄 알겠네. 작게 터지는 웃음을 뒤로 하고 집 안으로 발을 들이자 내 옆에 찰싹 붙은 별이가 이것 저것 질문하기 시작했다.
"오늘 어땠어? 점심은 먹었어? 친구는 사귀었어? 학교는 어때? 수업은 재밌어?"
"어휴... 하나씩 물어봐."
대충 가방을 방에 던져두고 소파에 털썩 주저 앉으니 별이도 그 옆에 앉아 양반다리를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괜찮았어."
"좀 더 자세히! 자세히 말해봐."
"자세히 말할 게 뭐가 있어... 아, 잠깐만."
별이와 말을 하고 있는 도중 울리는 진동에 폰을 꺼내들자 저장되지 얼마 되지 않은 새로운 이름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누구야?"
"휘인이."
"휘인이?"
"응. 오늘 사귄 친구."
[잘 들어갔어? 오늘 수업만 아니면 너랑 좀 더 노는 건데ㅜㅜ 내일은 점심 먹고 카페에서 수다 떨다가 수업 같이 가자!]
아. 이 얼마만에 받아보는 친구의 메시지냐. 진짜 김용선 인생 참 재미없었구나. 한탄도 잠시 신이 난 얼굴로 재빠르게 휘인이에게 답장을 보내자 바로 휘인이에게서 또 답장이 왔다.
[나 학교 맛집 좀 찾아봤는데 뭐 좋아하는 거 있어?]
싱글벙글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는 게 이렇게 좋을 일이었나. 계속해서 휘인이와 메시지를 주고 받다 옆에 앉아있던 별이가 일어나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별이는 아침보다도 더 우울해진 얼굴로 눈꼬리와 입꼬리 모두 축 늘어져있었다.
"어디가?"
"방에..."
"방에?"
아. 내가 너무 무심했나... 그제야 학교에 가있는 동안 혼자 나를 기다렸을 별이 생각에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별아. 넌 점심 먹었어?"
"아니..."
"왜 안 먹었어? 어제 장봐서 먹을 거 많잖아."
"난 굶어도 안 죽어... 이미 죽은 몸이거든..."
쟤 왜 저래... 축축 늘어진 몸과 더불어 축축 늘어진 말을 내뱉으며 별이가 흐물거리듯 걸음을 뗐다.
"방에 가서 뭐할거야?"
"잠이나 자지 뭐... 난 이미 죽은 몸이라 안 자도 상관은 없는데 그냥 잠이나 잘래..."
문별이 저거... 삐졌구나... 살짝 삐져나오는 미소를 삼키고 휘인이에게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폰을 다시 내려놓고 느긋느긋 걸어가고 있는 별이의 뒤로 다가가 와락 껴안았다.
"너 삐졌지?"
"내, 내가 삐져서 뭐, 뭐해... 이미 죽은 몸인데..."
"아 진짜! 왜 자꾸 죽은 몸이래! 너 그 말 또 하면 진짜 화낸다."
"......"
"내가 진짜 오랜만에 사귄 친구야. 그래서 너무 좋아. 너도 알잖아. 나 친구 없던거."
왜 별이를 달래주고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별이의 기분을 풀어줘야겠단 생각이었다. 별이를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별이의 몸을 돌려세웠다. 왜인지 살짝 빨개진 얼굴이었지만 여전히 뾰루퉁한 표정이 아직 서운한 감정이 남아있어 보였다.
"너 말고도 친구 하나쯤은 있어야지. 안 그래?"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별이가 바닥으로 떨어져있던 눈동자를 굴려 나를 바라보았다.
"좋은 사람이지?"
"응?"
별이의 갑작스런 질문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니 별이의 얼굴에서 서서히 서운한 감정이 걷어지고 있었다.
"휘인이란 친구 말이야. 좋은 사람이야?"
"응. 오늘 처음 봤지만 좋은 사람 같아."
"됐어 그럼."
이제 기분 다 풀린건가...? 가만히 눈을 깜빡이고 있는 나를 보며 별이가 드디어 씩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행히 다시 별이로 돌아온 것 같다. 나는 웃고 있는 별이에게 똑같이 웃음으로 화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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