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13화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버린 오후 9시. 별이는 내일 촬영에 대한 준비를 모두 끝마치고 짐을 챙겼다. 이 시간까지 드라마국의 불은 꺼지는 일이 없었다. 별이는 아직 남아있는 다른 선배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방송국을 빠져 나왔다. 1층 로비를 지나 경비 아저씨께 인사를 드리고 바깥으로 나온 별이가 크게 숨을 들이 마셨다.
"힘들어 죽겠다..."
하늘에서 점점 구를 갖춰가는 달을 보며 별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 막내다."
가까이서 들리는 목소리에 별이의 눈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저번 첫 만남과 비슷한 듯 다르게, 대충 걸쳐 입은 바람막이 점퍼와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을 휘인이 계단 아래서 자길 올려다보고 있었다.
역시 어려보여. 역시 20대 같아. 아니 더 어려보여. 그런 생각을 하며 별이는 말똥한 눈으로 자길 쳐다보고 있는 휘인을 쳐다보았다.
"퇴근해요?"
"아! 네...! 안녕하세요 작가님. 여기서 또 볼 줄을 몰라서 잠깐 놀랐어요."
별이가 급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깍듯한 인사에 휘인은 살짝 민망한지 눈을 돌리며 제 볼을 긁었다.
"그런 거 같았어요."
한 쪽 손은 주머니에 박아둔 휘인의 손목에는 검은 봉다리가 걸쳐 있었다. 별이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휘인의 앞으로 갔다.
"근데 이 시간에 방송국은 무슨 일이세요? 작가님이랑 미팅 같은 거 없었던 거 같은데."
"사적으로 왔어요."
휘인이 어깨를 살짝 으쓱해보였다. 별이는 궁금하단 생각이 가득한 눈으로 휘인을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휘인은 별이가 참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적이면... 혹시 용선 선배 보러 오셨어요?"
별이의 질문에 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이는 새삼 용선과 휘인의 사이가 확실히 감독과 작가 그 이상의 사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신기하다는 듯, 이해한다는 듯 별이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제가 용선 선배 불러 드릴까요? 지금 편집실에 계실텐데."
"아니 됐어요. 내가 부르면 돼요."
"용선 선배 편집실 들어가면 연락 잘 안 받으시는데..."
"그 언니 슬슬 배고플 시간이라 몇 번 하면 받을 거예요."
휘인이 살짝 미소지었다. 별이는 자기보다 용선에 대해 아는 게 많아 보이는 휘인이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 질투가 나기도 하는 기분이었다. 별이가 그런 생각에 잠겨 아무 말 하지 않고 서 있으니 다시 휘인이 말을 꺼냈다.
"괜찮으면 그 시간까지 나랑 같이 있어 줄래요?"
*
휘인과 별이는 방송국 안에 있는 카페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별이는 자기가 직원할인이 된다며 휘인에게 커피를 산다 제안했고 휘인은 흔쾌히 별이의 제안에 응했다.
"일은 어때요?"
"어... 괜찮아요."
별이가 시킨 음료를 받아오고, 휘인은 가져온 검은 봉다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다 놓았다. 별이는 그 정체가 궁금한지 계속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휘인은 그런 별이의 모습을 보며 귀엽다는 듯 미소를 보였다.
"떡볶이에요."
"네?"
"김감독님 떡볶이 엄청 좋아하는데. 몰랐나보네."
정말 몰랐던 사실인 듯 별이의 눈이 동그래지고 입이 벌어졌다. 가만 생각해보니 저번에 같이 분식집을 갔을 때 시켰던 떡볶이를 다 먹은 사람이... 용선이었다. 별이는 새삼 다시 한 번 깨달으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되게 재밌네."
"네? 뭐가요?"
"너가요."
누가 김용선 친구 아니랄까봐. 용선이든 휘인이든 사람 당황시키는 데에 재주가 있는 모양이었다. 별이는 갑자기 훅- 말을 놓고 들어오는 휘인의 말투에 흠칫 놀란 반응을 보였다.
"아 미안. 내가 막내 이름을 몰라서. 이름이 뭐에요?"
"문별이요."
"문별이? 이름 예쁘다."
"고맙습니다."
살짝 부끄러워진 별이가 볼을 붉혔다. 그 사이 휘인은 폰을 들었다. 화면을 켜보았지만 여전히 깜깜무소식. 아까 용선에게 메시지를 남겨놨는데 아직 답장이 없는 걸 보니 조금 더 별이와 있어도 될 듯 싶었다.
"김감독님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네? 무슨 얘기요?"
별이가 궁금증과 놀라움이 담긴 눈으로 휘인을 바라보았다.
"재밌는 막내가 있다고. 근데 왜 재밌는지 알겠네."
휘인이 작게 쿡쿡 웃었다. 별이는 왜 그런 휘인의 모습 위에 용선이 겹쳐보이는지... 괜히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마녀 밑에서 잘 버티네. 1년차라면서."
휘인의 말에 별이가 멋쩍게 웃었다. 휘인은 빨대로 마시던 컵을 들고 얼음 하나를 입 안으로 넣었다.
"혹시..."
얼음을 입 안에 넣고 굴리던 휘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떼는 별이를 보았다. 조심스럽게 꼭 누구 눈치를 보듯, 별이가 천천히 질문을 꺼냈다.
"용선 선배 또 뭐 좋아 하는지 아세요?"
달그락 달그락. 입 안에서 굴러가던 얼음 소리가 멈췄다. 휘인은 생각지 못한 질문에 머릿속에서 물음표를 던지고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가지를 쳐나갔다.
"왜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어색하게 웃으며 별이가 시선을 피했다. 휘인은 다시 입 안에서 녹고 있는 얼음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런 건 직접 물어보는 게 확실하지."
"아... 그렇죠..."
휘인의 입 속에서 놀던 얼음이 모두 녹아 없어지고. 휘인은 다시 빨대로 음료를 빨았다.
"김감독님이 잘 해줘요?"
"어어... 네. 헤헤."
이번엔 휘인의 질문. 그 질문에 갑자기 별이의 얼굴이 환하게 폈다. 그리곤 굳이 휘인이 묻지 않은 이야기까지 꺼내며 용선의 이야기를 줄줄이 이어갔다.
"처음에는 진짜 무서웠는데 알고보니 진짜 너무 좋으시더라고요. 저 집에도 데려다 주시고, 밥도 사주시고. 솔직히 현장에선 좀 무섭거든요? 근데 또 현장에서 감독하시는 모습 보면 좀 멋있어요. 아, 아니. 지~인짜 멋있어요. 막 저는 모르겠는데 배우 연기 달라진 것도 바로 아시고 밥도 잘 안 드시고 촬영에만 집중하는데. 아, 밥 안 드시는 건 좀 신경쓰이긴해요... 너무 안 드셔서..."
정말 용선이 밥 안 먹는 게 신경쓰이는 모양인지 별이의 눈썹이 구겨졌다. 휘인은 말없이 음료만 마시며 가만히 그런 별이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가 원래부터 용선 선배 되게 존경했거든요. 제 인생 드라마가 <별이 빛나는 밤>이에요. 물론 작가님 드라마기도 한데 저 그거 보면서 뉴질랜드 가는 꿈이 생겼잖아요. 뉴질랜드 로케 너무 예뻐가지고."
"뉴질랜드도 예쁘지만 김감독님도 예쁘지 않아요?"
"네! 지~인짜 예뻐요! 인터넷으로 사진이나 영상으로 봤을 때도 진짜 예뻤는데 실물 진짜 엄청 예뻐요. 진짜 촬영하면 잘 씻지도 못하고 초췌한데 그래도 예쁜거에요. 와아~ 진짜. 아, 그리고 저번에 남해로 촬영갔을 때 같은 방 썼거든요? 선배가 씻고 나오는데 완전 동안! 진짜 화장 안 한 모습이 훨씬 예쁘더라구요. 와아..."
용선에 대해 말하는 별이의 눈은 줄곧 반짝이고 있었다. 입가엔 행복한 미소가 걸쳐있고 약간 불그스름한 볼은 속 안의 작은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쉴새 없이 용선에 대해 떠들어 대는 별이를 가만히 보던 휘인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좋아하는구나?"
"네?"
"김용선."
웃음기 띤 얼굴로 휘인이 별이를 바라보았다. 계속 신나서 떠들던 별이는 들켜선 안 될 비밀을 들켜버린 듯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이 지금 별이의 심정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그때, 휘인의 폰에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이 언니 이제 배고픈가보네. 놀아줘서 고마웠어요, 별이씨."
휘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별이는 살짝 혼이 나간 얼굴로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
"어 휘인아~"
1층 로비로 내려온 용선이 휘인을 발견하곤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왔다. 휘인의 앞에 선 용선의 시선은 곧장 휘인이 들고 있는 검정 봉투로 향했다.
"아, 이 언니. 나보다 떡볶이를 더 반기지?"
"아니 당연히 우리 작가님이 더 반갑지. 얼마만이야."
"영혼 좀 챙기지?"
용선은 휘인을 방송국 안 휴게실로 인도했다. 하루가 끝나기 1시간도 안 남은 시간인지라 방송국 안은 꽤나 조용했다.
"나 아까 막내 봤다."
"막내? 누구? 문별이?"
"어."
식었지만 맛은 그대로 있는 떡볶이를 입에 물며 용선이 휘인을 쳐다보았다.
"퇴근하는데 만났어."
"그래?"
"걔 언니 진짜 좋아하더라."
"켁. 뭐?"
먹던 떡볶이를 뱉을 뻔하던 용선이 겨우 입을 막고 서둘러 휴지로 입을 닦았다. 휘인은 재미난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듯 흥미로워 하는 모습이었다.
"아니 뭐. 선배로서~"
두루뭉술하게 얘기하며 휘인이 킥킥 웃어보이곤 용선이 뽑아 놓은 음료수 캔을 땄다. 칙- 경쾌한 소리가 들리고 한번에 반은 마셔버린 휘인이 탄산이 올라오는지 온 인상을 찌푸렸다.
"술 마시냐."
"술 마시고 싶다."
"좀만 있어봐. 같이 마셔줄게."
"알쓰랑 안 놀아요."
"나 한 입 마실 때 넌 세 입씩 마시면 되거든."
용선의 말에 휘인이 입을 비죽이며 혀를 내밀었다.
"그래서 그 날 무슨 일 있었는진 말 안 해줄거야?"
가볍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용선이 말하는 그 날은 남해 촬영의 마지막 날을 말하는 거였다. 또한 휘인과 혜진이 2년 만에 단 둘이 시간을 보냈던 날이기도 했다.
"너 답지 않게 왜 그래."
"나 다운 게 뭔데."
"맺고 끊는 거 잘 하잖아.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
용선이 휘인이 남겨 놓은 남은 음료수를 들었다. 휘인이 마신 만큼, 처음 자판기에서 뽑았을 때보다 훨씬 가벼워진 캔이었다.
"이 일에서만 꼭 그러더라."
"나 보기 싫대."
"너 무슨 짓 했어?"
용선이 살짝 놀라며 물었다.
"이러니까 내가 싫대."
"그러니까 왜 이러는건데."
"몰라."
"너, 좋아하잖아."
사라진 목적어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휘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선은 안쓰럽고도 답답한 동생을 보며 캔을 내려놓았다.
"너, 안 괜찮잖아."
휘인이 아랫 입술을 물었다. 흐지부지하게, 제대로 끝이란 것도 없었던 혜진과의 관계는 언제나처럼 휘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혜진이 다른 사람을 만난 것을 휘인에게 들켰을 때, 혜진은 수없이 사과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휘인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혜진과의 관계는 헤어지잔 말 없이 헤어진 상태였다. 휘인은 혜진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묻지 않았으니까. 왜 혜진이 자길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났는 지, 그리고 왜 그 상대에게 이별을 고했는지.
내가 왜 이러냐고...? 내가 왜 이러냐면... 휘인은 계속해서 자신의 입술을 물고 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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