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20화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1층까지 오는 내내 용선과 별이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껏 어두워진 별이와 그런 별이를 살피는 용선. 아직 출근 시간도 되지 않은 이른 아침의 로비는 조용하고 텅 비어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용선은 별이의 표정을 살피다 조심스럽게 먼저 말을 꺼냈다.
"내 차 타고 갈거지?"
우중충하게 바닥으로 곤두박질 쳐있던 별이의 고개가 들렸다. 별이의 표정은 너무나도 슬프고 안쓰러워 보여서 용선은 저 아이를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미안해요."
다시 들려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사과의 말. 용선은 가만히 서서 별이가 다음 말을 하길 기다렸다.
"의심 했어요."
별이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용선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듣고 며칠동안 사라지지 않고 별이를 채웠던 의심.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도 자꾸만 고개를 내밀던 의심. 별이는 자기가 용선에게 그런 의심을 가졌다는 것이 정말 미안했고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존경한다면서, 좋아한다면서. 그런 사람을 그저 들려오는 말 하나로 의심했으니까. 그리고 그랬단 사실을 밝히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내가 당신을 의심했다는건 내가 당신을 믿지 않았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으니까.
"사람들이 떠드는 말... 아닐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의문이 들었어요. 진짜일까. 정말 그랬을까. 정말 선배가 그런 사람일까."
용선은 힘겹게 한 글자 한 글자 내뱉고 있는 별이를 차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좋아한다면서... 나는... 좋아한다는 사람을 그렇게 의심한 거예요."
스스로를 자책하는 별이의 얼굴은 괴로워보였다. 별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얗게 핏기가 가신 입술은 별이가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 지를 보여주었다. 이 모든 말들을 내뱉으며 별이는 자기 자신에게 엄청난 화가 밀려왔다. 솔직하게 말을 하면 할수록 여태 아니라고 외면했던 사실들이 별이를 아프게 찔렀다. 좋아하는 사람을 함부로 의심했다는, 그런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기어코 밀어내려 했었던 사실들.
"지금은 어떤데?"
차분한 용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에 화장실 앞에서 우뚝 멈춰선 별이를 보던 날, 용선은 별이가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걸 그때 이미 알아차렸다. 그 날 그 모습을 보고서야 그간 별이의 태도가 달라진 걸 이해할 수 있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와 아니라고 말하는 속의 외침이 서로 부딪히고 있느라 그랬다는 걸.
"지금도 의심하고 있어?"
별이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용선이 달라진 별이의 태도를 이해하게 된 그 날은 별이가 용선에 대한 의심을 모두 지운 날이었다. 사람도 말도 함부로 믿으면 안 돼- 그렇게 말하던 용선의 모습은 여태껏 별이가 봐왔던 용선의 모습 중 가장 여리게 보였다. 항상 강하고 흔들림 없던 사람이 그 순간만은 이상하게 너무나도 약해보였다. 모두가 등돌린 인파 속에 혼자 외롭게 서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제서야 별이는 깨달았다. 나도 저 사람을 혼자 두고 등을 돌리고 있었구나- 그걸 깨닫는 순간 자기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웠고 화가났었다.
"그럼 됐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용선이 웃었다. 결국 별이는 참아왔던 눈물을 한 방울 떨어트렸다.
"왜 니가 항상 그런 표정을 짓는거야..."
와르르 무너져 내린 별이를 보며 용선이 아프고도 슬픈 얼굴을 하고 천천히 다가갔다.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아서 그런 거 잖아. 넌 잘못 없어."
용선이 별이를 품에 안았다. 별이를 외로운 싸움에 던진 건 자기 잘못이라고, 용선은 그렇게 생각했다. 남들이 자기에 대해 뭐라고 떠들어도, 그게 너무나 아픈 말이고 사실이 아닌 말일지라도. 지금까진 용선 혼자만 참으면 됐다. 자기만 아프면 됐었다. 그래서 아무 말 하지 않고 혼자 견뎌왔다. 나만 아니면 되니까. 나만 힘들면 되니까. 그런데 이젠 아니었다. 자기만큼 아픈 사람이 있었다. 나만큼 힘든 사람이 있었다. 나와 같은 표정을 짓고 같이 견디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묻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선배는... 잘못 없어요."
그리고 그 모든 잘못이 내가 아니라 자기한테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안겨있던 별이의 팔이 용선을 감쌌다. 별이를 위로하기 위해 안은 거였는데, 이젠 용선이 별이에게 위로 받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꽤 오랫동안 서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
가로등 불이 하나씩 들어오고 있는 초저녁. 며칠간 침대와 딱 붙어 살고 있는 휘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에서 깬 휘인은 눈을 비비며 제일 먼저 베개 옆에 놓여져 있던 폰을 들었다.
[반찬 사왔어. 밥 잘 챙겨 먹어]
한 시간 전에 용선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휘인은 폰을 주머니에 넣고 방을 빠져 나갔다.
덜컹- 냉장고 문이 묵직하게 열렸다. 원래 휘인의 냉장고 안에 있는 음식이라곤 반 밖에 안 남아 있는 2L짜리 물과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뿐이었다. 반찬을 채워놨다는 메시지대로 냉장고엔 김치부터 장조림, 멸치 등의 마른 반찬을 비롯해 30개의 달걀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거기다 반찬 통 안에 먹기 좋게 잘라놓은 과일을 보며 휘인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휘인은 통 안에서 잘라 놓은 사과 한 조각을 꺼내들고 베란다로 천천히 걸었다.
"크게도 잘랐네."
4분의 1 크기로 큼직하게도 잘라놓은 사과를 베어 물며 휘인이 베란다 문을 열었다. 서늘한 바람이 휘인을 스치고 집 안을 채웠다.
[고마워]
한 손으로 용선에게 답장을 보내주고 난간에 기댄 휘인이 사과를 우물거리며 바깥을 둘러보았다.
"어?"
안혜진? 휘인이 재빠르게 눈을 비볐다. 눈을 크게 뜨고 깜빡깜빡해보지만, 휘인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여자는 택시를 타고 사라진 상태였다. 정체 모를 여자가 사라진 빈 도로를 보며 휘인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걔가 여기 있을 리가 없지-
"아프니까 이제 헛것도 다 보이네."
크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휘인은 남은 사과 조각을 입 안에 던져 넣고 아쉬운 지 텅 비어있는 도로를 한 번 슬쩍 쳐다보곤 베란다 문을 닫았다.
*
항상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용선과 기훈이 가졌던 기싸움은 어느새 방송국 사람들이 모두 속닥거리는 이야깃거리가 되어 있었다. 용선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을 보며 용선은 괜한 짓을 했나 하는 생각 마저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문은 편집실에 박혀 있는 용선보다 별이의 귀에 더 많이 들렸다.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보며 별이는 이렇게 사람들이 남말하기 좋아한다는 걸 몸소 깨달을 지경이였다.
"별아. 밥 먹으러 가자. 선배 오시라 그래."
점심시간이 되어 수영이 별이에게 고개를 내밀었다. 촬영이 끝난 수영의 몰골은 굉장히 깔끔해져 있는 상태였다. 고개를 끄덕인 별이는 편집을 하고 있을 용선을 찾아 편집실로 올라갔다.
똑똑-
조심스럽게 편집실 문을 여니 언제나처럼 편집에 집중하고 있는 용선의 뒷모습이 보였다. 별이는 괜히 헛기침을 내며 인기척을 내었다. 그러자 용선의 옆에 있던 편집기사가 먼저 별이를 발견하곤 인사말을 건넸다.
"점심... 안 드세요?"
용선의 눈도 쳐다보지 못한 채 별이가 물었다. 용선과 편집기사는 시간을 확인하곤 점심 먹고 작업하자는 말을 남기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집기사가 먼저 편집실을 빠져나가고 남아 있는 용선이 별이를 슬쩍 쳐다보았다. 용선과 별이 사이엔 처음 보는 어색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가졌던 어색한 기운도 아니고, 별이가 용선을 의심하며 방황하고 있을 때 가졌던 어색한 기운도 아니었다. 그 어색한 기운은 서로의 눈을 마주보는 순간 더 강렬하게 피어 올랐다. 그 강렬함은 가끔씩 두 사람의 얼굴을 빨갛게 데우기도 했다.
편집실을 나온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둘 다 어색한 모양인지 몸을 한 시도 가만히 두지 못했다.
"수영선배가 앞에 분식집 자리 잡아 놓고 있겠대요."
이 어색한 공기를 깨게 해줄 화제가 생겼다. 별이는 기쁜 마음으로 수영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뱉어 놓고 나니 또 다시 할 말이 사라졌다. 다시 무거운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채우려는 때에 별이가 다시 말을 꺼냈다.
"떡볶이 시켜 놓으라고 할까요?"
"어? 어... 그래."
또 말이 끊겼다. 도대체 평상시에 어떻게 말을 이어가고 살았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한 층씩 멈춰서며 사람을 태워주는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1층에 가까울수록 높아지는 인구 밀도에 두 사람의 거리도 조금씩 가까워졌다. 이젠 어깨가 꼭 붙은 채 서있는 두 사람은 서로의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채 더운 숨을 내쉬고 있었다.
띵동- 1층에 도착하니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빠져나갔다. 용선과 별이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엘리베이터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둘이 있는 것에 비하면 점심시간을 맞은 수많은 사람들 속에 있는 게 훨씬 나았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용선과 별이는 수영이 기다리고 있는 분식집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저기 별아."
하필이면 또 횡단보도에 가로 막혀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순간,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용선이 별이를 불렀다.
"네?"
아, 너무 부자연스럽게 대답한 거 같아- 이미 뱉어버린 말과 행동 후에 몰려오는 후회. 별이는 속으로 자신의 모습을 꾸짖었다.
"그... 나 이번 주말에 여유 좀 있을 거 같은데."
이건 분명 해가 뜨거워서 더운거야- 용선이 괜히 별이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용선의 말을 천천히 되새기던 별이는 곧 용선의 말 뜻을 알아차리곤 살짝 열오른 볼이 되어 씰룩거리는 입가를 제어했다. 하지만 점차 퍼져나가는 미소는 숨기기가 쉽지 않았다.
"혹시 보고 싶은 영화 있어요?"
"아니 딱히..."
"그럼 제가 재밌는 걸로 예매할게요."
"그러든지..."
처음 보는 용선의 모습이었다. 부끄러워하는 용선을 보는 순간 별이는 이미 표정 관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입꼬리가 귀에 걸려 소리만 안 낼 뿐 좋아라 웃고 있는 별이를 발견한 용선은 괜히 부끄러워 시비를 걸었다.
"너 왜 웃냐."
"네? 저요?"
"바보 같이 길에서 실실 쪼개지마."
"쪼개다니... 말 예쁘게 해야죠."
"니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마땅한 사람?"
"어?"
시비를 건 사람은 용선인데 당황한 사람 역시 용선이 되어버렸다.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진 용선을 보던 별이는 초록 불로 바뀐 신호등을 보고 용선의 손목을 잡았다. 갑자기 잡아오는 손길에 놀란 용선이 동그란 눈으로 별이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실실 웃고 있는 별이는 부드럽게 용선을 끌었다.
"초록불. 안 가요?"
"어? 어, 가야지."
어느새 자연스럽게 내려온 별이의 손은 용선의 손을 잡고 있었다. 붙잡힌 손을 내려다보며 용선은 자길 잡고 있는 별이의 옆모습을 슬쩍 보았다. 별이의 얼굴을 쳐다보는 용선의 얼굴엔 아무도 모르게 작은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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