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썬] 인연
*
“그게 아니라니까. 어깨에 힘을 빼고.”
대나무가 우거진 산 중턱. 목검을 들고 있는 아이의 옆으로 한 아이가 다가갔다. 어깨를 누르고 손목을 잡아주는 아이는 목검이 아닌 도검을 차고 있었다. 그 두 아이는 고목나무 아래서 처음 만났던 그 두 아이들이었다.
“이... 이렇게...?”
“아니. 너 바보야?”
“야!”
바보 소리를 들으니 화가 난 모양인지, 아이가 목검을 집어 던졌다. 목검은 모래를 튀기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야라니. 스승님이라고 하랬잖아.”
“스승은 무슨!”
“검술 안 배우고 싶어? 맨날 맞고 다닐 거야?”
“씨이...”
씩씩 열을 내던 아이는 여전히 콧김을 강하게 뿜지만 더 이상 대들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 목검을 다시 주워들었다.
“화 내지 마. 감정이 들어가면 보이던 것도 보이지 않고 잡히던 것도 잡히지 않는다고 했어.”
“비취 니가...!”
“스승님이라고 하랬지?”
“... 알았어... 스승님.”
비취. 도검을 찬 아이의 이름이었다. 비취는 다시 목검을 들고 자세를 취하는 아이의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삐뚠 손목을 잡아주고 낮은 팔을 들어주고. 여전히 화가 가득한 얼굴이지만 순순히 제 말과 행동을 따르는 아이를 보며 비취는 작은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잘하네!”
목검을 휘두르던 아이가 비취의 칭찬에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둘만의 검술 수업은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가르침의 소리, 투정의 소리, 검과 나무가 부딪히는 소리, 바닥에 발이 끌리는 소리. 둘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바람과 함께 대나무 숲을 채웠다. 불그스름한 노을빛이 대나무 사이로 들어올 때, 땀으로 범벅되어 지쳐버린 아이가 풀썩 바닥으로 드러누웠다.
“힘들어...”
“그러게 그만 하자니까.”
바닥에 드러누운 아이의 옆으로 비취가 다가와 섰다. 아이는 쭉쭉 뻗은 대나무와 함께 담기는 비취를 올려다보며 눈을 한번 꾹 감았다 떴다.
“좋단 말이야.”
“뭐가?”
비취가 고개를 숙여 아이의 눈을 마주보며 물었다.
“검술이.”
아이의 말에 비취가 픽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선선한 바람이 두 사람을 지났다.
“그리고... 너랑 있는 게 좋단 말이야.”
돌아갔던 고개를 다시 아이에게로 돌린 비취가 가만히 서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노을빛은 눈이 부시게도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비취가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내민 손을 덥석 잡았고, 힘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
“별아아아!!!!”
교문을 나서는 목소리가 오늘따라 굉장히 높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별이의 품으로 달려가 안겼다. 영문을 모르는 별이는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어정쩡한 모습으로 내게 안겨있었다.
“어... 어...”
두 팔을 애매하게 허공에 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별이가 볼을 붉혔다.
“별아! 나 합격했어!”
고개를 들어 별이를 보았다. 그리고 한껏 취해있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별이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 합격이라...”
“그래! 대학 합격했다고! 넌 안 좋아? 어?”
어째 반응이 미적지근하다. 기대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는 별이를 흘겨보니 빨갛게 익은 얼굴에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니까... 대학 합격이라는 건, 과거 급제와도 같은 거지? 지금 21세기 땅에서 그만큼 중요하고 아주 귀한 일.”
“그래. 이 조상님아. 과거 급제 했다 내가!”
대학 합격이라는 단어를 못 알아들은 거였나. 맞춤형으로 다시 말을 해주니 이제야 알아들었는지 별이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와! 용선이 너 정말 대단한 아이구나!”
“이제 알았어?”
“이런 경사스러운 날 그냥 보내면 안 되지. 가자! 오늘은 맛있는 것도 먹고 갖고 싶은 것도 다 사줄게!”
“콜!”
뭐든지 다 사준다는 말에 나는 평생 동안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던 고급 한우집으로 별이를 끌었다. 처음 식당에 들어가 메뉴판을 보는 순간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에 다시 일어날까 싶었지만 나를 붙잡으며 괜찮다고 말하는 별이를 보며 오늘만큼은 사치 한번 부려보자는 마음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너는 천년을 넘게 살았다면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거 같아.”
“내가? 이 문별이가?”
“21세기가 도래한 지가 언젠데 입시도 잘 모르고 스마트폰도 모르고.”
“허 참! 알기는 다 알아!”
열심히 구워진 고기를 내 앞 접시에 배달하며 별이가 눈썹을 찡그렸다.
“이거 봐. 나 오늘 입은 이 셔츠가 얼마나 유명한 건지 알아? 그 유명한 마마무의 문스타도 입고 저기 바다 건너 금발 언니들도 많이 입은 옷이라고. 이 코트는 또 어떻고!”
고기 배달을 끝낸 별이가 자기가 입고 있는 셔츠와 옷걸이에 걸린 코트를 가리키며 턱을 치들었다.
“누가 패션 얘기해? 왜 패션으로 빠지는 거야.”
“이 문별이가 뭘 모른다고 하니 하는 소리지!”
참 패션에만 민감하다니까. 입에 넣자마자 녹아드는 고기를 삼키며 여전히 자기의 옷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별이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근데...”
열심히 패션을 논하던 별이가 목을 가다듬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무슨 얘기를 꺼내려고 그러나 기다리며 잘 익은 불판 위의 고기를 쳐다보았다.
“별아 고기.”
“아. 응. 여기.”
내 앞 접시로 다시 배달된 고기를 기쁘게 한 점 먹고는 별이를 바라보았다.
“그... 대학 합격이라는 게 과거 급제와도 같으면... 대학이라는 데는 궁인 거야? 내가 알기론 학문을 닦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
“봐봐! 너 모르잖아 멍청아!”
“머, 멍, 멍청이라니?!”
잘 익은 고기처럼 빠르게 익어가는 별이의 얼굴을 보며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느냐! 내가 무려 무과에서 장원한 인재다! 어! 전쟁에 나가기만 하면 적들이 얼마나 벌벌 떨었는지! 척준경은 나에 비하면 완전 꼬맹이였지. 내가 너무도 유능해서 왕이고 황후고...!”
열띤 자기소개를 하던 별이가 급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할말이 떨어졌나... 별이는 식탁 위에 놓인 물 컵을 들어 벌컥 들이마셨다.
“왜 말을 하다 말아.”
“해서 뭐하나 싶어서다.”
“왜애. 나 잘 듣고 있었는데. 울 문별이 영웅담.”
“영웅담은 무슨. 고기나 먹어라.”
별이가 다시 내 앞으로 고기를 옮겨주었다. 내가 너무 놀렸나. 토라져 보이는 별이를 보며 나는 상추를 들어 쌈을 쌌다. 이것저것 넣을 수 있는 건 다 넣어서 빵빵하게.
“문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고기를 뒤적거리는 별이가 내 부름에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바로 별이의 입으로 큼지막한 쌈을 집어넣었다. 별이는 주먹만 한 쌈에 입이 막힌 채 커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우...! 어...!”
지금은 너 말 못해. 햄스터마냥 양 볼이 터질 듯 올라온 별이를 보며 나는 숨길 수 없는 웃음을 뱉다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우....으....?”
“우리나라 구해줘서. 그 옛날 전쟁에 나가 적들 물리치고 왕도 지키고 왕비도 지키고. 그러니까 지금 나도 이렇게 살아있는 거겠지?”
“......”
“그리고 지금은 나만 지켜야 되니까...”
나는 다시 큰 쌈을 하나 쌌다.
“그것도 고마워!!”
또 하나의 주먹만 한 쌈을 별이의 입으로 욱여넣었다. 별이는 두 손을 휘젓고 발을 동동 구르며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내 맘이지롱.
결국 억지로 들어간 두 개의 쌈 덕분에 별이가 열변을 토하며 자랑하던 셔츠에 고기가 떨어지고 말았다. 기름으로 얼룩진 셔츠를 본 별이는 세상 다 잃은 눈으로 나를 보며 입 안에 있는 쌈을 우걱우걱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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