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는 세상>
*4화
오전부터 시작된 촬영은 해가 지고서도 1시간 후에야 끝이 났다. 저녁 식사를 위해 근처 식당으로 이동한 스태프들은 식당 하나를 온전히 차지하고 모두가 먹고 떠들며 하루의 회포를 풀기 시작했다.
"선배는 또 안 드신대?"
"그냥 먼저 가라고만 하셨어요."
별이가 수영의 맞은 편에 앉았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부대찌개를 보며 별이가 입맛을 다셨다. 별이가 숟가락을 들어 뜨거운 국물을 떠 호호 불었다. 호로록 마시니 목구멍을 타고 뱃속까지 따뜻한 온기가 퍼졌다.
"어, 감독님!"
촬영 감독이 식당 안으로 들어오는 용선을 보며 유쾌하게 소리쳤다. 별이가 고개를 돌리자 웬일로 식당에 발을 들인 용선이 천천히 자기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 가볍게 소주 한 잔씩만 하면 안 됩니까?"
"오, 좋다 좋아!"
"그래요! 감독님이랑 같이 밥먹는 것도 오랜만인데!"
촬영 감독을 시작으로 많은 스태프들이 소주를 외쳐댔다. 실제로 별이가 용선의 팀에 들어 오고 나서 현장에서 도시락을 시켜먹었을 때 빼고 식당에 와 밥을 먹는 용선의 모습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별이가 처음 본 만큼 드문 일이었기에 스태프들은 더 분위기를 몰았다.
"딱 한 잔씩만 해요 그럼."
"캬! 김감독님 최고! 사장님, 여기 소주 테이블 별로 하나씩 주세요~!"
신난 스태프들을 보며 용선이 미소를 지었다. 별이는 꽤 화목하고 활발한 분위기에 당황스러우면서도 재미를 느꼈다. 단지 지방 촬영을 나온 것 뿐인데, 단지 용선이 식당에 들어온 것 뿐인데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지나.
끼익-
별이 옆에 놓여있던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리고. 찌개 국물을 한 숟가락 더 마시던 별이가 자기 옆으로 앉는 실루엣으로 고개를 돌렸다.
"켁...! 콜록 콜록."
사레가 걸린 별이가 시뻘개진 얼굴로 기침을 해댔다. 그런 별이의 앞으로 물컵이 놓여졌다. 별이는 그 물컵을 건넨 사람을 확인하곤 순간 숨이 멎을 뻔했다.
"내가 귀신이라도 되니."
별이의 옆에 앉은 용선이 자신의 컵에도 물을 따라 한 모금 마셨다. 별이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앞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 마셨다.
"와. 선배랑 마주 앉아 밥 먹는 게 얼마 만이에요."
수영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말했다. 곧 별이의 테이블에도 소주가 도착하고 소주를 받아든 수영이 잔을 각자의 앞에 놓았다.
"선배 술 괜찮아요?"
"아니 됐-"
"감독님!"
용선이 손사래를 치며 수영이 건네는 술을 거절하는 찰나, 촬영 감독의 쾌활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건배 한 번 다같이 하시죠!"
"호오~!!"
촬영 감독의 말에 모두가 호응했다. 난감한 듯한 표정을 짓던 용선이 하는 수없이 수영에게 눈짓으로 술을 따르라는 신호를 보냈다. 용선의 술잔에도 술이 차고, 수영이 별이를 쳐다보니 별이가 빠르게 잔을 들었다. 별이의 잔에도 술이 찼다.
모두가 술잔을 들고 용선을 쳐다보고 있었다. 용선은 민망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소주잔을 들었다.
"지금까지 너무 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동료를 만나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저는 참 운이 좋은 것 같아요. 부족한데도 믿고 따라와주신 많은 감독님, 스탭분들께 항상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남은 촬영도 우리 힘내서 잘 합시다! <데칼코마니> 파이팅!"
"파이팅!!!"
용선의 건배사에 이어 온 식당을 채우는 스태프들의 후창이 쩌렁쩌렁 울렸다. 용선이 소주를 한번에 털어 넣었다. 술을 잘 못하는 용선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다시 자리에 앉은 용선은 바로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별이도 수영과, 옆 테이블 사람들과 술잔을 부딪히고 술을 털어 넣었다. 알싸한 알콜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선배. 술 더 드릴까요?"
"됐어."
용선의 거절에 소주병의 입구가 별이에게 향했다. 다시 별이의 잔에 술이 차고, 두 잔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들렸다. 단숨에 한 잔을 또 비운 수영이 햄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
"선배. 별이 진짜 너무 괜찮은 거 같아요."
수영이 꺼낸 별이 얘기에 용선이 별이를 힐끔 쳐다보았다.
"안 도망가고 왔네."
용선의 말에 별이는 순간 욱한 감정이 올라왔다.
"제가 왜 도망가요."
진짜 말대답은 잘한다니까. 용선이 고개를 숙이며 살짝 웃었다.
"무서워서 도망갈 줄 알았지."
"...... 안 무섭거든요."
"어머 얘봐라. 거짓말도 잘 하네?"
용선이 살짝 눈을 치켜 뜨며 별이를 보았다. 뜨끔한 별이는 괜히 입술을 축이며 용선의 시선을 피했다.
"에이~ 선배. 별이 진짜 잘한다니까요."
"잘하는 건 아닌거 같은데..."
분위기를 전환시키려는 수영의 말에 용선이 솔직하게 대꾸했다. 수영은 별이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별이는 불편한 이 자리를 당장이라도 박차고 나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잘해야지. 안 그래? 문별이."
처음으로 용선이 부르는 제 이름에 놀란 별이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용선은 그저 밥을 한 젓가락 떠 먹고 있었다. 별이는 살짝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꼈다. 싫다고, 무섭다고 아무리 그래도 용선은 별이가 좋아하고 동경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불렸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설렜다. 별이는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물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조금씩 펴지는 얼굴에 별이가 괜히 코를 긁었다.
밥을 먹던 용선이 힐끔 별이를 보았다. 뭐 때문인지 설레고 들떠보이는 별이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별이가 무엇때문에 저런 표정을 짓는지 파악은 안 되지만, 역시나 얼굴에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용선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다른 테이블엔 술병이 하나 둘씩 늘기 시작했다. 점점 식당 안의 분위기는 달아오르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용선은 입을 닦고 핸드폰을 챙겼다.
"들어가시게요?"
"응. 놀다 들어가."
용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이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별이는 말없이 스태프들의 인사를 받으며 나가는 용선의 뒷모습을 보았다.
"별아. 우린 한 잔씩만 더 할까?"
벌써 술잔을 잡고 있는 수영의 말에 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
선선한 바람이 머리를 흩날리고, 시원한 파도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혜진이 호텔 테라스를 활짝 여니 남해 바다의 멋진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혜진은 가디건을 좀 더 여미며 크게 숨을 들이 마셨다.
남해. 어쩌다가 촬영지가 남해가 됐을까. 대본 상으로는 바닷가라고만 적혀있던 촬영지였다. 협찬이든, 용선의 결정이든 어쨌든 촬영지는 남해가 되었는데, 참으로 얄궂은 운명 같았다. 남해는 혜진과 휘인이 함께 처음 떠났던 여행지였다.
'남해 어때?'
'뭐가?'
'우리 여행 말이야.'
휘인의 생일을 맞아 계획했던 여행이었다. 혜진의 바쁜 스케줄 탓에 휘인의 생일에 딱 맞추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같이 여행을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참 기대가 됐었다.
'난 상관없어. 왜? 남해 가고 싶었어?'
'아니. 너 따뜻한데 좋아하잖아.'
'니 생일인데 너 좋아하는 데를 가야지 뭘 내 취향을 생각해.'
사계절 중에서도 유독 여름을 좋아했던 혜진이었다. 아예 해외로 날아갈 시간은 없으니 휘인이 여러 선택지 중에 고른 결정이었다.
'제주도는 너 저번 달에 예능 촬영 때문에 갔었고. 여수도 이번 영화 촬영 때문에 갔었고.'
'그걸 다 꿰고 있어?'
'이정돈 기본이지.'
자길 보며 웃던 휘인의 모습이 생각난 혜진이 결국 미소를 머금었다. 참 예뻤는데... 웃는 모습.
'드라마 소재 생각하다가 장소 찾아봤는데 꽤 예쁘더라고. 그래서 너랑 가고 싶었어.'
'난 어디든 좋아. 너만 있으면 돼.'
'윽. 오글거려, 안혜진.'
'연인끼린 그런 말도 하고 그러는거야 자기야~'
'야아! 달라붙지마아! 징그러어!'
혜진의 얼굴에 번져있던 미소가 점차 쓸쓸하게 변했다. 과거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팠다. 막 추억을 떠올릴 땐 행복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아플 뿐이었다.
혜진이 가디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휘인의 연락처를 찾았다. 휘인의 이름 앞에서 머물며 저번처럼 휘인에게 거짓말처럼 전화가 오길 바랐지만 그때와 같은 일은 아무리 기다려도 일어나지 않았다. 혜진은 한숨을 내쉬며 방 안으로 들어가 테이블에 놓인 와인잔을 들었다.
*
밤 11시가 가까워서야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 식당에서 일어났다. 별이와 수영을 비롯한 10명 가까운 스태프들이 늦게까지 자리하며 술잔을 부딪혔다. 수영은 어느새 성격 좋은 촬영 감독과 형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고 별이는 약간 알딸딸한 기운으로 헤실헤실 웃으며 걸어갔다.
"벼리 안뇽! 내일 봐!"
별이는 수영을 비롯한 다른 스태프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곤 자신이 묵는 방인 501호로 올라갔다.
달칵-
방문을 활짝 열자 별이를 환영하는 단 한 명의 사람에 별이가 우뚝 멈춰 섰다. 편한 트레이닝 바지에 목은 늘어나고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큰 티셔츠. 머리는 대충 묶고 칫솔을 입에 물고 있는 용선의 모습. 항상 밖에서의 용선만 보다가 집 안에 있을 때 용선의 모습을 보니 별이는 되게 색다른 기분이었다.
들어오지도 않고 멀뚱히 서있는 별이를 보며 용선이 칫솔을 입에서 빼며 말했다.
"들어올거면 들어오고."
"아..!"
그제야 정신이 든 별이가 허둥지둥거리며 안으로 들어가다 문에 정강이를 찧이고 말았다. 아픈 정강이를 비비며 별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용선이 양치하는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하자 별이가 조심히 고개를 들었다. 막 씻었는지 용선은 젖은 머리칼이었는데, 오히려 씻은 얼굴이 평상시보다 더 뽀얗게 보였다. 더 어려보이고 순해보이고 예뻐보이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별이가 그러는 사이 용선은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 입을 헹궜다.
안으로 들어온 별이가 너무나도 조용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까 오전에 왔을 때와 달라진 거라곤 별이의 짐 외에 짐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 정도. 별이는 의아함을 느꼈다. 짐도 사람도 더 있어야 할텐데... 왜 저것밖에 없지?
화장실로 들어갔던 용선이 다시 나오며 별이를 힐끔 보았다. 술을 꽤 마신 모양인지 불그스름한 얼굴에 궁금증이 가득 차있었다. 용선은 크게 신경쓰지 않고 이부자리를 피기 시작했다.
별이는 조금 당황해하며 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 선배! 혹시 501호 저랑 감독님만 써요?"
-아니. 거기 총 6명 들어가는데.
화장실 문을 잠그고 별이가 다급하게 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영이 전화를 받기 무섭게 별이가 쏜살같이 질문을 하고, 돌아오는 대답에 더 혼란스러운 별이가 머리를 짚었다.
"누, 누구요? 지금 저랑 감독님 밖에 없는데..."
-아직 노나보지 뭐. 아니면 다른 방에 갔거나.
"다른 방이요? 혹시 저말고 또 501호 쓰는 사람 누군지 알 수 있어요?"
-어... 영은FD랑 또 누구였더라...
수영과의 전화를 마친 별이가 급히 이 방을 쓴다는 다른 스태프들에게 카톡을 돌렸다. 그중 셋에겐 답이 오지 않고 유일하게 답장온 영은의 대답은 모두 103호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안 오세요?]
[네. 여기가 더 편해서 ㅎㅎ]
오 마이 갓. 별이는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아 버렸다. 영은을 포함한 나머지 셋도 모두 3박4일간 다른 방에서 머물 예정이라는 말에 별이가 머리를 쥐어 뜯었다. 별이가 쓰는 501호 외에 나머지 방은 20명 가까운 나머지 여자 스탭들이 모두 쓰는 방이었다. 확실히... 별이 자신이 생각해도 용선이 있는 방보다 모두가 있는 그 방이 더 편하고 재밌을 것 같았다. 별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럼 감독님하고 둘이만 쓰는거야? 와 미치겠다.
혼란스러워진 별이의 고민이 시작됐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나가자니 대놓고 용선을 피하는 것만 같고. 끙끙 거리며 혼자 고민하던 별이가 큰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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