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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22

[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22화

 

 

 

 

"죄송해요. 저 때문에..."

 

 

한강이 잘 보이는 큰 창 옆에 놓인 테이블에 마주 앉은 두 사람. 혜진은 말끝을 흐리며 잡고 있는 와인잔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미소를 머금었지만 안쓰럽기 그지 없는 혜진의 모습에 용선은 괜히 입에도 안 맞는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물었다.

 

 

"드라마에 정말 피해주고 싶지 않았는데..."

"아니에요."

 

 

입 안에서 천천히 와인을 굴리던 용선이 와인을 넘기고 가볍게 웃었다.

 

 

"혜진씨가 피해준 거 하나도 없어요. 혜진씨 잘못도 없고, 혜진씨가 사과할 일도 아니에요." 

 

 

용선이 두 팔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그리고 조금 더 가깝게 몸을 숙여 혜진을 보았다. 혜진은 자길 바라보는 용선의 눈빛에서 진심과 따뜻함을 느꼈다.

 

 

"감독님 말은 뭔가... 항상 믿음이 가요."

"믿음이요?"

"네. 감독님이 괜찮다고 말하면 정말 괜찮은 거 같고, 좋다고 그러면 정말 좋은 거 같고."

 

 

혜진의 말에 살짝 부끄러워진 용선이 허리를 폈다. 용선은 접시에 놓인 샤인머스켓 하나를 입 안으로 넣었다.

 

 

"계약이 불발됐다고 그걸 이렇게 터트릴 지는 몰랐네요."

 

 

혜진은 차분하게 레오와 있었던 일을 용선에게 얘기해주었다. 매니저끼리의 인연과 소속사 대표와의 자리. 결국엔 불발된 레오의 계약. 레오와는 그저 같이 드라마를 했던 동료 배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상황에서 사진 한 장과 기자들의 소설로 이루어진 커져버린 결과.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고, 작은 눈송이 하나가 사람을 짓누를 큰 눈덩이가 되는 건 이 업계에선 너무나 쉽게 볼 수 있는 일이었다.

 

 

"혜진씨도 참 힘들었겠다. 루머 속에서 오르 내리는 거, 그거 진짜 힘들던데."

 

 

방송국에서 자기를 보며 수군거리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용선이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서로를 공감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를 하며 용선과 혜진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훌쩍 지나간 시간만큼 테이블 위에 올려진 와인은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김감독님, 휘인이랑 되게 비슷한 거 같아요."

 

 

술이 꽤 들어가서 한껏 풀어진 표정이 된 혜진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휘인이란 이름이 아무렇지 않게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혜진이 취해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저랑 휘인이요? 어디가...?"

 

 

술이 들어가 빨개진 얼굴이 된 용선이 눈을 크게 뜨고 혜진을 쳐다보았다.

 

 

"말하는 거나 성격이나... 많이 닮은 거 같아요."

 

 

휘인을 생각하는 듯 혜진의 눈이 순간 추억에 잠겼다. 빈 와인잔 입구를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며 혜진이 아련한 미소를 띠었다. 용선은 분위기가 달라진 혜진을 보며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던 혜진이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감독님이나 휘인이나 절대 먼저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잖아요. 그냥 문이 열리길 가만히 기다리죠. 그래도 감독님은 문을 두드리기라도 하는데, 휘인이는 문을 두드리지도 않아요. 그냥 조용히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기만 해요. 언제 열릴 지도 모르면서 가만히... 혼자... 계속."

 

 

혜진이 말하는 자신과 휘인의 차이를 알아 들은 용선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근데 안에 있는 사람도 생각해줘야 되는 거 아니에요? 문도 두드리지 않고 인기척도 안 내면 밖에 누가 있는지 어떻게 알아요. 밖에 누가 기다리고 있다고 알아야 나도 문을 열 거 아니에요."

 

 

휘인에 대한 작은 불만이 담겨있는 말이었다. 혜진은 순간 욱하며 이야길 내뱉었단 사실을 뒤늦게 인지하고 힘이 들어가 있던 미간을 풀었다.

 

 

"그러니까 감독님이 훨씬 낫다구요."

 

 

표정을 푼 혜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용선 역시 그 웃음에 따라 웃었다.

 

 

"제가 더 낫긴 하죠."

"아... 바로 인정하실 지는 몰랐는데."

"아니에요?"

"아, 아뇨. 지금도 정휘인보다 100배는 더 좋았어요."

 

 

부드럽게 분위기를 풀어가는 용선의 말에 혜진이 편하게 웃음을 보였다.

 

 

"근데 저도 이런 제가 답답해요."

 

 

웃던 용선의 눈꼬리가 쳐졌다.

 

 

"그러니까, 우리도 많이 답답하다구요."

 

 

용선이 혜진의 눈을 마주쳤다. '우리'라는 단어 속에 담긴 또 다른 사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온갖 생각이 다 들거든요. 무섭고 외롭고 힘들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저는 그렇거든요. 문을 못 여는게... 사실 너무 무서워서 그런 거예요. 함부로 열었다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놀라 도망가 버릴까봐."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쳐진 눈꼬리는 용선의 복잡한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용선은 조금 남은 마지막 와인을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감독님 혹시 지금 만나는 사람 있어요?"

"만나는 사람...?"

 

 

혜진의 질문에 다른 생각 할 틈도 없이 한 사람의 얼굴이 용선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용선은 혜진의 눈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요?"

"어... 잘은 모르겠는데..."

 

 

여전히 용선의 머릿속에서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있는 한 사람. 밝게 웃으며 천진난만한 얼굴로 자길 쳐다보는 문별이. 어색하지만 따뜻한 손길로 제 손을 잡아오던 문별이. 당신이 내가 생각하는 드라마라고 말하던 문별이... 작게 요동치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용선이 말을 이었다.

 

 

"그런 것 같아요."

 

 

술기운에 달아오른 볼이 더더욱 열기를 뿜었다. 지금껏 보던 당당하고 카리스마 있던 모습이 아닌 부끄러워하는 용선을 처음 본 혜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정말요? 와, 그분 좋겠다. 감독님이 진짜 좋아하는 것 같은데."

"네? 아, 아니에요...!!"

 

 

용선이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그 모습이 꽤 귀여운지 혜진은 풋-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감독님, 휘인이보다 낫다고 하긴 했지만."

 

 

더위를 느낀 용선이 손부채질을 하며 말을 하고 있는 혜진을 곁눈질로 보았다.

 

 

"가끔은 용기내서 먼저 문 열어보세요. 그 분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용선은 동그란 눈을 깜빡깜빡거리며 고개를 바로해 혜진을 바라보았다. 붉은 용선의 얼굴이 자신을 마주하자 혜진은 얼굴을 찡긋 구기며 장난스럽게 말을 뱉었다.

 

 

"감독님도 사실 답답하긴 하거든요."

 

 

할 말을 잃은 용선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

 

 

 

 

오후에 잡힌 제작발표회 일정으로 분주한 용선과 별이. 공식석상에 서는 날이었기에 용선은 오랜만에 깔끔한 캐주얼 정장 차림으로 출근을 했다. 정돈된 머리와 가벼운 메이크업으로 평상시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용선 덕분에 별이만 계속 주체할 수 없는 설렘에 심장을 부여잡았다.

 

 

"보고 싶으면 대놓고 보지 그래?"

"네?!"

 

 

사무실에서 용선을 도와 일을 하고 있던 별이가 파들짝 놀라며 반응했다. 용선은 자기가 출근한 이후로 제 일에 집중을 못하고 힐끔 거리는 별이를 금방 알아채고 있었다.

 

 

"너 나 자꾸 힐끔힐끔 봤잖아."

"아......"

 

 

별이의 얼굴이 급속도로 빨갛게 물들었다. 용선은 피식 웃으며 책상 위에 놓인 프린트물을 정리했다.

 

 

"응? 뭐해?"

"보고싶으면 보라면서요."

 

 

장난을 담았던 용선의 말을 별이가 곧이 곧대로 듣고 실행했다. 일하던 걸 모두 놔버리고 대놓고 가만히 앉아 용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별이. 오히려 별이가 그렇게 나오니 용선이 부끄러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렇, 그렇다고 일도 안 하고 그러면... 안 되지."

"아... 그쵸..."

 

 

그제야 돌아간 별이의 시선에 용선이 티나지 않게 작은 숨을 내쉬었다.

 

 

"미치겠다."

"미치면 안 되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별이의 목소리를 들은 용선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별이는 슬쩍 고개를 돌려 용선 쪽을 바라보았다. 용선은 어질러진 책상을 정돈하고 있었다. 선배 때문이잖아요-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말을 삼키며 별이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

 

 

 

방송국 안에 있는 제작발표회장으로 향한 용선은 먼저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휘인을 찾았다. 넓은 대기실에서 혼자 폰을 하며 놀고 있던 휘인이 용선을 보자 반가운지 얼굴을 환히 폈다.

 

 

"이열~ 김감독님~ 오늘 좀 멋집니다?"

"네에 감사합니다. 근데 정휘인 작가님 못 보셨나요? 되게 작고 귀여운 강아지처럼 생겼는데."

"아 진짜!"

 

 

용선의 장난에 휘인이 확 인상을 쓰며 목청을 높였다. 용선이 오늘 평상시와 다른 모습으로 꾸민 만큼 휘인도 마찬가지였다. 휘인의 반응에 용선은 쿡쿡 웃으며 휘인의 옆으로 갔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김용선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야."

 

 

용선이 눈에 힘을 주고 휘인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힘을 풀고 가져온 프린트물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기자들이 물을 질문들. 이건 꼭 나올 거니까 대충 생각해둬."

"네에."

 

 

종이엔 기자들이 자발적으로 물어볼 질문 외에 방송국 측에서 드라마 홍보를 위해 뽑은 질문들이 적혀있었다. 그런 질문이야 뻔한 내용들이라 휘인은 대충 흘겨만 보고 눈길을 거뒀다.

 

 

"그럼 난 바쁜 몸이라 이만 간다. 이따 막내가 나오라 그러면 나오면 돼."

"가는거야? 심심한데. 언니네 막내 그냥 지금 보내주면 안 돼?"

"뭔 소리야."

"걔랑 노는 거 재밌는데."

"안 돼."

"질투하는거야?"

"뭐, 뭐, 내가 왜 질투를 하는데?"

 

 

티나요, 티나 감독님아- 휘인이 킥킥 웃었다. 용선은 달아오른 열을 숨기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간다. 이따 봐."

"네에~"

 

 

쟤는 무슨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용선이 휘인의 대기실을 나오자 복도에 있던 별이가 발견하곤 종종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악!! 아이씨, 깜짝이야!!"

"어...어... 죄송해요... 놀래키려던건 아니었는데..."

 

 

몸을 붕 뜰만큼 크게 놀라는 용선을 보며 별이가 당황한 눈동자로 용선을 쳐다보았다.

 

 

"너, 너는, 그러게 왜 갑자기, 나타나."

"아니... 방금 안혜진 배우 도착해서... 알려주려고..."

 

 

괜히 민망해진 용선이 큼큼 헛기침을 하며 한껏 달아오른 열을 식혔다. 반면 갑자기 놀라 얼굴이 빨갛게 물든 용선을 보며 별이는 미안한 마음으로 자길 탓하고 있었다.

 

 

"알았어. 나 그쪽으로 가있을테니까 이따 시작할 때 작가님 모시고 나와."

"네."

 

 

대화를 마친 용선이 별이를 지나쳐 걸었다. 별이는 자길 지나쳐 멀어지는 용선의 뒷모습을 보다 급히 소리쳤다.

 

 

"선배!"

 

 

걷던 용선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별이는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미안한 눈으로 용선을 보고 있었다.

 

 

"놀래켜서 죄송해요."

"... 아니야."

 

 

용선이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러나 걸음을 떼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는 용선을 보며 별이도 가만히 서서 용선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휙- 갑자기 용선이 다시 몸을 돌려 별이를 쳐다보았다.

 

 

"아니, 너 때문이야. 그러니까 너, 이따가 나 좀 봐."

 

 

별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뱉은 용선은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뗐다. 점점 멀어지는 용선의 모습을 보며 별이는 걱정과 공포심으로 작게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 또 잘못했어? 나 또 혼나? 아... 별이는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