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는 세상>
*5화
당황한 얼굴로 급히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 별이를 뒤로 하고 이부자리를 깐 용선이 바닥에 철푸덕 앉았다. 티비 아래 놓여진 리모콘을 잡아 들고 천천히 채널을 돌리며 뭐 볼만 한 거 없나 공중파부터 케이블까지 채널을 돌리다보니, 한 케이블 채널에서 예전 용선이 찍었던 드라마 <별이 빛나는 밤>이 나오고 있었다. 용선이 천천히 리모콘을 든 손을 내렸다.
<별이 빛나는 밤>은 온전히 용선이 메인으로 연출한 첫 장편 드라마였다. 처음 단막극으로 입봉한 후 호평을 받은 용선은 잘 나가던 선배의 드라마에 B팀 감독으로 들어 갔었다. 그때 선배 메인 감독의 중간 하차로 잠시 메인 감독을 맡긴 했지만 온전히 프리 단계부터 끝까지 책임진 드라마는 <별이 빛나는 밤>이 처음이었다. 이 드라마는 지금까지 용선의 성공이 운이 아닌 실력임을 보여 주었으며, 무엇보다 당시 시나리오를 맡았던 작가 휘인과 언니동생할 만큼 가까워지게 해준 용선에겐 참 특별한 드라마였다.
딸칵-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안에서 씻고 나온 별이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나왔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가 별이의 시선이 용선이 틀어놓은 티비로 향했다. 그러자 용선이 급히 내려 놓았던 리모콘을 들어 채널을 돌렸다.
별이는 말없이 용선의 근처에 놓인 자신의 짐 가방으로 걸어갔다.
톡톡 로션을 바르는 소리가 들리고 용선은 그저 다들 신나서 웃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에 시선을 고정했다. 로션까지 다 바른 별이는 용선의 눈치를 보며 가방에서 잠옷을 꺼냈다.
"왜 자꾸 힐끔힐끔 쳐다봐."
별이가 훔쳐 보는 게 느껴진 모양인지 티비를 보고 있던 용선이 고개를 돌려 별이를 보았다. 그리고 별이가 들고 있는 잠옷을 본 용선이 말을 이었다.
"안 봐. 걱정마."
다시 쌩하니 고갤 돌린 용선을 보며 당황한 별이가 제 잠옷을 내려다보았다. 별이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화장실에서 끙끙 거리며 고민하던 별이는 이미 방 안으로 들어온 마당에 다시 나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용선과 같은 방을 쓰기로, 단 둘이지만 같이 쓰기로 큰 결심을 먹었다. 하지만 막상 밖으로 나오니 용선과 단 둘이 있는 공기가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용선과 한번도 단 둘이 있어본 적이 없었다. 촬영장에서도 방송국에서도 식당에서도. 하기야 용선과 단 둘이 있을 일이 뭐가 있었겠냐만은. 그런 어색한 기운 속에 놓이니 화장실 안에서 하고 나온 결심이 다시 흔들거렸다.
'지금이라도 방 옮길까?'
그런 고민에 잠긴 채 잠옷만 들고 앉아 자기도 모르게 용선의 눈치를 보던 별이었다. 방을 옮기는 고민이 아니라 옷 갈아 입을 고민을 하는 걸로 착각한 용선의 반응에 갑자기 별이의 부끄러운 고민들이 더 생겼지만.
'옷은 진짜 어떻게 갈아 입지? 화장실 가서? 매번? 3박 4일 내내? 아니 가만 있어봐. 이불은 어디다 펴야해. 간격은 얼마나 띄워야 되지? 혹시라도 자다가 감독님한테 굴러가면 어떡하지? 나 피곤하면 코고는데 혹시 나 오늘 밤에 코고는 거 아냐?'
업그레이드 된 고민들 속에 별이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방황했다. 용선은 여전히 아무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별이의 반응에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완전히 심각한 고민에 빠진 얼굴로 앉아있는 별이가 용선의 눈에 들어왔다.
"뭐가 문젠데."
"네?"
"옷 갈아 입는게 눈치보이면 화장실 가서 갈아입든가. 아니면 나랑 있는게 불편해? 내가 나가줄까?"
"아, 아니에요!"
별이가 급하게 두 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니면. 다른 방 쓰고 싶으면 다른 방 가도 돼. 어차피 나야 뭐, 혼자 쓰고 좋지."
별이가 생각했던 모든 고민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내놓는 용선이었다. 고민에서 조금 벗어난 듯한 별이의 표정을 보며 용선은 역시나 이런 저런 고민들로 저러고 있었던 게 맞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갈 거면 가고."
선택의 기회였다. 계속 고민할 필요 없이, 용선의 눈치 볼 필요 없이 결정할 수 있는 기회. 별이가 천천히 눈을 올려 용선을 보았다. 난 니가 무슨 선택을 하든 상관 없다는 표정.
별이는 이 선택의 기회를, 이렇게 잡기로 했다.
"감독님이랑 같이 있을래요."
*
하얀 화면 위에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휘인은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톡톡 두드렸다. 글이 잘 나오지 않는 모양인지 휘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 채 휘인이 애꿎은 입술만 물었다.
지이잉- 지이잉-
책상 위에 놓인 휘인의 핸드폰이 진동을 내뿜으며 움직였다. 안경 아래로 얼굴을 한번 쓸은 휘인이 책상을 흔들고 있는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대본을 고민하던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복잡 미묘해지는 얼굴.
"여보세요."
전화를 걸었으면서 그 당사자가 말이 없다. 하지만 휘인은 보채지도 끊지도 않고 조용히 그리고 가만히 기다렸다.
-안 자고 있었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기다리니 혜진의 축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잠이든 술이든 뭐에 취해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직 대본 남았거든."
-아... 그치.
또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가만히 있던 휘인이 무어라 말을 하려 입을 떼는 순간.
"할 말-"
-나 오늘 촬영한 거 폰으로 찍었는데.
"어?"
-한 번 봐줄래?
혜진이 고심하고 고심한 명분이었다. 휘인에게 전화를 걸 명분. 혜진의 뒷 말이 살짝 떨리는 것 쯤은 예민한 휘인이 알아차리기에 너무 쉬운 일이었다.
"알아서 잘 했겠지."
-아... 그치.
풀이 죽은 혜진의 목소리였다. 휘인의 손가락이 키보드가 아닌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보내줘."
-어? 어어! 내가 지금 바로 보내줄게!
핸드폰 너머로 허둥지둥대는 혜진의 모습이 훤히 그려졌다. 휘인은 여전히 보채지도 끊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영상을 보내준다고 해놓고 전화를 끊지도, 그렇다고 보내지도 않는 혜진을 기다리며.
-니 드라마에 민폐는 안 끼칠게.
"내가 분명 내 드라마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했을텐데. 벌써 잊었나보네."
-...... 미안.
"우리 드라마야. 내가 만들고, 김용선 감독님이 만들고, 니가 만드는 우리 드라마라고. 이제 너 신인도 아닌데 이 얘기를 다시 해야겠어?"
어쩌다보니 휘인이 혜진을 혼내는 모양이 그려졌다. 모기 소리만치 작은 혜진의 미안하단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휘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니가 지금 많이 부담되는 거 알아. 근데 공사는 구분해야지. 안 그래?"
-응...
"5년 전에 아무 것도 없던 너를 선택한 것도, 지금 너를 다시 선택한 것도 다 내 결정이야. 그리고 난 내 결정이 그때도 지금도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아."
-......
"나 후회하게 만들지 마."
-응... 미안해.
"안혜진!!"
혜진의 기죽은 반응에 결국 참다 못한 휘인이 소리를 질렀다.
"5년 전에 니가 나한테 물었었지. 왜 널 캐스팅 했냐고. 그때 내가 뭐라 그랬어? 지금이랑 똑같은 말 했을거야. 나 후회하게 만들지 말라고. 기억해?"
-응.
"그때 너 나한테 뭐라고 했어?"
-......
"뭐라고 했냐고."
-절대 후회할 일 없을 거예요, 작가님.
"전화 끊자마자 바로 영상 보내. 자존심 쎈 배우님이 동갑내기 작가한테 더 깨지고 싶지 않으면 제대로 하고."
말을 마친 휘인이 혜진의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종료해버렸다.
던지듯 책상 위에 핸드폰을 놓은 휘인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곧 휘인의 핸드폰에서 메시지가 도착했단 진동이 짧게 울렸다.
*
별이가 옷을 갈아입고, 용선의 근처에 이부자리를 깔아 놓고도 어색한 공기가 계속 됐다. 티비에선 웃기는 분장과 센스 넘치는 대사들로 가득찬 재미난 예능이 한창이었지만 용선도 별이도 아무도 웃는 사람은 없었다. 별이는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눈에도 제대로 안 들어오는 티비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내가 싫니?"
어색한 공기를 뚫은 갑작스런 용선의 질문이었다. 차라리 어색한 공기 속에 짓눌려 있는 게 나은 것 같은 질문이였지만. 용선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별이를 보았다. 당황한 별이는 입만 뻐끔거리며 재빨리 대답을 내뱉지 못했다.
"싫겠지."
"아니에요!!"
별이가 큰 목소리로 부정했다. 살짝 놀란 듯 동그래진 눈으로 용선이 별이를 보았다.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그래?"
가만히 별이를 보던 용선이 말없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님은 제가 싫으세요?"
이번엔 별이의 질문이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 여태껏 자기에게 그런 질문을 했던 후배가 있었던가. 용선은 바로 아니라는 답을 내렸다. 확실히 별이는 지금까지 만났던 다른 후배들과 달랐다. 그 차이가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별이는 그 어느 때보다 떨리는 심정으로 용선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치 합격 발표를 기다리는 것 마냥. 별이는 용선이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했다. 정말 자기가 싫어서 그렇게 못되게 구는 건지. 만약 그렇다면... 꽤나 서운하고 슬플 것 같았다.
"안 싫어해."
긴장으로 굳어있던 별이의 몸이 스르르 내려 녹는 기분이었다. 별이의 얼굴에 스리슬쩍 웃음이 감돌았다. 느끼는 감정 그대로 얼굴에 나타나는 별이를 보며 용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너 되게 솔직하구나."
무려 용선이 자기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용선이 한 말도 당황스러웠지만 용선이 짓고 있는 표정도 별이를 당황스럽게 했다. 한번도 보지 못했던 눈빛과 표정으로 자길 보고 있는 용선. 화도 없고, 적의도 없고, 불만도 없는 용선의 얼굴이었다. 처음보는 낯선 모습에 별이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너... 얼굴 빨개졌어."
용선이 별이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별이는 급하게 베개로 얼굴을 가렸다. 용선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하도 혼내서 나 엄청 싫어할 줄 알았더니. 오히려 나 좋아하고 있었나보네?"
장난끼가 담긴 용선의 말에 별이는 더더욱 올라오는 열기운을 느꼈다. 얼굴 가득 가렸던 베개를 천천히 아래로 내려 눈만 빼꼼 내민 별이가 용선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용선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화 좀 내지 마요."
"뭐야. 나한테 훈계해?"
별이가 용기를 내서 한 마디 던지니 용선의 표정이 다시 급속도로 굳었다. 딱딱한 말투로 용선이 내뱉으니 별이가 꿀꺽 침을 삼켰다. 하지만 용선은 다시 피식 웃음을 바로 흘렸다.
"난 잠이나 잘란다. 너 보고 싶은 거 봐."
다시 표정이 풀린 용선이 자기 옆에 있던 리모콘을 별이에게 던졌다. 완벽하게 받아든 별이를 보며 용선이 한번 더 미소를 흘려 보내고 이불을 덮고 누워 별이를 등졌다. 리모콘을 들고 꼼지락거리던 별이는 일어서서 방 불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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