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는 세상>
*3화
띵동-
노트북 타자 소리만 가득하던 방 안에 새 손님을 알리는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휘인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 놓고 현관으로 걸어 갔다.
띠리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열리는 문틈 사이로 용선의 얼굴이 보였다.
"우리 정작가님. 대본은 잘 되가고 있으신가."
"독촉하려고 찾아온거면 나가시지."
용선이 휘인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독촉이라니. 우리 작가님 밥도 안 먹고 글 쓸까봐 걱정 되서 이렇게 먹을 거 사왔는데."
용선이 손에 든 검은 봉지를 위로 올렸다. 휘인은 봉지를 슬쩍 보곤 봉지에 담긴 음식에서 풍기는 냄새에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비쳤다.
"언니가 먹고 싶어서 사온거잖아."
"어? 너 이거 뭔 줄 알아?"
"김용선씨가 사온 거면 뭐겠어. 떡볶이겠지."
"역시 멍멍이를 닮아서 그런가 코도 개코야."
용선의 놀림에 휘인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용선은 테이블에 봉지를 내려 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곳은 휘인이 처음 입봉하면서 얻었던 작업실이었다. 투룸으로 되어있는 휘인의 작업실은 거실엔 소파가 놓여 있었고 바닥엔 정돈된 이부자리가 있었다. 방 하나는 휘인이 글을 쓰는 공간으로 책상과 1인용 침대가 놓여 있었다.
"지영씨는?"
"오늘 어머님 생일이라 휴가."
"역시 내가 타이밍 좋게 왔네."
지영은 휘인의 보조 작가였다. 막 대학을 졸업한 사회초년생으로 아직 서툰 모습이 많았지만 작업에 들어가면 자기 몸 하나 제대로 챙기지 않는 휘인에겐 꼭 필요한 존재였다.
"마지막화 작업은 잘 돼가?"
"아. 김감독님. 그런 거 물어볼거면 가세요!"
"아아, 미안 미안. 니가... 줬다 뺐어가서 그렇잖아, 뭐."
지금 찍고 있는 <데칼코마니>의 대본은 총 4화 중 3화까지 나온 상태였다. 사실은 이미 4화까지 모두 탈고한 상태였으나 가편집 영상을 본 휘인이 마지막화를 수정해야겠다며 도로 가져가 버렸다. 그나마 사전 제작이라 촉박하지 않아서 상관은 없다지만, 뭐가 맘에 안 들어서 도로 가져간 것인지 궁금한 용선이었다.
"근데 진짜 뭐가 맘에 안 들어서 수정하겠다는거야?"
"작가 맘이다."
"정작가님."
용선의 시선을 피하며 가만히 입을 다무려고 했던 휘인이 떡볶이를 깨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 안혜진이 소화 못 해."
"물론 지금 안혜진 연기가 뭔가... 캥기는 부분이 있기는 한데... 내가 봤을 땐 그래도 그냥저냥 괜찮을 거 같은데. 그 결말도."
용선이 떡볶이를 오물오물 거리며 말했다. <데칼코마니>의 마지막 4화는 용선만 본 상태였다. 4화의 내용과 결말의 내용을 알고 있는 용선이 천천히 휘인이 썼던 마지막화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완벽주의자 김용선 감독님이 그냥저냥이라는 말을 쓰다니, 지나가던 막내가 웃겠다."
휘인이 바람빠지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이번 막내는 안 도망갔어?"
휘인이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저번주에 새로 왔어."
"진짜 징하다, 김용선. 어떻게 한 번도 첫 번째 막내를 끝까지 데리고 가는 때가 없어?"
"걔네들이 못 버티는거야."
"독하게 좀 그만 굴어라. 그래서 지금 막내는 어떤데?"
지금 막내라... 용선이 별이에 대한 생각을 하나 둘 떠올렸다. 처음 현장에서 만나던 날.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찬 눈으로 자길 바라봤었지. 동경 어린 눈으로 날 보며 인사를 건넸지만 그런 걸 받아줄 여유따윈 없었다. 그리고 촬영이 시작되고. 아무리 1년차라고 하지만 눈에 거슬리는 실수들이 자꾸 터져나와서 제 신경을 건드렸었다. 용선이 매섭게 몰아붙이니 주눅든 얼굴에 억울한 마음은 고스란히 담겨 있었더랬지. 그 모습이 꽤 깡은 있어 보였다. 용선이 화를 내면 한 마디도 못하고 입만 뻥긋대던 다른 막내들과 달리 별이는 그 와중에도 꼬박꼬박 말대답을 했었다. 그렇게 첫날 된통 혼나서인지 둘째날부터는 얼굴에 오기가 서려있었다. 감정을 못 숨기는 편인지 어떻게 곧이 곧대로 마음 가짐이 얼굴에 드러났었다.
그러다 어제 술집에서 만난 별이가 생각 난 용선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야. 왜 웃어? 좀 재밌는 앤가봐?"
"조금?"
용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어떤데?"
"날 무서워하고 싫어하는데, 지지는 않으려고 하는 것 같네."
"와. 어떤 간 큰 놈이 김용선한테 맞서?"
"맞서는 정도까진 아니고. 근데 아직 지켜봐야해."
"왜?"
"당장 다음 촬영부터 안 나올 수 있거든."
"뭐??"
휘인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용선을 쳐다봤다. 도대체 저 사악한 선배는 후배들을 어떻게 대하는 건지, 휘인은 자기가 피디가 아닌 작가인 게 다행인가 싶었다.
"내 뒷담 까다 걸렸거든."
"헐. 진짜? 와. 그 상황 완전 스릴러였겠는데?"
"이 얘기는 그만 하고. 너 대본 얼마 안 남았으면 남해 씬 찍을 때 한번 안 올래?"
"내가 무슨 촬영장을 나가. 것도 남해까지 쫓아가라고?"
휘인이 질색이라는 듯 표정을 구겼다.
모레부터 진행되는 지방 씬은 남해 로케이션이었다. 3박4일 간의 촬영으로 남녀 주인공의 과거 모습과 주인공 혜진의 감정 변화가 일어날 부분이기도 했다.
"중요한 부분이라며. 그럼 와서 보는 것도 좋지 않아?"
"현장은 온전히 감독님꺼라고요. 어련히 잘 하실까."
휘인이 무심한 얼굴로 대꾸했다. 용선이 말없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안혜진 단독 씬 마지막 날이야."
용선의 낮은 목소리에 휘인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해?"
"그냥 그렇다고."
혜진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나오니 무거워진 공기에 둘 다 말이 없었다. 휘인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 놓았다.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촬영도. 안혜진도. 나 이제 대본 쓸거야. 갈 거면 가든가."
휘인이 용선을 두고 방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굳게 닫힌 방 문을 보며 용선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상관이 없는데 대본을 수정하냐..."
용선이 남은 떡볶이를 뒤적거렸다.
*
방송국 앞.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이른 새벽부터 수많은 스태프들이 촬영 버스에 올라탔다. 오늘부터 3박4일 간 남해에서의 촬영을 위해 서둘러 출발하고 있는 참이었다. 별이 역시 축 쳐진 어깨에 연거푸 하품을 내뿜으며 눈을 비볐다.
"아.. 안녕하세요.."
막 도착한 용선과 만난 별이가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채로 용선에게 인사를 건넸다. 용선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아무 반응 없이 별이를 한번 쳐다보곤 버스로 올라탔다. 별이가 쿵쿵 거리는 심장을 움켜 쥐었다.
"아 진짜 무서워 죽겠어... 나 잘 온 거겠지..."
별이는 울상인 얼굴로 촬영 장비와 소품을 서둘러 챙겼다.
출발할 준비를 모두 마친 별이가 수영의 뒤를 따라 버스에 올라 탔다. 버스 맨 앞 좌석엔 용선이 혼자 앉아 있었다. 이 시간에도 용선은 피곤하지도 않은지 콘티를 챙겨보고 있었다. 별이는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용선을 지나쳐 수영의 옆좌석에 앉았다.
"피곤하지? 좀 자."
말을 마친 수영은 크게 하품을 하고 금세 눈을 감았다. 사람들을 모두 태운 버스는 천천히 출발했고, 초반 웅성거리던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줄어들었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들어섰을 땐 온 버스 안이 고요했다. 별이도 고개를 옆으로 떨군 채 잠에 빠져 들었고, 마지막까지 눈이 떠있었던 용선도 보던 콘티를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
모두가 비몽사몽한 얼굴로 버스에서 내렸다. 누구는 뒷머리가 푹 꺼져있고, 누구는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도착 후, 숙소 근처에 첫 촬영지가 있는 관계로 숙소에 먼저 짐을 풀고 촬영지로 이동하는 것이 오늘의 스케줄이었다.
"제가 문자 보내드린 대로 남자 스탭들은 101호랑 102호 쓰시면 되고요."
3박4일 간 머물 숙소에 도착한 수영이 방 별로 배치한 명단을 보며 사람들을 안내했다.
"여자 분들은 103호랑 501호 쓰시면 됩니다."
수영의 안내를 들은 스태프들은 자기들의 짐을 챙겨 하나 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별이도 얼른 들어가 짐을 놓고 오려고 수영이 보낸 문자를 열었다. 별이는 별 생각 없이 501호라고 적힌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오 좋다."
501호에 가장 먼저 도착한 별이가 자신이 쓰게 될 방을 둘러보며 짐을 한 구석에 내려 놓았다. 방은 모두가 이불 깔고 누워잘 수 있을 만한 큰 하나의 방으로 되어 있는 숙소였는데 대여섯명은 충분히 눕고 뒹굴 수 있는 크기였다. 별이는 좀 누워 쉬고 싶었으나 곧바로 촬영이 이루어지는 탓에 서둘러 방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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