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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15

[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15화




휴게실에 앉아 떡볶이를 풀자마자 빠른 속도로 먹어 치우고 있는 용선을 보며 별이는 미소를 감추기가 어려웠다. 별이는 겨우겨우 입술을 꽉 깨물어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자판기에서 뽑은 콜라를 용선의 앞으로 내밀었다.



"우움. 고마워. 나 진짜 배고팠는데 어떻게 딱 잘 맞췄어 신기하게."



콜라를 한 모금 마시며 용선이 쉼 없이 달린 떡볶이 먹방에 제동을 걸었다.



"저번에 정작가님한테 들었어요. 선배 이 시간이면 배고파한다고."

"걔는 진짜 은근 세심한 면이 있다니까."



휘인을 생각하며 용선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별이는 떡볶이 국물이 묻은 나무젓가락을 입에 넣고 용선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뭐 할 말 있어?"



역시나. 별이의 시선을 바로 알아챈 용선이 눈을 살짝 치켜 떠 별이를 보았다. 별이는 민망한 웃음과 함께 살짝 머리를 긁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배 혹시 좋아하는 거... 또 있어요?"

"어?"

"아니... 떡볶이 말고 좋아하는 거요."

"떡볶이 말고? 뭐? 음식?"

"음식이든 취미든! 뭐든요."



용선의 대답을 기다리는 별이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으음... 빵도 좋아하고 딸기도 좋아하고... 음..."



생각에 잠긴 용선의 입이 앙 다물어졌다. 바로 바로 떠오르지 않는지 미간엔 한껏 주름이 잡힌채 용선이 눈동자를 조금씩 굴렸다.



"뭐 이것저것. 못 먹는 거 빼곤 다 먹어."



결국 깊게 생각하길 멈춘 용선은 다시 젓가락을 놀려 떡볶이를 집었다. 별이는 머릿속에 용선이 말한 두 가지 음식을 새겨 넣으며 계속해서 질문을 이었다.



"취미는요?"

"내 취미? 영화 보기?"


이번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쉽게 답을 내뱉은 용선이 떡볶이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런 용선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별이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럼 저랑 영화 보러 갈래요?"



용기 내어 던진 별이의 말에 용선이 고개를 들었다. 별이 입장에선 나름의 데이트 신청이었다. 아주, 많이, 용기를 내서 던진 데이트 신청. 용선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기다리는 시간은 별이에겐 한없이 무겁고 긴 시간이었다. 바짝바짝 타오르는 목이 자꾸 눈 앞에 있는 콜라로 시선이 가게했다. 고개를 들고 별이를 바라보던 용선은 입에 있던 떡볶이를 마저 삼켰다. 그리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래. 촬영 다 끝나면 같이 보러 가자."



할렐루야. 별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서야 긴장감에 어색하게 굳어있던 별이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펴졌다. 홀가분한 마음이 된 별이는 냅다 콜라를 집어 들고 단번에 들이켰다.



"켁...!"

"야... 이씨... 너... 죽을래...?"



그 탓에 콜라를 뿜어버렸지만... 떡볶이는 당연하고 턱까지 튄 콜라 덕분에 용선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





이제는 정말 고지가 보이는 촬영 막바지 현장. 마지막화 촬영만 남겨둔 용선의 팀은 크랭크업을 기다리며 열심히 달리는 중이었다. 별이도 어느새 용선의 밑에 잘 녹아들어 일을 하고 있었으며 혜진의 연기 역시 나무랄데 없이 완벽했다.



"누나! 안녕하세요! 저, 누나라고 해도 되죠?"



촬영 대기를 하고 있는 혜진의 옆에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며 나타난 것은 레오였다. 대표와의 미팅 때 따로 한번 봤다고 그 이후로 레오의 들이댐은 한껏 업그레이드 되어 혜진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아..."

"불편하시면 그냥 선배님이라고 할게요. 하하. 불편하시진 않죠? 근데 지웅이 형은 어디 갔어요? 저 지웅이 형이랑은 형 동생 하기로 했어요."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지웅은 잠시 차에 들어가 준비 중인 상황이었다. 혜진은 지웅이 빨리 나와 차라리 빨리 촬영이 재개됐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저기 레오씨."

"아 매니저님! 오~ 오늘 의상 좋은데요? 혜진 누나 스타일리스트가 매니저님도 스타일링 해줘요?"

"미안한데 혜진이한테 너무 접근하지 말아줄래요?"

"왜요?"

"레오씨도 알잖아. 이상한 찌라시 도는거."

"그거 다 뻥인데 뭐 어때요."

"그래도 그게 그렇지가 않잖아."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매니저의 주의에 혜진의 주위에서 알짱거리던 레오가 자리를 뜨자 혜진이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편하면 불편하다고 말하지 그래."

"그랬다가 뭐 안 좋은 말이라도 돌면 어떡하라고. 이제 막 복귀해서 활동하는 입장인데."



덤덤한 혜진의 말에 매니저는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혜진씨."



그때 둘 사이로 다가오는 용선이었고, 용선을 본 매니저는 살짝 자리를 피해주었다.



"지웅씨가 좀 늦네."

"그러게요."

"많이 피곤해보이는데 괜찮아요?"

"아... 그래 보여요? 메이크업 좀 더 세게 할까요?"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걱정이 담긴 용선의 말에 진심으로 답하는 혜진을 보며 용선이 급히 손사래를 쳤다. 휘인에게 혜진과 있었던 일을 듣고 용선은 마음 한 켠에 혜진에게 묻고 싶은 말들을 담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여긴 엄연히 일을 하는 장소이고 지금 자신과 혜진의 관계는 감독과 배우였기 때문에 사적인 질문은 하지 않는 용선이었다.



"그... 혹시 힘든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해도 돼요."



묻고 싶은 말,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담아 돌리고 돌려서 던진 말. 그 말에 혜진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용선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내가 우리 팀 책임지는 사람인데, 혜진씨도 우리 팀이잖아."



말을 마친 용선이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를 보자 혜진의 얼굴에도 살며시 미소가 퍼졌다. 그리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혜진이 용선의 눈을 마주쳐왔다.





*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방송국. 뒷정리를 마저하고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별이는 수영과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도 드실 거냐고 물어볼까요?"

"음. 선배 편집실에 있으려나. 같이 가자."



별이는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수영과 편집실로 걸어갔다. 그렇게 편집실 근처에 다다르자 별이가 먼저 찾기도 전에 저 멀리 편집실 문을 열고 나오는 용선을 발견한 별이가 급히 용선을 부르려다 바로 근처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저 분이 김용선 선배죠?"

"엉."

"예쁘긴 진짜 예쁘네요."

"그러니까 기훈 선배 꼬셔서 B팀 자리 꿰찼겠지."



방송국에 들어와서 처음 듣는 용선에 대한 뒷담화였다. 그 대화를 듣는 순간 별이는 앞으로 나아갈수도 없었고 어떤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 기훈 선배 내쫓고 메인 자리까지 차지하고?"

"엉. 대박이지. 순진한 척 프로인 척 다 하더니."

"근데 기훈 선배 그... 그런 말도 있잖아요. 악덕 감독... 현장에서 엄청 빡쎄게 굴려서 배우고 스탭이고 힘들어 죽는다고..."

"너 어디서 그런 거지같은 루머를 듣고 온거야?"



눈치를 보며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말하는 후배에게 큰 역정을 내며 옆에 있던 선배가 소리쳤다.



"아니. 기훈 선배가 아무리 힘들게해도 그렇지. 배우들이랑 스탭들이 못하겠다고 들고 일어서겠어? 작품 한 두개 한 사람도 아닌데?"

"아... 그럼 기훈 선배가 하차한건 진짜 오로지 김용선 선배 때문인 거에요?"

"그렇다니까. 쟤가 기훈 선배 이용한거야."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 들을수록 별이의 마음 속엔 화가 솟구쳐 올랐다. 자기들이 뭔데 함부로 남 뒷담화를 하는거야? 왜? 별이의 손은 주먹이 꽉 쥐어졌고 꽉 다문 입술은 핏기를 잃어갔다.



"선배 안녕하세요. 하하. 오랜만이죠?"



하마터면 정말 주먹이 나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 찰나, 수영이 대화를 하고 있던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어, 김수영이. 너 김용선 팀에 있지? 할 만 하냐?"

"그럼요."

"너도 김용선한테 이용당하고 있는 건 아니지? 얼굴에 홀려서 휘어 잡히면 안 된다?"

"하하... 선배... 말씀이 좀 지나쳐요."

"하긴. 그래도 지금 김용선 밑에서 일하고 있는데. 무튼 열심히 해라. 난 간다."



용선에 대한 안 좋은 얘기를 늘어놓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어색한 공기만 남은 복도에 별이는 여전히 돌처럼 굳어있었다. 수영은 조심스럽게 별이의 눈치를 봤다. 자기야 일을 한지 좀 됐으니 이런 모습은 꽤 많이 봤었고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팀 막내인 별이 입장에선 처음이니 충격스러울 수밖에 없겠단 생각으로 수영이 조심스럽게 별이의 어깨를 잡았다.



"별아?"

"아... 네..."

"좀 놀랐지?"

"......"



아까는 미칠듯이 화가 솟구쳤는데 다행히 지금은 화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 사라진 화의 자리를 채우는 건 의심이었다. 



'사실일까.'



저들이 말했던 얘기가. 혼란에 사무친 별이가 고개를 드니 저 멀리 다시 돌아온 용선이 편집실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별이는 용선을 부를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별이는 흔들리는 눈으로 용선이 사라진 빈 복도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