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23화
똑똑-
용선이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안에는 방금 도착한 혜진이 스타일리스트의 손길을 받으며 매무새를 정리하고 있었다.
"앗, 감독님 오셨어요?"
"아니에요. 마저 일 보세요. 그냥 잠깐 들린 거예요."
용선을 발견한 혜진이 몸을 그쪽으로 틀려고 하니, 용선이 급히 손사래를 쳤다. 혜진은 다시 자리를 바로 앉았고 스타일리스트가 다시 혜진의 화장을 수정했다. 용선은 매니저에게 질문목록이 적힌 종이를 건네고 거울 너머로 자길 보고 있는 혜진을 쳐다보았다.
"감독님 오늘 진짜 예쁘신데요?"
"그런 칭찬은 좀 부끄러운데."
용선이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곧 혜진의 수정 화장이 끝나자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가 자리를 피해 주었다. 용선은 혜진이 앉아 있는 자리로 천천히 걸어왔다.
"드라마에 대한 얘기만 하고 싶은데... 못 그러겠죠?"
혜진이 자신의 옆에 선 용선을 살짝 올려다보며 말했다. 곧 있을 제작발표회는 온전히 새로운 드라마를 소개하고 홍보하는 자리였지만 바로 며칠 전, 연예뉴스를 가득 채웠던 혜진의 열애설 덕분에 기자들의 관심이 오로지 드라마로만 향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 까닭에 혜진의 소속사 대표는 제작발표회를 참여하지 않는 건 어떠냐는 제안도 했었다. 그러나 혜진은 진실이 아닌 말로 자리를 피하고는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당연하게 이 자리에 오기는 왔는데,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 지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괜찮겠죠...?"
걱정이 고스란히 담긴 혜진의 눈이 용선의 눈을 마주했다. 용선은 따뜻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괜찮아요. 여기가 드라마 제작발표회장이지 안혜진 기자회견장이 아니잖아요?"
용선의 말에 혜진도 용선처럼 씩 웃었다. 언제나처럼 말 한 마디, 눈빛 하나로 자길 안심시켜주는 용선이었다.
"이제 가야해요. 갈까요?"
시간을 확인한 용선이 혜진을 보며 물었다. 혜진은 고개를 끄덕이곤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크게 심호흡을 내쉬었다.
한편, 휘인을 맡아 안내해야 하는 별이는 휘인의 대기실 앞에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네- 라는 휘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별이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어? 용감독님 막내! 오랜만이에요."
휘인이 얼굴에 웃음을 띠며 별이를 반겼다.
"이제 이동하셔야 해서요."
"벌써 그렇게 됐나. 가요."
대기실의 문이 닫히고 나란히 선 두 사람이 복도를 걸어나갔다. 별이는 자기 눈높이 아래에 있는 휘인의 정수리를 보며 새삼 작은 휘인의 키를 실감했다.
"용선 언니랑은 잘 지내요?"
"네, 잘 지내요."
"으음. 진짜 잘 지내나보네."
용선의 얘기가 나오자 웃음꽃이 피며 바로 대답을 하는 별이를 보곤 휘인이 피식 웃었다. 여전히 별이는 거짓이 없는 사람이었다.
"용선 언니가 그렇게 좋아요?"
"네??"
훅 들어오는 휘인의 질문에 놀란 별이가 당황하며 더 나올 말도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용선 언니가 별이씨 얘기 참 많이해요."
휘인이 슬쩍 고개를 돌려 별이를 보았다. 휘인이 한 말의 뜻이 뭔지 알 수 없는 별이는 그저 부끄러운 얼굴로 휘인을 따라 걷고 있을 뿐이었다.
*
수많은 플래시가 터져나왔다. 눈을 떼기도 힘든 카메라 앞에서 편안한 미소까지 머금은 채 포즈를 취하고 있는 혜진은 사회자의 요구에 맞춰 포즈를 취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혼자서, 둘이서, 단체로 포토타임을 가진 <데칼코마니>를 대표하는 네 명의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인터뷰를 준비했다. 용선을 시작으로 휘인, 혜진, 지웅 순으로 자리를 앉자 그들의 앞에 마이크가 하나씩 놓여졌다. 시작은 익숙하고도 평범한 질문들이었다.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 용선과 휘인의 재회에 대한 이야기 등. 하지만 순조로운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오레오씨는 왜 제작발표회에 빠진거죠? 그래도 나름 서브 주연 아닌가요?"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안경을 쓴 여기자가 질문했다. 아마 이 질문을 시작으로 혜진과 레오에 대한 질문이 쏟아질 터였다. 질문을 가장한 공격에 앉아 있는 네 사람은 몸을 움찔했고, 용선은 금세 표정을 고치며 마이크를 잡았다.
"이 드라마에서 중요한 건 그 누구도 아닌 두 남녀 주인공입니다. 둘의 감정, 둘만의 추억, 둘만의 변화들이 드라마의 주된 내용이고, 작가님도 저도 그 부분을 가장 중점으로 두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자리 역시 두 주인공의 자리가 되어야겠죠."
용선이 마이크를 내려놓기 무섭게 수많은 손들이 올라왔다. 사회자는 당황한 눈치로 우물쭈물거리다 가까이에 있는 기자를 가리켰다.
"안혜진씨. 오레오씨와는 어떤 사이인가요?"
기어코 혜진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질문이 들어왔다. 혜진은 아무도 모르게 작게 숨을 내쉬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마이크를 잡으려 손을 뻗을 때, 바로 옆에 테이블 위로 올려진 휘인의 작은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 작은 손은 가득 힘이 들어가 주먹이 쥐어 있었다.
"공식기사로도 말씀드렸다시피 그저 동료 사이입니다. 이번 드라마로 처음 만나게 됐고, 그저 같은 배우 동료일 뿐이에요."
"오레오씨 측은 아직 아무 말이 없는데 이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혜진의 답변이 끝나기 무섭게 중간에 앉아 있던 기자가 질문을 했다. 질문권을 얻지 않고 바로 질문하는 행동에 사회자만 난감한 눈치였다.
"현재 레오씨가 소속사가 없는 것으로 알아요. 아무래도 그래서 대처가 늦어지는 게 아닐까 싶네요."
"그럼 사진-"
"질문은 손을 들고 해주시기 바랍니다."
질문을 했던 기자가 바로 다른 질문을 이어가려고 하니 재빨리 사회자가 말을 끊었다. 사회자의 말에 막힌 기자는 입맛을 다시며 재빨리 다시 손을 들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기자들의 눈이 혜진을 향했다. 많은 대중들 앞에 서고 기자들 앞에도 서봤지만 이런 자린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혜진의 손이 조금씩 떨렸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휘인의 꽉 쥔 주먹도 작은 떨림을 보이고 있었다.
"오레오씨 계약이 불발된 이유는 뭔가요?"
먹잇감을 문 맹수들은 인정사정 볼 것이 없었다. 정도를 모르는 질문과 사냥감을 찾는 눈빛들에 용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혜진은 깊게 숨을 들이 마시며 감정을 숨긴 채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천천히 왼 손으론 마이크를 입가로 올리고 한 손으론 여전히 테이블 위에서 꼭 쥐어진 휘인의 주먹을 살짝 잡았다. 휘인은 그 손길에 깜짝 놀라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계약 문제는 제가 말씀 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요. 죄송합니다."
혜진의 답변이 끝나고 용선이 사회자 쪽을 보았다. 용선이 넌지시 보내는 눈치를 사회자는 금세 알아 들은 모양인지 서둘러 마이크를 잡아 들었다.
"지금부터 질문은 드라마와 관련된 질문만 받겠습니다. 기자님들도 사적인 질문은 삼가주시길 바라고, 혹시라도 드라마 외의 질문이 나오면 죄송하지만 저희 측에서 자르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에 수두룩하게 들렸던 기자들의 손이 슬슬 내려왔다. 이걸로 불편했던 상황은 마무리 되는 것 같았다. 작은 숨을 내뱉은 혜진은 휘인을 잡았던 손을 놓고 테이블 아래로 떨어트렸다.
다행히 이후로 혜진의 열애설과 관련된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평범한 드라마 제작발표회장으로 돌아온 분위기에 혜진도 조금 더 편안한 표정이 되어 질문들을 대답해 나갔다.
"작가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작가님은 항상 경험이 아닌 상상에 의존해 작품을 쓰신다고 하셨는데 이번에도 상상에서 나온 작품인가요?"
기자의 질문에 휘인이 앞에 놓인 마이크를 들었다. 그리곤 민망한지 얼굴을 살살 긁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이번 작품은 제 경험이 많이 담겨 있는 작품이에요. 한 때 사랑했던 모습을 처음으로 담아봤습니다."
휘인의 대답은 용선과 혜진에게도 뜻밖이었다. 경험을 담은 작품을 써오지도 않았던 데다가 이번 작품을 하면서 그런 티를 하나도 내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제목 '데칼코마니'가 뜻하는 게 작품 속 주인공인 지연과 현수를 뜻하기도 하지만 지연이에게 제 모습을 찍어낸 것이기도 해요. 이기적이게도 지연이가 제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래봤습니다."
휘인이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어느새 질문은 남자 주인공 지웅에게로 향했고 휘인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물병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멍한 얼굴로 앉아 있는 건 휘인 뿐만이 아니었다. 휘인의 바로 옆에 앉은 혜진 역시 멍한 얼굴이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가졌던 제작발표회는 큰 탈 없이 마무리 되었다. 수많은 기자들을 뒤로 하고 용선과 휘인, 혜진, 지웅이 회장을 빠져나왔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소음이 가득한 회장의 문이 닫히자 고요한 공기가 그들을 감쌌다.
"수고했어요."
용선이 빙긋 웃으며 셋에게 인사를 건넸다. 싱긋 웃고 있는 지웅과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는 혜진, 무표정한 휘인이 용선을 보며 그 인사에 답했다.
"수고하셨어요. 혜진씨도 정말 고생 많았어요."
지웅이 눈썹을 구부리며 혜진을 보았다. 혜진은 괜찮다며 반응했고 여전히 휘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었다.
"그럼 이따 회식 자리에서 다시 얘기 나누는 걸로 하고, 저 먼저 가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수고하셨어요, 지웅씨."
스케줄이 있는 지웅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용선에게 말했다. 용선은 어서 가라는 손짓을 보였고 지웅은 용선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서둘러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럼 감독님 저도 가볼께요. 저도 스케줄이 있어서."
지웅이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혜진이 말했다. 혜진의 스케줄 역시 알고 있던 사실이라 용선은 그저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다.
"오늘 정말 잘했어요. 이따 봐요."
용선이 혜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혜진은 고개를 끄덕이곤 휘인 쪽을 보려다가 바로 눈을 돌렸다.
"이따 뵐게요."
혜진마저 떠나고나니 용선과 휘인 사이는 정말 고요했다. 용선은 대충 휘인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걸었고 휘인도 별말없이 용선의 뒤를 따랐다.
"처음이네."
"......뭐가."
천천히 걸으며 용선이 말을 뗐다. 깊게 잠긴 휘인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이런 작품도. 그렇게 말한 너도."
휘인은 달리 말을 더 하지 않았다. 용선도 더이상 말을 하지도, 묻지도 않으며 두 사람은 그렇게 묵묵히 조용히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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