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24화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 앉은 저녁. 식당으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별이는 오랜만에 만나는 <데칼코마니>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보며 반가운 인사를 나누곤 자리를 안내했다. 오늘은 정식으로 갖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데칼코마니> 팀의 전체 뒤풀이 날이었다. 촬영이 끝나고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하루 대부분을 함께 보냈던 사람들을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은 꽤나 큰지 모두들 얼굴이 활짝 피어있었다.
"영수 형님은 촬영 들어갔다더니 못 오신대요?"
"촬영 끝나고 넘어온다고 했어. 뭐 온다고는 했는데 우리 다 먹을 때 쯤이나 올 것 같아."
"기사님! 잘 지내셨어요?"
"이야. 막내! 촬영장에선 폐인이더니 오늘 보니까 배우가 따로 없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촬영이 끝나고 바로 갖는 자리가 아니라 개인 일정으로 못 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아쉬움을 영상통화로 달래기도 하며 사람들은 지금을 만끽했다. 오기로 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식당을 가득 채우자 식당 앞에서 사람들을 안내 하고 있던 별이에게 수영이 다가왔다.
"별아. 너도 이제 들어가서 먹어."
"선배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감독님 오면 들어가려고요."
함께 안내를 도왔던 수영마저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혼자가 된 별이는 가게에서 조금 더 떨어져 주위를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용선의 차가 식당 근처 주차장으로 들어왔고 그와 동시에 식당 앞으로 벤이 연달아 등장했다. 용선의 차에선 용선과 휘인이 내렸고 벤에선 드라마의 주인공인 혜진과 지웅이 내렸다. 드라마의 중심 인물들이 등장하자 식당에 앉은 사람들은 벌써부터 환호성을 지르며 그들을 반겼다.
"주인공들 오십니다!!"
식당 가까이로 네 사람이 모이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어나 박수를 쳤다. 민망한지 어색한 표정을 짓는 용선이나 휘인과는 다르게 이 상황이 익숙한 혜진과 지웅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그 인사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혜진과 지웅에게 먼저 꾸벅 인사를 한 별이는 쪼르르 용선이 있는 쪽으로 가 휘인에게도 재빨리 인사를 건넸다. 그리곤 용선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선배. 들어가요!"
혜진과 지웅은 수영의 안내를 받으며 식당 안으로 발을 들였고 용선과 휘인은 별이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가장 늦게 도착한 인물들이다보니 네 사람은 같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얼떨결에 마주 앉은 휘인과 혜진은 바로 앞에 있는 서로를 쳐다보지 못한 채 주변으로만 눈을 돌리고 있었다.
"막내. 여기 앉을래요?"
용선의 옆에 어색하게 앉아 있던 휘인은 자기 뒤로 지나가는 별이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별이는 휘인의 말이 의문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꿈뻑거렸다.
"아니에요. 작가님 앉으세요."
"여기 완전 좋은 자린데."
"어... 제 자리도 좋은 것 같아요. 저기거든요."
별이가 해죽 웃으며 용선의 또 다른 옆자리를 가리켰다. 휘인은 작은 탄식을 내며 별이를 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돌려 바로 앉았다.
"작가님. 저 진~짜 작가님 뵙고 싶었어요. 아까 제작발표회에선 바빠서 인사도 제대로 못드려서 아쉬웠는데... 제가 오늘 여기 온 가장 큰 이유에요."
지웅이 들뜬 목소리로 휘인에게 말했다. 휘인은 부끄러운 듯 웃으며 앞에 있는 물을 홀짝였다.
"작가님. 근데 진짜 드라마 작가님 얘기에요?"
"어... 네..."
"진짜요? 와... 그럼 작가님도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적이 있는 거예요?"
"뭐... 그런 셈이죠."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며 휘인이 고개를 돌렸다.
"근데 지연이 어디가 작가님이랑 닮은 거예요?"
고개를 돌렸던 휘인이 갑자기 들려오는 혜진의 목소리에 휙, 고개를 바로했다. 자길 빤히 바라보고 있는 혜진을 보며 휘인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혜진의 눈을 마주하며 입을 뗐다.
"사랑하는 사람을 놓친 거요."
"왜 놓쳤는데요?"
"...몰라서요."
"뭐를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지를."
"근데 지연인 결국 현수를 다시 잡았잖아요."
두 사람 사이 오고 가는 말에 지웅도 용선도 입을 다물었다. 지웅은 대화의 뜻을 알 수 없으니 어색하게 웃다가 옆 자리에 앉은 다른 배우가 말을 걸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혜진은 여전히 휘인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벌어졌던 휘인의 입은 더 이상 어떤 말도 못하고 작은 떨림을 보였다. 그리고 닫힌 입. 휘인은 다시 입술을 물으며 고개를 숙였다.
*
시간이 지나 음식과 술이 들어간 사람들의 목소리는 커져 갔다. 분위기는 점점 정신이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벌써 취해 목청을 높이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언니 나 화장실 좀."
용선과 함께 술을 깰 겸 밖으로 나갔던 휘인이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용선은 하품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굳게 닫힌 화장실 앞으로 걸어갔다. 졸린지 눈을 깜빡이며 용선이 벽으로 등을 기댔다. 휘인 역시 벽에 기대 닫혀있는 문이 열리길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아 졸리다."
"언니는 이제 그만 마셔. 취하면 나 안 데려다 줄꺼야."
"누가 데려다 달랬냐. 니가 자발적으로 데려다 줬으면서."
"하긴. 이제 나 아니어도 데려다 줄 사람 있지."
"누가 날 데려다줘."
"누구긴 누구야. 언니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있는 꼬맹이지."
"...... 꼬맹이가 누구 보고 꼬맹이래."
용선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휘인은 다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얼마 있지 않아 닫혀 있던 문이 딸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온 혜진은 앞에 있던 휘인과 눈을 마주치곤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긴 것 같지만 결코 길지 않은 시간동안 휘인을 바라봤던 혜진은 서둘러 용선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리곤 재빠르게 두 사람 앞을 지나쳤다. 휘인은 자신을 지나친 혜진 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가만히 열린 문만 응시하고 있었다.
"휘인아."
옆에서 가만히 서있는 휘인을 보고 있던 용선이 차분한 목소리로 휘인을 불렀다. 휘인은 대답없이 고개를 돌려 용선을 보았다.
"니가 그냥 보고만 있던 그 문 말이야."
용선이 벽에 기댔던 몸을 떼고 바로 섰다. 자길 바라보고 있는 휘인을 보며 용선은 뒤이어 말을 이었다.
"그거 아직 안 잠겼더라."
휘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용선은 멍하니 서있는 휘인의 등을 밀어 화장실 안으로 넣었다.
*
"선배~ 아이스크림 사주세요!"
"갑자기 무슨 아이스크림이야."
텅 빈 테이블에 앉아 있던 용선에게 별이가 매달렸다. 주변의 즐거운 분위기를 타고 있는 별이는 계속 헤실거리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먹고싶어요오..."
"애도 아니고... 따라와."
틱틱거리던 용선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이는 신나하며 용선의 뒤를 따랐다. 둘은 식당 맞은 편에 있는 편의점으로 길을 건넜다. 편의점에 도착하자 별이는 냉장고에 얼굴을 파묻을 기세로 아이스크림을 고르기 시작했다.
"오! 이거 새로 나왔나봐요! 선배 뭐 먹을 거예요?"
"나는 이ㄱ..."
"선배 이거 먹어요!"
별이가 자기 앞에 있던 냉장고에서 콘 아이스크림 하나를 번쩍 꺼내 들었다. 다른 스틱 아이스크림을 고를 생각이었던 용선은 다짜고짜 내미는 아이스크림을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난 이거 먹어야지. 새로 나온 거."
계산을 마친 두 사람은 편의점 쓰레기통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깠다. 어린 아이처럼 아이스크림 하나로 신나하는 별이를 보며 용선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선배. 이거 드셔보실래요?"
"아냐. 괜찮아."
한 입도 대지 않은 새 아이스크림을 용선에게 내미는 별이였다. 용선의 거부에 별이는 아쉬운 지 입을 살짝 삐죽이며 아이스크림을 입 안으로 넣었다.
"먹어볼래?"
가만히 그런 별이를 보고 있던 용선이 자기 아이스크림을 별이쪽으로 슬쩍 내밀었다. 금세 반짝이는 눈이 된 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용선의 아이스크림을 한 입 앙- 물었다.
"어, 맛있네. 근데 제꺼가 더 맛있어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손에 든 둘은 편의점을 나와 그 앞 테라스에 앉았다. 맞은편에 보이는 식당은 여전히 북적거리고 있었다.
"많이 마셨어?"
"아니요. 오늘은 많이 마시면 안 돼요."
"왜? 내일 쉬잖아."
"망치면 안 되거든요."
"뭘? 뭐 할 일 있어?"
"네."
무슨 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용선은 더 묻지 않았다. 더 이상 관심이 없는 듯 용선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도로를 지나가는 차들을 쳐다보았다.
"선배. 저 진짜 선배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있었는데요."
"뭐?"
"선배가 드라마 하는 이유요."
"말해줬잖아. 드라마가 좋아서 한다고."
"그니까요. 왜 좋은 지는 안 말해줬잖아요."
용선이 입술에 닿아있던 아이스크림을 살짝 떼었다. 입 안에 있던 아이스크림은 순식간에 녹아 없어지고 입 안에는 단 맛만 남아 있었다.
솔직히 말해줘도 될까. 너한테. 용선은 먼 허공을 응시했다.
"실망할껄."
"네?"
"말하면 너 실망할 지도 몰라."
꿈과 열정으로 가득찬 별이와 자신은 달랐다. 용선은 긴 시간 드라마를 하며 바뀐 저를 알고 있었다. 드라마를 사랑하는 별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될까.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에 용선은 별이를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듣고 싶어요."
"나한테 실망하려고?"
"실망하면 어때요. 다시 좋아할건데."
별이가 씩 웃음을 지었다.
"드라마라서 좋아해."
허공을 응시하던 용선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이 눈이 마주치고, 용선은 다시 입을 뗐다.
"현실이 아니니까."
별이는 어떤 표정 변화도 없었다. 아직은 용선이 말한 말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도망가고 싶어서."
나지막이 들리는 용선의 마지막 말에 달라붙어 있던 별이의 입술이 뜨였다. 용선은 쓸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용선도 별이처럼 드라마 자체를 사랑한 적이 있었다. 삶이 드라마였고 드라마가 삶이였다. 그러나 용선이 살아보니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었다. 용선의 삶은 드라마와 달랐다. 어느 순간부터 용선에게 드라마란 현실의 도피처가 되어 있었다. 운명 같은 우연도, 기적 같은 기회도 찾기 힘들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드라마는 해피엔딩이 정해져 있었지만 삶은 달랐다.
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밤 공기를 맞으며 용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보다 살짝 녹아있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으며 용선이 별이를 내려다봤다.
"이제 가자."
별이는 옅은 미소를 띤 채 자길 내려다보는 용선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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