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썬] 인연
*9화
열아홉의 마지막은 행복하게 저물고 있었다. 1년 동안의 힘듦을 덮어주기라도 하듯 하늘에선 함박눈이 내렸고, 눈 덕분에 얼음장 같던 추위는 조금 사그라들었다. 내 옆에는 항상 별이가 있었다. 밥을 먹을 때도, 이야기를 나눌 때도 항상 별이가 옆에 있었다. 원했던 대학 합격 통지서도 받았고, 지겨운 학교도 방학에 들어갔다.
올해를 단 이틀 남긴 밤. 소파에서 잠이든 별이의 옆에 앉아 연말 가요 무대를 보며 나는 내가 좋아하는 솔라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억...!!"
신나는 아이돌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을 때, 곤히 잠들어 있던 별이가 벌떡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 이마엔 식은땀이 조금 맺혀 있었고, 눈은 무서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심장이 떨리는 모양인지 한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으며 별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별아 괜찮아?"
별이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초점 없던 별이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뭘까. 이 눈빛은 뭘까. 왜 이렇게 내가, 슬프지.
"악몽 꿨어?"
"아니야... 괜찮아..."
별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 별이는 내 끈질긴 시선을 피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물 좀 마시려고."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당연하지. 이 수호천사님이 어디 아플 리가 있겠어?"
별이는 내 걱정을 덜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싱긋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정말 부엌으로 들어가 차가운 냉수를 벌컥 들이마셨다.
괜찮다고 했지만. 날 보면서 웃어주긴 했지만. 물을 마시고 있는 별이의 뒷 모습은 축 쳐져있었다. 분명 안 좋은 꿈을 꾼 게 분명해. 매번 날 위해주기만 하는 별이를 보며 이번엔 내가 너를 위해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별아!"
"응?"
"31일 날, 우리 데이트 하자."
*
별이를 두고 하는 외출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별이가 내게 오고 나선 거의 처음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12월 31일 오후. 항상 내게 주기만 했던 별이에게 나도 선물을 하고 싶어 별이는 집에 떼어 놓고 밖을 나섰다. 같이 가자고 하는 걸 겨우 겨우 막아 내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찌나 고집이 세던지. 천 년 묵은 고집이라 그런가. 별이 없이 혼자서 다니는 거리는 좀 어색하기도 했고 외로운 감도 있었다. 항상 옆에서 조잘대던 애가 없으니 심심한 맛도 있고.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이게 이렇게 느껴지나 싶었다.
우리 별이는 뭐를 좋아하려나- 열심히 돌아다니며 별이의 선물을 골라보지만 선물 고르기도 쉽지 않았다. 패션에 살고 패션에 죽는 문별이를 위해 때깔 좋은 옷이나 한 벌 해줄까 했지만 몰래 옷방에 들어가서 본 별이의 옷들은 다 고가 브랜드였다. 별이의 카드를 들고 나온 마당에 비싼 옷을 긁어 주긴 그랬다. 그래도 패션왕 문별이를 위해 패션 쪽으로 가닥을 잡긴 했다만, 뭐가 좋으려나.
꽤 오랜 시간 혼자 돌아다니며 선물을 고른 나는 별이의 선물을 패딩 안 주머니에 넣고 소중히 품었다.
"어 별아~ 나 이제 다 됐어. 슬슬 나와."
어둠이 내렸다. 이제 별이 만나서 밥 먹고, 선물 주고, 제야의 종소리 들으러 가야지! 신이 난 마음으로 별이와 통화를 마치고 걸어가던 중, 길거리에 전시된 장난감이 보였다. 그냥 지나치려던 찰나, 다시 멈추게 되는 걸음. 별이가 같이 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이것도-
그저 행복할 것만 같은 올해의 마지막 날이 이렇게 저물고 있었다.
*
왜. 어쩌다.
"우으읍...!!"
"얌전히 있어!"
차가운 공사장 바닥으로 내팽개쳐진 내 두손은 묶여 있었고 입엔 청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분명 아까까지 사람이 북적이는 시내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어느순간 다가온 이들은 순식간에 내 입을 막고 나를 끌었다. 내 목을 내치는 거친 손길에 잠시 정신을 잃은 사이 나는 어딘지도 모를 곳에 시꺼먼 옷을 입은 남자들 사이에 버려져 있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외모랑 안 어울리는 장난감을 갖고 노네."
수염과 흉터로 얼룩진 거친 외모의 남자가 비웃음을 쳤다. 별이에게 선물하려고 했던 장난감 칼을 들고 다가온 남자는 내 목에 장난감 칼을 들이밀었다.
"확 베어버릴까?"
뚝뚝. 눈물이 흘렀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무슨 이유 때문에. 별이 덕분에 갖고 있던 빚도 다 청산했는데. 당신들은 왜 나를 잡아다 놓는 거야, 왜.
중학교 1학년 때. 사채 빚에 쫓기던 엄마를 따라 우리 집에 저런 거칠고 험상궂은 남자들이 우르르 쳐들어 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집안을 풍비박산 내고 엄마는 그 중 한 명에게 맞아 입술이 터지기도 했었다. 내 아이만은 안 된다고 기어코 나를 뒤에 숨기는, 엄마의 뒤에 숨어서 벌벌 떨었던 그때가 생각 났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던 너무나도 무섭고 두려웠던 때.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나를 숨겨줄 엄마도, 몸을 숨길 그 어떤 것도.
"무섭지?"
남자는 들고 있는 장난감 칼로 자꾸 나를 찌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반항하고 싶었지만 온몸이 떨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무섭지 않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입이 막혀서가 아니었다. 나를 짓누르는 공포감에 나는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너는 오늘 죽을거야."
눈물이 더 터져 나왔다. 내가 왜. 내가 왜 죽어.
"애비를 잘못 둔 탓이지."
장난감 칼로 내 가슴을 꾹 누른 남자는 이 상황이 즐겁다는 듯 쿡쿡 웃으며 들고 있던 장난감 칼을 바닥으로 던졌다. 방금 느낀 수치는 공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예. 아, 늦으십니까? 예. 알겠습니다. 천천히 오십쇼."
누군가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걸까. 오늘 내가 죽을 거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고 통화를 마치는 남자를 보며 실낱같은 용기를 잃지 않으려 이를 악 물었다.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심심하지 않게 놀아줄까?"
이번엔 진짜 칼이었다. 주머니에서 꺼낸 날카로운 잭나이프를 내 목에 들이민 남자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무섭다, 너무 무섭다. 지금 이 순간 내 곁을 지켜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줄곧 떠오르는 사람의 이름을 속으로 외쳤다. 별아, 나 너무 무서워. 죽고 싶지 않았다. 별이가 살려줬던 그 날처럼 나는, 살고 싶었다.
별아, 별아. 나를 구해줘.
"흐어억!!"
근처에서 망을 보고 있던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풀썩 쓰러졌다. 쓰러진 그의 가슴엔 길고 날카롭게 베인 흔적이 있었다. 붉은 피가 흘러 바닥을 적시자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칼날이 보였다.
"뭐야 저 새끼!"
우르르. 그 곳에 있던 다섯명의 덩치 좋은 남자들이 각각 칼과 각목을 들고 빛나는 칼날에 달려 들었다. 그러나 혼자 빛을 발하는 칼날은 이리저리 움직여 다섯의 남자를 모두 베어내었다. 빛나던 칼날이 흥건히 피에 젖어 그 빛을 잃을 때, 검을 쥔 별이의 모습이 보였다. 쥔 칼날만큼이나 빛나는 은빛 머리를 하고 맹수같은 사나운 눈빛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칼날을 타고 흐른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너 뭐야?"
내 앞에서 나를 괴롭히던 하나 남은 남자가 품 안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순식간에 여섯 명을 처리하고 온 상대를 보고서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듯 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겨누어진 총을 보는 별이 또한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더, 더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탕-
공간을 울리는 총성이 울렸다. 어느새 별이는 남자의 앞에 서있었다. 그리고 피에 물든 검은 남자의 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으...헉..."
툭- 하고 남자의 손에 쥐어졌던 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지는 남자의 몸. 거칠게 검을 빼낸 별이가 몸을 피하자 남자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눈도 감지 못한 채로 남자는 죽어 있었다.
이제야 별이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맹수 같던 차가운 눈은 나를 보는 순간 촉촉히 젖어 들었다. 별이의 손에 쥐어졌던 검이 마법처럼 사라지고 별이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풀썩-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별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내 입에 붙은 테이프를 떼어 내고 묶인 손을 풀어 주었다.
"별... 별아..."
나 너무 무서웠어- 별이를 덜컥 안았다. 그리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내 몸만큼이나 벌벌 떨리고 있는 별이를 품에 안고 그렇게 한동안을 있었다.
"별아."
"미안해. 미안해..."
안았던 품을 떼어내고 별이를 봤을 때, 별이는 나처럼 울고 있었다.
"흐윽... 흑..."
별이는 두 손을 바닥에 짚고 더 서럽게 흐느꼈다. 눈물이 떨어진 바닥이 촉촉히 젖어 들었다.
"별아... 나 괜찮아..."
나보다 더 서럽게 우는, 나보다 더 덜덜 떠는 별이를 보며 오히려 공포에 절어있던 내 몸이 서서히 풀렸다. 울고 있는 별이의 머리카락을 걷어 별이의 볼을 잡았다. 천천히 고개를 든 별이의 눈은 얼마나 울은 건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별이의 그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너의 스무살을 다시 또 못 보게 될까봐..."
눈물로 가득 젖은 별이의 목소리였다.
"나를 찾아줘서 고마워."
말을 하는 별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펑펑 눈물을 쏟아내는 눈과 달리 미소를 머금은 입은 너무나 모순적이었다. 하지만 그 미소에 나는 똑같이 모순적이게도, 우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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