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19화
배우들의 대사를 뚫고 별이의 목소리가 용선의 귀에 꽂혔다. 자꾸만 배우들의 대사 사이로 들어오는 별이의 목소리에 용선은 조금씩 집중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영화보러 가자 그랬지 누가 편집실을... 에휴..."
별이가 그렇게 용기를 내서 말을 꺼낸 영화관 데이트의 결과는 편집실이었다.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싶어한 용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음에 영화를 보자는 용선의 말을 무시하고 기어코 여기까지 따라온건 별이었지만. 따라오긴 따라왔는데 막상 자신의 처지가 이러하다보니 편집실에 들어온 내내 뒤에서 구시렁대고 있는 별이었다.
"그러게 집에 가랬잖아."
"...... 조조영화 볼거에요."
"아휴."
별이는 괜히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다. 용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진짜 어떻게 편집만 하냐..."
다시 용선이 편집을 시작하려니 들려오는 별이의 작은 목소리. 용선은 결국 다시 화면을 일시정지 시켜놓고 앉은 의자를 돌려 별이를 보았다. 편집실 구석에 앉아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별이는 불만이 가득 담긴 입술을 쭉 빼놓고 있었다. 구시렁구시렁... 혼잣말을 할 때마다 괜히 긁히지도 않는 벽을 긁고, 파지지도 않는 바닥을 발로 비볐다.
"우리 막내가 오늘따라 왜 그럴까."
용선이 의자 팔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슬쩍 용선을 본 별이는 볼에 바람을 넣으며 용선의 시선을 피했다.
"오늘이니까 그렇죠."
"오늘이 어때서."
"촬영 끝났잖아요."
"그니까 그게 뭐. 촬영 끝났으니까 같이 놀아줄 줄 알았어?"
그래도 촬영이 끝난 날인데.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오늘만큼은 모든 걸 잊고 놀고 있는데. 별이는 용선의 말이 내심 아쉬웠다. 물론 메인 감독인 용선은 편집이 끝날 때까지 일이 끝난 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늘은 시간을 내줄 줄 알았다. 그래서 그렇게 힘겹게 용기를 내서 말을 건네본 것이었는데 결과는 완전 꽝이었다.
"촬영 끝나면 영화 보자 그래놓고..."
쥐죽은 듯 작은 목소리로 별이가 말했다. 이 말만 혼잣말로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다. 용선은 시무룩해 있는 별이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별아."
"네."
"나 진짜 바쁜 거 다 끝나면 영화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같이 봐줄께. 그럼 됐어?"
씰룩거리는 별이의 얼굴 근육. 아주 깊은 곳에서 솟구쳐 나오는 행복함에 별이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좋아서 웃음이 새어나올 걸 꾹꾹 참아가며 별이가 최대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자기 딴에는 혹시라도 자기 마음을 들킬까봐 하는 행동이었지만 용선의 눈엔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다 보였다. 지금 굉장히 좋아하고 있구나. 그리고 그걸 안 들키려고 저렇게 발버둥치는구나. 별이를 보며 미소 짓던 용선은 다시 의자를 돌렸다.
"그러니까 조용히 하고 있어."
"......네."
잠잠해진 별이를 뒤로 하고 다시 용선이 편집을 시작했다. 편집실 안엔 영상에서 나오는 소리들과 용선이 편집을 하는 소리만 가득했다. 별이는 편집에 집중해있는 용선의 뒷모습을 빤히 지켜봤다. 용선이 일하는 모습은 언제봐도 참 멋있었다. 현장에서 스태프들을 지휘할 때도, 배우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저렇게 편집을 할 때도. 한 번 피어나기 시작한 용선의 모습은 끝없이 머릿속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선배."
"......"
"선배."
"어어...?"
화면에 여전히 눈은 고정시킨 채로 용선이 대답했다. 편집에 몰입한 채로 용선이 이리저리 화면을 돌려보며, 편집실엔 계속 편집하는 소리가 울렸다.
"선배는 왜 연애 안 해요?"
정적.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용선이 곧바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다시 편집실에 영상의 소리가 퍼졌다.
"관심없어."
"왜요?"
"그냥. 마땅한 사람도 없고."
용선이 이리저리 손을 놀리며 별이의 질문에 대답했다. 용선의 대답을 들은 별이는 잠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용선을 보았다. 여전히 편집에 집중해있는 용선을 보며 별이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어떤 사람 좋아해요?"
영상 컷을 하려던 용선의 손이 별이의 질문에 멈춰버렸다. 용선이 컷을 하려고 했던 장면은 이미 지나가고 다른 장면이 화면에 흘러나왔다. 멍하니 지나간 화면을 지켜보던 용선이 다시 천천히 영상을 뒤로 돌렸다.
"나를 좋아해주는."
다시 돌린 화면을 보며 이번엔 제대로 컷. 고요해진 편집실 공기 속에 용선이 말을 이었다.
"솔직한 사람?"
다시 재생. 배우들의 말소리와 함께 별이는 생각에 잠겼다. 솔직한 사람이라.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걸까- 차분하게 생각에 잠긴 별이와 달리 용선은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이미 편집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지나가는 화면을 보며 용선은 아주 오랜만에 설렘이란 감정을 느꼈다.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진 별이는 그 이후로 조용했다. 더 말을 걸지도 않았고 혼자 구시렁대지도 않았다. 용선은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고 다시 편집에 집중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편집에 집중한 용선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3시간이 지난 후였다. 용선은 뻐근해진 목을 주무르며 어깨, 팔로 가는 스트래칭을 한번씩 해주곤 별이쪽으로 의자를 돌렸다.
"그러게 집에 가라니까..."
벽에 기대 앉은 별이는 어느새 곤히 잠이 들어있었다. 용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별이에게 다가갔다.
"별아."
"......"
"별아. 숙직실 가서 자."
용선이 별이를 살짝 잡고 흔드니 눈도 뜨지 않고 별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싫어..."
깨어나면 기억도 못할 말을 던진 별이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고 별이의 말을 들은 용선은 놀란 얼굴로 별이를 내려다 보았다. 그리곤 피식 웃으며 자신의 의자에 걸쳐 놓은 겉옷을 별이에게 덮어주었다. 가만히 서서 잠든 별이를 내려다보던 용선은 의자를 끌고와 별이의 앞에 앉았다. 새근새근 잘도 잠이 들었다. 용선은 별이의 감겨있는 눈부터 날렵한 턱선까지 천천히 별이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예쁘네...'
용선이 가벼운 미소를 입에 걸었다. 참 맑은 아이. 행동도 말도 너무나도 맑아서 속이 들여다 보이는 아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너무 잘 보이는-
"솔직한 아이."
용선은 별이를 덮어주었던 겉옷을 다시 한번 만져주곤 다시 화면 앞으로 의자를 끌었다.
*
용선은 그 후로도 몇 시간을 편집실에 앉아 있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조금만 하다 집에가서 쉴 목적이었지만 자길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보니 조금 더 무리를 했다. 최대한 빨리 끝내보기 위해. 밖은 어느새 잠에서 깬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하아..."
의자에 널부러진 용선이 온 몸의 힘을 쫙 뺐다. 밤을 새느라 뻑뻑해진 눈은 졸음과 피로를 담고 있었다. 정리를 마친 용선은 아직도 잠에 빠져 있는 별이에게 다가갔다.
"별아."
"......"
"문별이. 일어나."
자신을 깨우는 용선의 손길에 별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고개를 기웃기웃. 뭉개지는 얼굴 표정을 보아하니 자기가 잠들었던 사실을 한탄하고 있다는 게 훤히 보였다.
"죄송해요. 안 자려고 했는데..."
"그러게 집에 가랬잖아. 불편하게 이게 뭐야."
걱정스런 용선의 말에 별이는 해죽 웃었다. 헤헤- 뭐가 좋다는 건지, 별이는 헤실거리는 웃음을 보였고 그 모습을 본 용선도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따라 웃었다.
"선배 조조는..."
"너 내 꼴 안 보여?"
"죄송함다..."
"영화를 못 보고 죽은 귀신이 붙었나."
편집실을 나온 용선과 별이는 복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내 차 타고 가."
"와. 진짜요?"
"택시타고 갈래?"
"아니요."
이제는 편하게 대화를 주고 받으며 두 사람의 얼굴에 편안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숫자를 하나씩 채우며 올라오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발을 떼려던 찰나, 용선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그러니까 좀 기다리라 그래! 저번에 보니까 마감 잘 맞추더만."
"이번엔 너무 촉박하다고..."
"그쪽이 갑이야? 우리가 갑이지. 못하겠다 그러면 다른 외주 알아봐."
엘리베이터 안에 서있는건 기훈과 그의 팀 후배들이었다. 용선쪽도 기훈쪽도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 대화는 뚝 끊겼다. 용선을 발견한 기훈은 비죽거리며 천천히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왔다.
"퇴근? 아님 출근?"
"퇴근합니다."
"모습 보니까 그런 것 같네."
기훈이 용선의 차림을 쓱 훑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잡고 있는 별이는 기훈의 그런 모습이 불쾌하기만 했다. 기훈의 뒤에 있던 후배들은 관심있게 용선과 기훈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아 맞아. 크랭크업 했다고 했던가?"
"네."
"축하해. 이번 촬영도 잘 마무리했네."
"고맙습니다."
용선이 저렇게 딱딱하게 대답하는 걸 본적이 없는 별이는 굳어 있는 용선 한번, 기훈 한번. 그리고 뒤에서 흥미롭게 이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한번씩 쳐다보았다.
"나도 사고만 안 났으면 그때 잘 마무리 했을텐데."
용선의 표정이 더욱 안 좋게 굳어졌다. 별이는 저렇게 기분 나쁘게 말을 하는 사람이 왜 방송국에서 인기가 있는지 의문이 확 몰려왔다.
"운이 좋았지 니가. 나한테 잘 받아서 바로 장편 들어간 거 아냐."
줄곧 가만히 듣고만 있던 용선이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매서운 눈으로 기훈을 올려다봤다.
"운도 운이지만 실력도 있었죠."
"뭐?"
"제가 메인 받았을 때. 그때 제일 많이 들은 말이 뭔 줄 아세요?"
갑자기 적극적으로 나오는 용선의 태도에 놀란 기훈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기훈의 뒤에 있는 후배들은 완벽한 관전 모드에 들어가 있었다.
"다행이다."
용선의 말에 기훈이 인상을 완전히 구겼다.
"스탭들이고 배우들이고 다 다행이라고 하더라고요.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 아세요?"
"야, 김용선."
점점 붉어지는 기훈의 얼굴을 보는 건 꽤나 짜릿했다. 이제 용선은 딱딱했던 얼굴에 비릿한 미소를 담기까지 했다.
"그만하세요. 이제."
다시 얼굴을 굳히며 용선이 기훈을 노려봤다. 용선의 말과 행동이 꽤 치명타였는지 기훈은 겨우 화를 참고 있는 모양새였다.
"아주 기고만장이네... 또 누구 잡기라도 했어? 나한테 했던 것처럼?"
기훈은 쉽게 물러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는 용선은 기가 막힐 뿐이었다.
"전 한번도 누굴 이용한 적이 없어요."
"이야... 이것 봐라..."
"제가 지금까지 참은 건 그래도 선배에 대한 예우 때문이었어요. 이제 그만 추해지세요, 선배."
"야!!"
퍽- 기훈이 거칠게 용선의 어깨를 밀쳤다. 안 그래도 촬영과 편집으로 가루가 된 몸은 그 충격을 버티질 못했고,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용선을 뒤에서 별이가 급히 잡았다. 모두의 시선이 기훈에게 쏠렸다. 그제야 보는 눈이 있다는 걸 깨달은 기훈은 눈치를 보며 표정을 관리했다.
"지금껀 실수야. 니가 먼저 도발해서 그래."
"그런 걸로 하죠."
부들거리던 기훈은 용선을 노려보다 거칠게 입방귀를 뀌곤 용선을 지나쳤다. 뒤에 있던 후배들은 지금 상황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용선과 기훈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다 점점 멀어지는 기훈을 따라 서둘러 달렸다.
"선배... 괜찮아요?"
"당연하지. 잡아줘서 고마워. 하마터면 쪽팔릴 뻔 했네."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웃으며 일어난 용선은 이미 닫히고 다른 층으로 가버린 엘리베이터를 보며 버튼을 눌렀다.
"미안해요."
띵동- 엘리베이터가 다시 열렸다. 용선은 싸움을 건 사람은 이미 가고 없는데 들려오는 사과에 의문을 가진 얼굴로 별이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별이는 더이상 말을 잇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무어라 묻고 싶었으나 별이의 얼굴을 본 용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별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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