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12화
지방 촬영 이후 꿀같은 휴식을 가진 데칼코마니팀들의 촬영은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휘인에게서 마지막화 대본도 나온 상태였고, 이제 정말 촬영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오늘은 새벽부터 이르게 촬영을 시작한 탓에 해가 지기도 전에 빠르게 촬영이 끝을 맺었다. 방송국으로 들어온 용선은 곧장 편집실로 갔고, 별이는 수영과 함께 다음 촬영을 위해 이것저것 준비를 시작했다.
"야! 김용선!"
저녁도 먹지 않고 줄곧 편집실에 앉아 있던 용선이 휴식을 위해 휴게실로 걸어나오자 저 멀리 복도 끝에 있던 용선의 동기 태연이 잽싸게 달려왔다.
"얼마만에 보는 얼굴이냐아~ 살 빠진 것 봐. 너 또 밥 안 먹고 다니지?"
용선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태연은 손가락으로 용선의 볼을 꾹꾹 눌렀다.
"무거워어."
"나 종이인형인데 무겁다니."
"너 오늘 촬영 아니야?"
"오늘 휴차지롱."
"그럼 편집이나하지 왜 놀고 있어."
"야아. 나 지금 4일째 집 못 들어가고 있거든?!"
태연이 억울하다는 듯 콧김을 뿜었다. 용선은 정수기 앞에서 종이컵을 빼어 들었다.
"너 근데... 들었어?"
"뭘?"
태연이 조심스럽게 용선의 눈치를 봤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저렇게 눈치를 보는건지. 용선은 물 한 컵을 단숨에 들이켰다. 태연은 주변 눈치도 살피더니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용선의 옆에 바짝 섰다.
"박기훈 선배... 다음주 복귀래."
태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태연의 말을 들은 용선은 처음엔 살짝 움찔했으나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종이컵에 물을 따랐다.
"뭐... 다음달에 하는 일일극으로 바로 들어간다고는 하는데... 안 마주쳤으면 좋겠다. 그냥 이직이나 하지. 맨날 자기 프로덕션에서 엄청 스카웃 들어온다고 자랑은 엄청 해대면서 왜 안 간대?"
태연이 입을 살짝 뾰루퉁하게 내밀고 중얼거렸다. 용선은 다시 담긴 물을 한번에 들이키곤 비어버린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김용선!"
조용히 서있는 용선을 보던 태연이 갑자기 밝은 목소리로 용선을 불렀다. 용선이 동그란 눈으로 태연을 쳐다보니 태연이 씩 웃어보였다.
"너한텐 내가 있어. 알지?"
"오글거리게 무슨 소리야. 징그러."
"동기사랑 나라사랑~ 야. 밥이나 먹으러 갈래?"
"싫어."
"아 왜애. 니가 사줄께."
"어...? 뭔 소리야?"
"큰~맘 먹고! 니가 사준다고! 가자!"
"아니, 말이 안 맞잖아!"
"김용선이 쏜다~ 야호~"
막무가내로 용선을 끄는 태연 덕에 용선은 어이없다는 듯 눈썹에 힘이 들어갔지만 곧 웃음을 터트리며 태연과 걸음을 맞췄다.
*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중식당집. 그곳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에는 혜진과 혜진의 매니저, 그리고 혜진 소속사의 대표가 앉아 있었다. 요리 코스는 벌써부터 시작된 모양인지 회전 테이블엔 벌써부터 여러 음식이 가득 놓여져 있었다.
"올 때가 됐는데..."
밑바닥 로드 매니저부터 시작해 유명한 배우 기획사 사장까지 올라온 혜진의 소속사 대표는 공사 구분에 칼같고 돈 계산에 빠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 밑에서 오랜시간 일을 해온 혜진의 매니저는 혜진에게 언제나 힘이 되주는 사람이었다. 매니저는 이 모임 자리에 늦어지는 한 사람을 기다리며 대표의 눈치를 살폈다.
"아아, 제가 너무 늦었죠! 죄송해요. 화보 촬영이 길어져서. 하하."
문을 열고 일행들 사이로 낀 건 혜진과 드라마를 함께 하고 있는 조연배우 오레오였다. 레오는 큰 웃음소리를 내며 매니저의 옆 자리에 앉았다. 뒤따라 들어온 레오의 매니저도 인사를 꾸벅 하고 그의 옆에 앉았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대표님 말씀은 진짜 많이 들었어요. 워낙 대단하신 분이여야 말이죠!"
그간 조용했던 분위기를 깨고 레오가 목소리 톤을 높였다. 그런 모습을 보며 혜진의 매니저는 레오의 매니저에게 눈빛으로 어떤 신호를 보냈다. 그제야 레오의 매니저가 레오를 툭툭 건드렸고, 눈치를 살핀 레오가 삐뚤던 자세를 고쳐 앉고, 목소리도 가다듬었다.
"워낙 저 친구가 에너지가 넘쳐서요. 촬영장에서도 분위기메이커라니까요. 하하."
혜진의 매니저가 넌지시 대표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원래 이 자리는 오랜만에 대표와 혜진이 만나 앞으로의 활동 방향과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목적이 있는 자리였다. 그런 자리에 레오가 끼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데칼코마니 작품으로 혜진과 레오가 만나게 되며 혜진과 레오의 매니저도 마주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레오의 매니저가 혜진의 매니저의 학연지연을 모두 갖고 있는 아는 동생이었던 것이다. 한창 인기를 얻으며 떠오르는 신인으로 자리 잡는 레오에게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이름 없는 소속사. 레오의 매니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 KK랑 계약이 끝나간다고요?"
KK는 현재 레오가 몸을 담고 있는 소속사였다. 대표의 질문에 레오의 매니저는 정신을 가다듬고 허리를 곧게 폈다.
"네. 다음 달이면 종료됩니다. 지금 재계약은 안 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다음 소속사 찾지도 못했으면서 너무 성급하게 구는 거 아니에요?"
차가운 대표의 말에 레오의 매니저는 조심스럽게 혜진의 매니저 눈치를 보았다.
"선배님. 저 진짜 선배님이랑 같이 일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니까요! 진짜 매 촬영마다 배웁니다!"
그때, 레오가 목청을 높이며 혜진에게 말을 걸었다. 혜진은 이 불편한 자리를 빨리 떠나고 싶단 생각만 가진 채 어색하게 웃어주었다.
"고마워요."
"진짜 배우는 연기를 잘해야 되는 거 같아요. 연기만 잘 하면 무슨 일이든! 다시 일어날 수 있잖아요. 하하."
눈치없는 레오의 말에 대표와 혜진의 매니저가 인상을 찌푸렸다. 혜진은 여전히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
촬영이 끝난 저녁. 방송국으로 돌아온 용선과 별이, 수영은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선배. 저녁 같이 드실래요?"
"그럴까."
웬일로 저녁을 먹는단 소리에 수영이 놀란 눈으로 별이를 쳐다보았다. 별이도 동그란 눈을 꿈뻑거렸다.
셋은 방송국 앞에 있는 작은 분식집으로 자리를 잡았다. 화려한 음식은 아니지만 이것저것 다양하게도 시켜 한 상을 가득 채운 셋은 허겁지겁 밥을 먹기 시작했다.
"선배. 편집은 잘 돼 가세요?"
"그럭저럭."
"요즘 편집하느라 집도 못가시는 거 같던데."
"오늘은 가보려고."
수영의 질문에 무뚝뚝하지만 하나하나 다 대답해주며 용선이 김밥을 집었다.
"저는 그래도 선배랑 같이 일하는 게 제일 좋은 거 같아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말 해라."
"진짠데! 제가 지금까지 몇 명의 선배를 거쳤는데요! 진짜 존경합니다, 슨배님."
친근하고도 장난스럽게 용선에게 계속 말을 거는 수영의 모습을 보는 별이의 표정은 오늘따라 밝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별이의 모습을 용선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아, 선ㅂ...!"
"문별이."
"네?!"
"너 왜이렇게 못 먹어. 어디 안 좋아?"
재잘재잘 쉴새없이 떠드는 수영의 말을 자르고 용선이 별이를 불렀다. 갑자기 대화의 주제가 자기가 된 별이는 당황하여 두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딴 생각하느라..."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넋이 나가 있어."
"아하하... 그냥..."
별이가 어정쩡한 웃음을 보이며 앞에 놓인 김치볶음밥을 한 숟가락 떴다. 여전히 자길 보고 있는 용선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별이는 굳이 그 시선을 피하며 밥을 떠 먹었다. 별이와의 대화가 끝나자 수영은 곧바로 다시 이야기를 꺼냈고 식사 시간 내내 조잘거리며 대화를 끌었다.
"잘 먹었습니다, 선배."
"잘 먹었습니다."
용선이 계산을 마치고, 분식집에서 나온 세 사람은 다시 방송국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아! 먼저 들어가세요! 저 잠깐 편의점 좀 들렸다 갈께요!"
"그래."
"별아, 먼저 들어가."
"네."
용선에게 인사를 마친 수영은 곧장 몸을 돌려 자리에서 벗어났다. 용선과 별이는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천천히 다시 방송국으로 향했다.
"문별이."
"네?"
"힘들어?"
"아, 아뇨...!"
별이가 일에 지치고 힘들어서 축 쳐져있던 거라고 생각한 용선은 낯간지럽지만 다정하게 별이에게 말을 건넸다. 오히려 당황한 별이가 아까처럼 손사래를 치며 크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너 잘하고 있어."
별이를 보지도 않고 앞만 보면서, 그렇게 용선이 진심 어린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별이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에게 듣는 위로이자 칭찬이었으니까.
"고, 고맙습니다... 선배..."
도로를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와 두 사람을 스치는 바람 소리에 묻힌 작은 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단어를 내뱉으며 왜 이리 심장이 쿵쿵 뛰는지. 별이는 떨리는 심정을 애써 겨우 다스렸다.
앞서 가던 용선은 별이의 목소릴 듣고 자리에서 멈춰섰다. 그리고 천천히, 용선이 몸을 돌렸다. 풋- 별이를 마주본 용선이 작게 웃음을 보였다. 용선의 웃음 소리에 별이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열이 가득함을 느끼며 별이는 지금이 어두컴컴한 밤이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풋. 난 니가 나 선배라고 부르기 싫어서 안 부르는 줄 알았지."
별이가 계속 시무룩해 있던 이유를 눈치 챈 용선은 계속해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별이는 진짜 어디까지 열이 달아오를 건지 계속해서 올라가는 열에 길게 날숨을 뱉었다.
"이제야 선배로 인정해주는거야?"
장난기가 살짝 돈 용선이 팔짱을 끼고 별이에게 고개를 내밀었다. 겨우겨우 부끄럽고 떨리는 감정을 쥐어잡고 있는데 갑자기 다가오는 용선의 얼굴에 별이가 급히 뒷걸음질 쳤다.
"아, 아니에요..."
그런 별이를 보며 용선은 계속 새어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장난을 치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아까 수영에게 말한 대로 오늘은 집에 가고 싶으니까. 그러기 위해선 빨리 편집실로 들어가 편집을 끝내야만 했다.
"가자, 후배님."
"아이 참."
용선이 다시 앞서 걸었다. 별이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용선의 바로 뒤를 따라 걸음 속도를 맞췄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 너도 보니까 늦게 들어가는 것 같더만."
"선...배는요...?"
"나도 오늘은 들어가려고. 내 침대 매트릭스가 얼마나 폭신한 지 알아? 진짜 거기 눕고 싶어 미치겠다니까."
용선의 뒤를 따르며 아직은 어색한 선배라는 단어를 뱉는 별이는 꽤나 뿌듯한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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