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16화
촬영 중간 점심시간. 오늘도 용선은 촬영장에 혼자 남아 식사를 걸렀고, 별이는 그런 용선을 뒤로 하고 식당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오늘 점심은 뜨끈한 해장국이었다. 벌써부터 식사를 시작한 스태프들 틈에 별이가 앉자 주인 아주머니가 바로 해장국 한 그릇을 별이 앞에 내려 놓았다.
"어? <하얀 바람>한다!"
별이의 옆에 앉아 있던 영은이 식당 벽에 걸려있는 TV를 보고 말했다. 그 말에 별이는 깜짝 놀라 빠르게 고개를 돌려 TV를 쳐다보았다.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는 화면에 '하얀 바람 14화'라고 적혀있었다.
드라마 <하얀 바람>. 그 드라마는 용선이 B팀으로 합류했던 드라마였다. 그리고 이 드라마의 메인 감독은 바로 기훈이었다. 별이가 며칠 전 들었던 그 뒷담화에 담겨 있던 드라마. 그 드라마가 바로 저 드라마였다.
"저거 우리 감독님이 하신 거 맞죠?"
영은이 별이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드라마에 관심을 가지고 TV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맞아. 저때 내가 조명팀이었거든."
영은의 앞에 앉아 있던 조명감독이 말했다. 그 말이 놀라웠던건지 반가웠던건지 별이의 고개가 또 빠르게 돌아갔다.
"저거 초반엔 말도 많고 재미도 없었는데 후반가서 확 인기 끌었잖아요."
"으음. 그랬지."
"저거 중간에 메인감독 하차 하지 않았나?"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또 다른 스태프가 말했다. 별이는 대화에는 끼지 않았지만 그들의 대화를 아주 유심히 듣고 있었다.
"응. 메인 감독이 중간에 사고 나서 빠졌어."
"아 그래? 근데 오히려 빠지고나서 잘 됐잖아."
"그래서 김감독이 대단한거지. 중간에 이어받는 게 얼마나 힘든건데 그걸 그냥 받기만 한게 아니라 잘 하기까지 했잖아."
"솔직히 김감독님 연출은 인정해줘야돼. 그쵸?"
스태프가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다 별이와도 눈이 마주쳤다. 별이는 대답 없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현장에서 리더십도 있고 사람도 좋고. 막내는 좋겠어? 그런 선배 밑에 있어서."
조명감독도 별이를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괜히 별이의 얼굴이 빨개지는 기분이었다. 자기에 대한 칭찬을 한 것도 아닌데 왜 내가 부끄러워지는건지. 별이는 방송국에서 들었던 것과 달리 용선에 대한 이야기가 좋게 흘러가는 것에 대해 작은 안도감을 느꼈지만 여전히 의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
콜록콜록. 날씨와 안 어울리는 기침 소리가 휘인의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휘인은 이불 속에 폭 들어가서 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휘인은 살짝 몸을 뒤척이더니 하도 기침을 해서 목이 아픈 탓에 침대 옆 탁자에 놓인 물컵을 잡아들었다.
"작가님. 죽 데웠어요. 이거 좀 드시고 약 먹어요."
물을 먹고 있는 와중에도 기침이 나오는 휘인이 터져나오는 기침과 함께 조금 물을 흘렸다. 턱을 타고 흐르는 물을 닦으며 휘인이 이불을 더 여며 자기 몸을 감쌌다. 휘인의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은 지영은 침대 위로 죽 그릇을 내려 놓았다.
"아휴. 제때 밥 안 먹고, 제때 잠 안 자면 병 난다는 거 알면서! 이번에도 그러면 어떡해요!"
징크스처럼 꼭 원고를 탈고하고 나면 앓는 몸살. 휘인에겐 반갑지 않은 저주같은 징크스였다. 대본을 쓰는 동안 불규칙적인 생활을 하다 작업이 모두 끝나면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밀린 잠을 몰아자고 밀린 휴식을 취하다 보면 불규칙적인 생활은 계속 이어지게 됐다. 거기다 대본을 쓸 땐 그나마 온몸에 긴장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병이 찾아올 틈이 없는데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그 틈을 파고 바이러스가 침투하는 덕분에 항상 몸살이 휘인을 찾아왔다.
"힘들어..."
"아픈데 당연히 힘들죠!"
지영이 걱정이 담긴 잔소리를 했다. 휘인은 들어가지도 않는 죽을 억지로 입에 넣었다. 하지만 숟가락에 고작 몇 알갱이밖에 안 되는 죽을 보며 지영이 휘인이 들고 있던 숟가락을 뺏어 들었다.
"팍팍! 팍팍 드세요!"
"뜨거워..."
"제가 다 식혀왔어요. 안 뜨거워요."
휘인의 어리광을 원천봉쇄하며 지영이 한 숟갈 가득 뜬 죽을 휘인의 입에 가져다댔다. 휘인은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려 입안 가득 들어온 죽을 돌멩이 씹듯 천천히 씹었다.
"작가님 이렇게 아프면 제가 어떻게 집에 내려가요."
지영이 울상을 지었다. 지영은 내일 할머니의 팔순 잔치가 있어 원래대로라면 오늘 저녁 기차를 타고 본가로 내려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도 오늘 새벽부터 휘인의 저주같은 몸살이 찾아왔고, 급한대로 지영은 기차를 내일 아침으로 바꿔 끊고 하루종일 휘인의 병간호를 맡았다.
"갔다와. 나 괜찮아."
"작가님 한번 아프면 일주일 내내 앓으시면서."
"그 일주일도 그라데이션처럼 아프다고. 첫 날에만 이렇게 힘들지 갈수록 괜찮아."
"그니까, 내일은 이틀째니까 내일도 많이 아플 예정이잖아요."
"어... 그래도 오늘보단 나아."
휘인이 핏기없는 입술로 헤벌쭉 웃어보였다.
"작가님 누구라도 불러요. 혼자서 밥도 잘 못드시잖아요."
"혼자서 괜찮다니까아~"
"부모님이야 지방에 계신다 하지만! 친구 없어요? 왕따에요?"
"야아... 듣는 왕따 슬프게 그렇게 직구 날리기 있냐."
휘인이 다시 찬 기운을 느끼는지 이불을 더 감쌌다. 손까지 쏙 이불 속으로 들어간 탓에 지영은 계속해서 휘인에게 죽을 떠먹여주고 있었다.
"김용선 감독님이랑 친하잖아요. 김감독님이라도 불러요."
"안 돼. 그 언니 지금 바빠."
"어휴. 남 걱정은 항상 잘 하지."
"내가 한때 정배려라고 불렸어."
휘인의 능글맞은 대사에 지영은 못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으로 휘인을 쳐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야 문별이! 너 진짜 똑바로 안 해?!"
촬영장에 울려퍼지는 용선의 목소리. 주변에 있던 스태프들은 슬쩍 별이와 용선의 눈치를 봤다. 요 며칠 사이 별이의 태도는 거의 처음 현장에 나왔을 때만큼 서툴고 정신이 없었다. 별이의 실수와 잘못이 보일 때마다 용선은 올라오는 화를 참기도 하고 크게 혼내기도 했지만 별이는 얼빠진 얼굴로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평상시라면 가끔 용선의 말에 억울하다는 듯 대꾸도 해야했고 혼자 삐지기도, 화를 내기도 했어야 했는데 요즘 별이의 모습을 보면 전혀 그렇지 못했다. 용선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짓는 표정도 하나같이 어색하기만 했다.
"문별이. 잠깐만 나 좀 보자."
촬영이 모두 끝난 밤. 정리를 하고 있는 별이에게 다가온 용선이 별이를 불렀다. 나머지 정리는 수영에게 맡기고 별이는 용선의 뒤를 따라 걸었다. 촬영장의 불빛이 저멀리 보이는 인적 드문 길에 멈춰선 용선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딸칵- 담배를 입에 문 용선이 큰 한숨과 함께 연기를 내뱉었다.
"너 요즘 왜 그래?"
"......"
"무슨 일 있어?"
"아, 아뇨..."
자기가 아무리 혼내도 빤히 눈을 쳐다보며 얘기하던 아이가 또 저렇게 시선을 떨구고 있다. 용선은 다시 한숨 섞인 연기를 내뱉었다.
"너 진짜 막판에 와서 그만 두고 싶어?"
별이는 말없이 입술을 물었다. 용선은 말없는 별이를 한동안 가만히 지켜보았다. 하지만 별이는 꿋꿋히 입을 다문 채 용선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있었다. 둘 사이에 있던 담뱃불이 꺼지고 용선은 머리를 한번 쓸어넘겼다.
"니가 문제니. 아님, 내가 문제니."
용선이 별이를 똑바로 마주보며 덤덤하면서도 무겁게 말을 던졌다. 그리고 그제야 멀리 떨어져 있던 별이의 시선이 용선에게 닿았다. 파르르 떨리는 강아지 같은, 그런 별이의 눈이었다.
"나 많이 안 기다려."
끝까지 대답이 없는 별이를 두고 용선이 먼저 걸음을 뗐다. 용선이 자기 옆을 지나쳐도, 저 멀리 사라져도... 별이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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