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01

<그들이 사는 세상>





*1화




분주한 촬영장의 모습. 각자의 역할이 있는 스태프들은 각자의 역할을 행하며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 용선은 촬영 감독과 함께 구도에 대한 이야기 중이었고 별이는 다른 연출팀들과 함께 슛 들어갈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자. 슬레이트."



별이에게 슬레이트가 날아왔다. 저번 드라마에 이어 이번에도 역시 슬레이트는 별이 몫인 모양이었다. 슬레이트를 오늘 촬영에 맞게 고친 별이가 모니터 테이블 쪽으로 걸어 오는 용선을 보았다. 추레한 옷차림에 살짝 피곤해보이는 얼굴. 


별이에게 오늘은 뜻깊은 날이었다. 용선의 드라마에 처음 투입된 날이자 용선을 현장에서 처음 본 날이기에. 입사하고 방송국에서 몇 번 마주치긴 했지만 인사하고 스친 정도라서 이렇게 현장에서 만나는 기분은 뭐랄까, 참 벅찼다. 한번이라도 봐줬음 싶어 별이가 계속 용선을 쳐다봤지만 용선에게 별이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존재인 듯 했다.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용선에게 가서 인사했을 때. 용선과 눈이 마주쳤을 때 별이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별 다른 말 없이 인사를 받고 곧 자리를 뜨긴 했지만.


용선이 자리에 앉으니 곧 혜진이 등장했다. 여유롭게 걸어오며 스태프들에게 웃으며 인사하는 혜진의 모습은 영락없는 연예인이었다. 혜진을 처음 보는 별이는 자기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와, 연예인은 연예인이다... 진짜 예뻐.


혜진의 마지막 종착지는 용선이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네. 오늘도 잘 부탁해요."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를 마친 혜진은 카메라 앞으로 걸어갔다. 지금 찍을 씬들은 혜진의 단독 씬들이었다.



"슛 들어갑니다!"



용선이 헤드셋을 쓰고, 조감독이 촬영이 시작됨을 알렸다. 별이는 서둘러 슬레이트를 치기 위해 화면 안으로 들어갔다.



"슬레이트 위로!"

"네?"

"위로 좀 올리라고!"



촬영 기사님의 요구에 재빨리 별이가 슬레이트를 위로 올렸다. 처음부터 지적이라니. 별이의 기분이 꿀꿀해졌다. 


착- 경쾌하게 울리는 슬레이트 소리를 뒤로 하고 별이가 냉큼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곧이어 용선의 큐싸인이 들리고 안혜진이 아닌 캐릭터 차지연이 된 혜진의 연기가 펼쳐졌다.


시간은 금세 점심 시간이 되었고, 쉴새 없이 달려온 촬영도 일시정지가 되었다. 식사는 근처 식당에서 이루어져 모든 스태프들이 정리를 마치고 하나 둘 이동하기 시작했다.



"문별이 어디가!"

"네? 밥..."

"감독님 챙겨야지. 선배님 챙겨. 안 드신대도 드시라고 해."



조감독 수영의 말에 별이가 아차하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저 감독님..."



별이가 쭈뼛거리며 용선에게 다가갔다. 용선은 점심 이후에 찍을 콘티들을 보고 있었다. 별이가 다가오니 용선이 별이를 슬쩍 쳐다보곤 다시 콘티로 눈을 돌렸다.



"생각없어."

"네?"

"밥 안 먹는다고."



무뚝뚝하게 말하는 용선에게 별이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가야 할까. 그러기엔 아까 수영이 한 말이 걸렸다. 안 드신대도 드시라고 하랬는데...



"그래도 드셔야 하지 않...을..."



별이의 말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용선이 베일 듯한 눈으로 별이를 노려본 탓이었다.



"야."

"네?"

"밥 안 먹는다고."

"그래도..."

"그리고 너. 슬레이트 똑바로 안 치니?"



별이는 눈 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첫 슬레이트에서 지적을 받은 게 오늘 하루의 미래를 보여줬을까. 처음 슬레이트를 잡았던 날 만큼이나 많은 실수가 있었다. 아침부터 점심까지 이 얼마 안 되는 시간에.



"죄송합니다."

"앵글 미리미리 보면 몰라?"

"알아요."

"알아? 아는데 왜 그래?"

"오늘 첫 날이라..."



용선에 기에 눌린 별이의 목소리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내 촬영이 첫 날이지, 현장 처음 아닐 거 아냐."

"네."

"아, 진짜."



용선이 짜증난듯 머리를 쓸었다.



"똑바로 해. 가서 밥이나 먹어."

"넵. 죄송합니다."



별이는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터덜터덜 식당으로 걸었다. 입이 삐죽 튀어나오는 건 숨길 수가 없었다. 따뜻한 사람일거라 생각했던 용선은 전혀 따뜻하지 않았다. 슬레이트 하나 못 친다고 저렇게 뭐라 그래? 저번 촬영장에선 오늘보다 더 못했는데도 그렇게 안 혼냈어! 어떻게 하라고 알려주셨지. 괜한 억울함과 자기에 대한 실망감이 공존하며 마음을 휘저었다. 




*




점심 이후. 용선에게 한 소리를 들은 별이는 정신을 단디 잡고 촬영에 임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계속 터져 나오는 실수는 계속 용선의 눈치를 보게 했다.



"앗!"

"어어, 안 돼!"



기어코 또 일을 만들었다. 멍하니 지나가던 중 조명에 걸려 넘어진 별이가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뒤를 돌았다. 제 발에 걸린 조명이 무시무시하게 별이에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별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촬영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근처에 있던 조명팀이 순발력을 발휘해 쓰러지고 있는 조명을 잡았다. 정말 아슬아슬했다.



"괜찮아요?"



들리는 목소리에 별이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제게 무섭게 다가오고 있던 조명은 조명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네. 죄송합니다..."



별이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 사고 없이 일이 지나가자 모두 다시 각자의 일에 집중했다. 혼이 빠진 별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조감독 수영이 다가왔다. 창백해진 별이 표정이 꽤 안쓰러워 보였다.



"네."

"그래 조심해. 다치면 큰일이잖아."



수영은 별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다시 카메라 옆으로 갔다. 별이는 눈치를 보며 용선을 보았다. 용선은 여전히 모니터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슬레이트!"



수영의 목소리에 별이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멍 때리고 있다 슛 들어가는 것도 몰랐다. 용선의 시선이 모니터에서 떨어져 별이에게 닿았다. 용선을 계속 쳐다보고 있던 터라 눈이 맞아 버린 두 사람. 용선의 눈빛은 차갑고 무서웠다. 별이는 공포감을 느끼며 서둘러 앵글 안으로 들어갔다.



"Take 2!"





*




장소가 바뀌었다. 여전히 야외 로케이션이었지만 배우들이 더 등장했다. 새로운 장소로 이동한 후 용선은 계속 콘티를 살피고 촬영 감독과 또는 배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별아."

"네?"

"저기 카페 가서 카페모카 하나만 사올래? 선배님 아무 것도 안 드셨잖아."

"아... 넵!"

"생크림은 빼고!"

"네!"



별이는 심부름을 받자마자 카페로 뛰었다. 카페모카, 카페모카... 중얼거리며 들어온 카페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주문 대기를 하고 있었다. 세 사람 뒤로 줄을 선 별이가 카페를 구경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게 참 귀여웠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카페 구경을 하다보니 별이의 순서가 왔다.



"주문 하시겠어요?"

"네. 카페모카요."

"생크림 올려드릴까요?"



계속 입 안에서 되뇌던 메뉴를 내뱉은 것까진 좋았으나. 생크림에서 막혔다. 수영 선배가 생크림을 올리랬나, 빼랬나... 머리에 혼란이 찾아왔다. 용선 선배님 단 거 좋아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럼 생크림도 좋아하시지 않으려나. 생크림을 언급했다는 건 꼭 필요한 부분이라는건데... 혼자만의 추리쇼를 펼친 별이는 빤히 보고 있는 직원을 의식하곤 서둘러 대답했다.



"네! 올려주세요."



마음 한 켠엔 작은 불안함을 가지고 별이가 촬영장으로 돌아왔다. 촬영은 시작되어 있었고 별이는 조심스럽게 용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용선의 앞에 카페모카를 내려 놓았다. 별이가 다가오든, 카페모카가 테이블 위로 올려지든 용선의 신경은 온통 배우들이 담기고 있는 모니터였다. 별이는 용선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컷. 한 번만 다시 갈께요."



용선이 컷을 외치자 스태프들이 굳어 있던 몸을 움직이며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감독님. 카페모카 사왔어요."



용선이 제가 사온 카페모카엔 눈길도 주지 않자 혹시 보지 못했나 싶은 별이가 용선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용선이 쿵! 하고 테이블을 손으로 내려쳤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모두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촬영 들어갔는데 내 앞에서 알짱거리면 어쩌자는거야?"



용선의 날카롭고 높은 목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아니. 공기를 찢다못해 별이의 마음까지 찢어버렸다. 옆에 있던 스크립터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그들을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빨리 드리고 싶어서..."

"말대꾸 하니? 아까부터 진짜 거슬려 죽겠네."



용선이 거칠게 머리를 쓸었다. 이 장면을 흡사 폭탄이 터지기 직전의 모습을 보는 것 마냥 수영이 쳐다보았다.



"촬영이 중요해, 이딴 커피가 중요해?"

"촬영이요."



그제야 용선의 시선이 카페모카에 닿았다. 그러나. 카페모카를 확인한 용선의 표정은 더 심각하게 구겨졌다.



"누가 생크림 올리라던?"



용선이 매서운 눈빛이 별이에게 닿았다. 별이의 가슴은 철렁 내려 앉았다. 불안하다 싶었더니 결국 잘못되고 말았다. 제대로 기억나지 않은 터라 나름 자기가 추리한다고 해서 한건데. 차라리 수영에게 다시 전화해서 물어볼껄 그랬나. 하지만 지금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씨X..."



곱디 고운 얼굴에서 나올 거라고 생각도 못한 욕이 튀어나왔다. 혼잣말처럼 작은 목소리였지만 별이는 들을 수 있었다. 



"꺼져."



용선이 내려놓았던 헤드셋을 다시 썼다.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린 별이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직일 힘이 없었다. 온 몸에 힘이 빠졌고 다리는 후들거리는 것 같았다. 별이가 그 자리에 붙박이처럼 서있으니 수영이 다가와 별이를 끌었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든 별이가 수영을 쳐다보았다. 별이는 완전 혼이 나간 얼굴이었다.



"생크림 빼라 그랬잖아."

"까먹었어요. 죄송해요."

"에휴. 감독님 촬영 들어가면 엄청 예민해져. 진짜 조금이라도 잘못 건들면 그냥 죽는거야. 알아?"

"네."

"그렇다고 기죽지 말고. 자. 슛 들어가자."



수영이 별이에게 슬레이트를 건넸다. 마음을 추스릴 새도 없이 촬영은 재개되었고 별이는 제 일을 해야만 했다.




*




공포의 하루가 지났다. 사방이 어둑어둑해지며 아침부터 이뤄진 모든 촬영이 끝났다. 스태프들은 각자 정리를 하기 바빴고 용선은 구석에서 담배를 물었다.



"선배님 오늘 힘드셨나보네..."



정리를 하던 수영이 담배를 문 용선을 발견하곤 조용히 읊조렸다.



"감독님 담배 피세요...?"

"가끔. 뭔가 안 풀리거나 답답할 때만 피셔."



별이의 질문에 나온 수영의 답은 오히려 별이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오늘이 안 풀리고 답답한 하루여서 용선이 담배를 물었다는 것인데, 꼭 그 이유가 자기 때문인 것 같았다.



"오늘 힘들었지?"

"네."

"선배님이 평상시엔 안 그런데 촬영 들어가면 엄청 예민해지시거든. 진짜 무서워지고."



별이는 정리를 하며 힐끔힐끔 용선 쪽을 보았다. 하얀 연기가 용선의 주위에 퍼져있었다.



"익숙해지면 상관없는데 처음에는 진짜 힘들거든. 그래서 도망가는 후배들 엄청 많았지."



수영이 입을 비죽였다.



"다른 스태프들은 좋아해요?"

"응. 선배님 되게 프로페셔널하고 다정해. 이게 참... 저렇게 화내고 갈구는 건 직속 후배들한테밖에 안 그러거든."



수영이 멋쩍게 웃었다.



"선배 밑에 1~2년차 막내들은 많이 도망갔어. 애들이 또 선배님에 대한 기대가 있어서 더 그렇더라. 겉으로 보나 평상시로 보나 되게 예쁘고 친절한 사람인 것 같은데 이중 인격도 아니고 갑자기 마녀가 되어 있으니."



별이는 수영의 말에 공감이 됐다. 별이 역시 용선에 대한 기대가 있었으니까. 가끔 방송국에서 마주쳤을 때, 동료들과 웃고 있던 용선의 모습. 인터뷰 영상에서 다정하게 말을 내뱉는 모습. 그리고 누가 봐도 순하고 착할 것처럼 생긴 외모. 그 모든 이미지가 하루만에 와장창 무너졌다.



"혹시 그만 둘꺼야?"

"네? 어... 아...니요?"



별이의 대답을 들은 수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별이의 어깨를 툭툭.



"그래! 이왕 하는 거 끝까지 해야지. 별이 넌 잘 될 것 같다! 이거 마저 정리하고 차로 와."

"하하... 넵."



마지막에 남은 건 막내인 별이였다. 별이는 나머지 짐들을 챙겨 들었다.



"너."



짐을 싸들고 차로 가려는 순간, 용선의 목소리가 별이를 붙잡았다.



"오늘처럼 일할거면 당장 그만둬."



아직 가시지 않은 담배 냄새가 풍겼다. 별이는 제 앞에 마주한 용선을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오늘 하루만 니가 난리친 게 몇 개니?"

"어... 12개...?"



별이의 대답에 용선이 어이없다는 듯 입방귀를 꼈다.



"그거 셀 정신은 있었나보네."

"......"

"그 정신머리로 수학이나 하지 그랬니."



용선이 비웃음을 흘리며 별이를 지나쳤다. 


별이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자기도 못하고 싶은 게 아닌데. 실수가 나왔다.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자기도 잘못한 게 있었다. 그래도 왜 저렇게까지 말하는건데? 자존심이 상했다. 어디서 뭐 못한다는 소리는 거의 듣고 살지 않았다. 오히려 일을 빨리 익힌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들었지. 별이는 화가 났다. 그리고 별이는 다짐했다.


두고 봐. 내가 제대로 해줄 테니까.


짐을 든 별이가 용선의 뒤를 따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