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14화
오랜만에 갖는 촬영 휴일이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편집실로 출근을 하고 있는 용선의 모습은 피로가 한 가득이었다. 점심까지 잠을 자고 나왔어도 그닥 피로가 많이 풀리지 않는 느낌. 용선은 편안한 차림새로 뻐근한 목을 누르며 방송국 복도를 가로 질렀다.
"할리우드가 괜히 할리우드겠어. 역시 돈이 많으면 확실히 달라지더라."
"와... 저는 언제 미국 한번 가볼까요."
복도를 걷는 용선의 귀에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 주제가 무엇이든, 대화하는 그들이 누구든 용선과는 상관 없는 일이었기에 용선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 한번 두지 않고 계속 걷기만 했다.
"어? 잠깐만. 용선아!"
하지만. 자신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용선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따라 고개를 돌린 용선의 눈엔 그닥 만나고 싶지 않던 인물이 서있었다. 박기훈. 그는 용선의 선배였고 꽤나 유명한 축에 속하는 드라마 감독이기도 했다. 주변에 방송국 동료들을 3명 붙여 놓고 수다를 떨고 있던 모양이었던 그는 초췌하고 꾀죄죄한 용선의 모습과 달리 말끔한 셔츠에 정돈된 머리를 하고 있었다. 용선을 발견한 기훈은 용선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오랜만에 보는건데 너는 별로 내가 안 반갑나보다?"
기훈의 입꼬리가 비웃음치듯 올라갔다. 기훈은 반년간의 휴직과 반년간의 해외연수를 보내고 약 1년 만에 방송국에 복귀하는 것이었다. 기훈이 1년 만에 돌아오든 10년 만에 돌아오든 용선에겐 무엇이든 반가운 일은 아니었기에, 기훈을 보는 용선의 표정은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오랜만이네요, 선배."
말투 역시 무덤덤하고 무뚝뚝하게. 용선은 기훈의 어깨 너머로 자신을 보자마자 숙덕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대놓고 용선을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고 있었다. 기분 나쁜 그림이었지만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 용선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촬영 중이라며. 정휘인 작가꺼로."
"네."
"넌 진짜 운이 참 좋단 말이지. 스타 작가 작품으로 장편 입봉 한 것도 대박인데 그런 작가랑 바로 친해져서 다음 작품도 하고."
정말 부러워서 하는 말인지 용선을 비꼬기 위한 말인지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용선이었다. 용선은 기훈의 말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웃지도 그렇다고 기분 나빠하지도 않은 채 올곧이 기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촬영은 잘하고 있어? 뭐, 용선이 니가 어련히 잘 하겠냐만은. 요즘엔 그림만 신경 쓰는 버릇 좀 고쳤어? 넌 다 좋은데 그게 문제잖아. 드라마는 그림이 다가 아닌데. 안 그래?"
"충고 감사해요."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자신의 말에 대꾸하는 용선을 보며 기훈은 살짝 눈썹을 움찔거렸다.
"내가 너무 바쁜 사람 붙잡았다. 나 모레부터 정식 복귀야. 앞으로 자주 보자."
"안녕히계세요."
악수를 하기 위해 내민 기훈의 손을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용선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전하고 몸을 돌렸다. 허공에서 멋쩍어진 기훈의 손은 어정쩡하게 다시 주먹 쥐어 졌고, 용선은 단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멀어져 가는 용선을 보던 기훈은 비소를 살짝 흘리곤 원래 수다를 떨고 있던 무리들 틈으로 섞여 들었다.
*
해가 뜬 시간보다 해가 질 시간이 더 가까워진 늦은 오후. 휘인은 아직도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대본을 모두 탈고한 상태였기 때문에 요 근래 휘인은 자유의 몸이었다. 하루종일 밥도 먹지 않고 멍하니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린 휘인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꿈쩍 않고 누워 있었다.
"어휴! 작가님! 이럴 줄 알았어요. 지금 몇 신지 알아요? 4시 50분이에요! 밥 또 안 드셨죠?"
휘인의 방 문을 활짝 열자마자 잔소리를 쏟아 붓는 사람의 정체는 다름아닌 휘인의 보조작가 지영이었다. 휘인과는 나이 차이도 10살 가까이 나고, 경력은 하늘과 땅 차이였지만 휘인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친근하게 대하는 지영의 모습은 가끔은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휘인은 꼼지락 거리며 이불 위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왜 왔어."
"작가님 이러고 있을까봐요."
"뭐 어때. 할 일도 없는데."
"그렇다고 굶어 죽으시게요?"
"나 물 먹었어."
"헐. 그래서 뭐. 일주일은 산다고요?"
"그 이상도 살지."
지영은 입을 벌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초밥 사왔어요. 얼른 일어나 드세요."
결국 휘인은 어두운 방을 나와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 초밥을 준비시켜놓고 열심히 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지영은 휘인에게 젓가락을 내밀었다.
"이번에 SBC에서 들어간다던 예능있잖아요. 그거 엎어졌대요."
"아 그래?"
"그게 그 예능 제작하려고 했던게 HS였잖아요. 그 HS 지금 횡령 비리 터져서 그렇대요. 걔네가 검찰 쪽 인맥이 쎄서 이번에도 그냥 조용히 넘어갈 거 같긴 한데. 어우 진짜 너무 더럽지 않아요?"
지영이 말하는 SBC는 방송국, HS는 잘 나가는 대형 기획사였다. 한 손엔 젓가락을 한 손엔 폰을 든 채로 눈은 폰 화면에 고정시킨 지영이 계속 말을 이었다.
"이번에 슈퍼아이돌 컴백한댔다가 연기했잖아요. 그게 걔네 리더 알죠? 걔가 뮤비 촬영 중에 사고 났는데 지금 쉬쉬하고 있는 거래요. 그 사고가 일어난 게 다름 아닌 같은 멤버 때문이었어서."
지영은 연예계 소식통이었다. 휘인은 굳이 연예 기사를 보지 않아도 지영을 통해 연예계 돌아가는 소식을 알 수 있었고, 기사로 공개되지 않은 찌라시나 오프더레코드 이야기까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지영이 하도 성격이 밝고 사교성이 좋아 인맥이 많이 탄탄한 덕분이었다.
"찌라시 얘기는 그만해."
"찌라시 아니에요! 지금까지는 팩트. 안 그래도 오늘 뜬 찌라시 있는데 같이 보실래요?"
지영이 빠르게 손을 놀리더니 찌라시가 가득 쓰인 화면을 띄운 폰을 식탁 위에 올려 놓았다.
"최근 해외 투어를 마친 인기 보이 그룹 A군은 해외에서 대마초를 흡입. 현 소속사에서 사실을 알고 현재 A군의 입국을 미루고 있음. 이야 마약 사건은 요새 빠지질 않네."
지영이 초밥을 우물거리며 스크롤을 내렸다.
"최근 1000만 영화를 돌파한 영화배우 B군은 신인 걸그룹 C양에게 엄청난 구애를 하고 있다. C양의 숙소 앞까지 찾아가 C양의 팬들에게 적발되기도 했던 B군의 사랑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B군은 너무 예측 되는데? 그쵸?"
재밌게 찌라시를 읽는 지영과 달리 휘인은 관심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루종일 굶어 배고프기만 했기에 어느덧 휘인의 초밥은 하나만 남아 있었다.
"같은 드라마에서 만난 탑 여배우 D양과 떠오르는 루키 E군이 열애 중이다. 최근 D양은 E군을 자신의 소속사 대표에게 소개시켜주는 등 E군의 도약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는 중이다. 이건 또 누구이려나아~"
"너 찌라시 좀 그만 봐."
"왜요~ 재밌는데."
"재미로 볼거면 재미로만 보고 쓸데없는 억측 같은 거 하지마."
마지막 남은 초밥 하나까지 해치운 휘인이 젓가락을 던지듯 식탁 위에 올렸다.
"찌라시 믿을 거 못 되는 거 너도 알잖아."
"그래도 가끔 맞는 거 있잖아요."
휘인의 인상이 살짝 일그러졌다. 지영은 그런 휘인의 표정 변화를 눈치 채고 보고 있던 폰 화면을 껐다.
"누가 너에 대해 거짓말로 떠들어대면 좋아?"
"아니요..."
"에휴. 하여튼. 디저트는 없어?"
"없긴요~ 당연히 있죠."
눈치를 보던 지영이 다시 분위기를 푸는 휘인의 모습을 보고 밝아진 얼굴로 냉장고를 열었다. 지영은 사온 아이스크림을 휘인의 앞에 내려놓으며 다시 내려 두었던 폰을 들었다.
"아. 저 KBC에 있는 친구한테 들었는데 이번에 선배 하나가 복귀했는데 되게 잘생겼대요. 나이는 삼십 후반이고 결혼도 했는데 아저씨 티도 하나도 안 난다고."
분위기가 풀리자마자 지영의 입은 다시 풀려 조잘대기 시작했다. 휘인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앞에 놓인 아이스크림을 뜯었다.
"이름이 박기훈? 이랬던 거 같은데. 작가님도 알아요? 꽤 유명한 작품 많이한 드라마 감독이던데."
익숙한 이름에 휘인이 잠시 멈칫하였다. 휘인은 기훈을 잘 알고 있었다. 드라마 감독으로서도, 용선의 선배로서도.
"알지. 아~주 힘들게 촬영하기로 유명하거든."
"헐 진짜요? 어떤데요? 왜요?"
"그만. 너 이제 진짜 그만 떠들어. 여기서 더 떠들면 너 짜를거야."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휘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영은 궁금해 미치겠단 눈이었지만 더는 묻지 못하고 입만 삐죽거렸다.
*
오후 10시. 별이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새벽에 퇴근을 하긴 했지만 오늘은 휴일이었기에 나름 푹 쉰 별이의 표정은 생기가 돌았다. 방송국 앞에서 심호흡을 몇번이고 하던 별이는 마음을 다 잡은 모양인지 결연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노크할까... 아냐. 카톡 할까..."
그렇게 비장하게 들어와 도착한 곳은 편집실 앞. 혼자 가만히 서서 고민하던 별이는 다짐한 듯 편집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문은 별이가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열리고 있었다. 당황한 별이는 밀리는 문에 맞춰 한 걸음 물러났다.
"너 여기서 뭐해?"
용선이었다. 용선은 멍한 표정으로 자기 앞에 서 있는 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게..."
별이가 민망한 웃음을 살짝 내비쳤다.
"야식 드실래요?"
그리고 가져온 검은 봉투를 위로 올렸다. 봉투에서 흘러나오는 향은 안에 있는 내용물이 무엇인지 말해주었다. 용선은 자기가 좋아하는 달짝지근한 향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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