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11화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안내를 종료하며 용선의 차가 부드럽게 멈춰섰다. 차가 완전히 멈춰서자 용선은 옆에 앉은 별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많이 피곤했던건지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잠 드는 것 같더니 오는 내내 곤히 잠에 빠져 있는 별이가 옆 좌석에서 아직도 잠에 푹 빠져있었다. 늦은 새벽, 길거리를 비추는 가로등 불빛만 차 안으로 스며 들어와 잠 든 별이의 얼굴을 비췄다. 가만히 별이를 보던 용선은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웠다.
용선은 잠시 정면을 응시했다. 핸들 위에 놓인 손가락이 리듬감 있게 핸들을 톡톡 건드렸다. 용선은 다시 잠 든 별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용선은 서울에 올라오는 버스에서 느꼈던 낯선 시선을 떠올렸다. 모두가 잠에 빠져 고요했던 버스 안. 용선 역시 몰려오는 피곤함에 고속도로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잠이 들었었다. 깊은 수면에서 얕은 수면으로 의식이 살짝 돌아온 찰나, 용선은 자신의 옆 자리에 누군가 있음을 느꼈다. 조심스럽던 그 아주 작은 움직임. 내뱉는 숨결에 담긴 뜨거움과 떨림. 그 낯선 인기척에 용선이 잠시 눈을 떴을 때 자기 얼굴을 가리고 있는 별이가 보였다. 한손으론 얼굴을 가리고, 남은 한손으론 심장부근을 움켜쥔 채. 그 모습을 담은 용선은 다시 무거운 눈을 감았다. 그 사이, 별이는 자리에서 일어 났다. 용선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서둘러 제자리로 돌아가는 별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너는 그때 왜 내 옆 자리에 있었을까. 너는 그때 왜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을까. 너는 그때 왜 그렇게 도망가듯 가버렸을까. 용선은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하나씩 던져보았다.
"어...?"
별이가 잠에서 깨며 무거운 눈꺼풀을 올렸다. 멈춰져 있는 자동차와 익숙한 동네 풍경. 졸린 눈을 한 별이가 용선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완전 잠들었었어요... 죄송해요."
"아니야. 피곤한데 얼른 들어가서 자."
별이가 졸린 눈을 비볐다. 느린 몸짓으로 안전 벨트를 풀고, 짐을 챙긴 별이가 차 문을 열었다.
"별아."
밖에 있는 가로등 빛이 열린 문 속으로 환히 들어왔다. 용선의 부름에 별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용선은 바로 말을 잇지 않고 잠시동안 별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수고, 많았다고."
"아... 넵. 감독님도 수고하셨어요.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끄러운 듯한 웃음을 지으며 별이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별이가 차 밖으로 나가 문을 닫자 용선이 조수석 창문을 반쯤 내렸다. 별이가 허리를 숙여 차 안에 앉아 있는 용선과 시선을 맞췄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잘 자."
살짝 미소지은 용선은 창문을 올렸다. 밖에 있는 별이의 얼굴이 점점 가려졌다. 창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자 차는 부드럽게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호텔 어디야? 데려다줄게."
"이미 체크아웃했어."
"매니저는?"
"... 보냈어."
차에 올라탄 휘인이 시동을 걸려다 말고 혜진을 쳐다보았다. 혜진은 멋쩍게 웃으며 그런 휘인의 시선을 피했다. 휘인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그 어떤 대책도 없이 혜진은 지금 빈 몸으로 휘인과 함께 있었다. 휘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어?"
휘인이 시동을 켜 차를 출발시켰다.
"... 너랑 있고 싶어서."
혜진은 작게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러자 갑자기 차가 멈춰섰고, 놀란 혜진이 급히 고개를 들어 휘인을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내리라고 그러는건 아니지? 응? 혜진은 속에 드는 작은 불안함을 겨우 눌렀다. 휘인의 몸이 점점 혜진쪽으로 다가 왔다. 휘인의 손이 조수석의 문쪽으로 향했다. 이대로 문을 열어버리고 나가라고 하는걸까. 혜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휘인의 손은 혜진의 생각과 다르게 안전 벨트로 향했다. 휘인은 두 눈을 꼭 감은 혜진을 힐끗 보곤 안전 벨트를 채워주고 몸을 바로 했다. 다시 차가 움직이자 혜진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 후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막 고속도로를 들어서려고 할 때, 그제야 휘인이 입을 열었다.
"졸리면 자."
하지만 여전히 혜진은 입을 꾹 닫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아까부터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만 쳐다보고 있는 혜진을 보며 휘인은 말없이 운전을 계속했다.
*
텅 빈 자신의 원룸방에 들어온 별이는 오자마자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온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지만 정신만은 말똥했다. 아니. 사실 아까까지만 해도 정신도 몽롱하게 나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용선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그 순간, 꺼져있던 불빛이 들어오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별아.'
용선이 처음으로 별이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물론 그 전에도 많이 부르긴 했지만, 성을 붙이지 않은 이름은 처음이었다. 처음 '문별이'라는 세글자 이름으로 부를 때도 아직 기억이 생생한데. 그때랑은 또 너무 다른 기분이었다. 너무 너무 달랐다. 별이는 차오르는 열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쳤어 문별이... 하아..."
자꾸만 용선의 얼굴과 목소리가 떠올랐다. 별이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쿵쿵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자꾸 생각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 생각을 하면 심장이 뛴다... 아.
"좋아하나...? 아니야... 설마..."
별이는 덩그러니 침대 위에 놓여진 폰을 내려다봤다. 뭐 하나 알림오는 것 없이 까만 화면인 채로 얌전한 별이의 폰. 별이는 일없이 누워있는 폰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내리 15분. 15분 동안 별이는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반복했다.
[잘 도착하셨어요? 오늘 태워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사라지지 않는 숫자 1을 보며 별이는 괜히 입술을 물었다.
*
휘인의 차가 휴게소로 들어섰다. 늦은 시간 장시간 운전을 하는게 쉽지 않은 일이다보니 쉬어갈 목적이었다. 오는 내내 말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잠도 자지 않은 혜진은 여전히 조수석에 앉아 창밖만 내다 보고 있었다. 텅텅 비어있는 주차장 아무 곳에나 차를 주차시킨 휘인이 시동을 껐다.
"뭐 먹을래?"
휘인의 물음에도 혜진은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휘인은 더 묻지 않고 밖으로 나가 휴게소 안으로 들어갔다. 차에 남은 혜진은 의자에 몸을 기대 휴게소 안으로 들어가는 휘인의 모습을 쫓았다. 휘인이 다시 휴게소에서 나올 땐 간식거리가 손에 들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혜진의 인상은 살짝 찌푸려졌다.
"먹어."
차로 돌아온 휘인이 혜진의 앞으로 알감자를 내밀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게 막 만들어 가져온 것 같았다. 휘인은 사온 사이다도 둘 사이에 내려 놓았다.
"나한테 왜 이러는거야?"
휘인이 사온 알감자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던 혜진이 딱딱한 말투로 물었다.
"나한테 아직 좋은 감정이 남아서 그러는거야, 아니면... 별뜻없이 이러는거야?"
"......"
혜진의 질문에 휘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들고 있던 알감자도 사이다 옆에 내려놓을 뿐.
"화를 내고 싶으면 화를 내고, 싫으면 싫다 그래 제발."
혜진의 표정이 참 괴롭게 변했다. 괴롭고도 안쓰러워 보이는 그 표정에 휘인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혜진은 그런 휘인의 모습에 더 화가 나고 답답했다.
"넌 한번도 나한테 화낸 적 없어. 사귈 때도, 내가 바람피고 다닐 때도, 헤어질 때도."
"......"
"지금도 그렇잖아. 넌 나한테 꺼지라고 해야 돼. 꼴보기 싫으니까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그래야지! 니가 내 앞에서 뻔뻔하게 어떻게 그러냐고 그래야지!! 지금 이렇게 같이 밥먹고 같이 차타고, 같이...!!"
감정이 벅차오른 혜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빨갛게 변한 혜진의 눈이 계속 휘인을 노려봤다.
"그러면 안 되는거잖아... 아니야...? 말 좀 해봐... 말 좀 해줘, 정휘인..."
"내가 뭐라고 할까."
이젠 울먹거리고 있는 혜진과 달리 덤덤한 표정의 휘인이 고개를 들었다. 쓸쓸하면서도 텅 비어있는 휘인의 눈이 혜진을 마주했다.
"그래. 너 싫어. 정말 싫어. 나 두고 딴 사람이랑 바람 났던 너를 내가 어떻게 좋아할 수가 있겠어?"
이러려고 여기까지 내려온건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그간 가슴 속 깊이 억지로 묻어 놨던 이야기가 터져나오는 휘인이었다. 처음엔 덤덤히 말을 꺼냈지만 휘인의 목소리는 조금씩 고조 되고 있었다.
"이제야 말할 생각이 든거야?"
"그래서 속이 시원해?"
"아니. 너 아직도 니 속 얘기 다 안 꺼냈어. 도대체 여긴 왜 온거야? 아무리 근처에 볼일이 있었어도 내가 주연인데 당연히 내가 있을 거 알았잖아."
"작가가 촬영장 잠깐 보는 것도 안 돼?"
"그게 아니잖아."
휘인은 또 속마음을 숨겼다. 언제나처럼 자신의 생각은 드러내지 않았다. 혜진은 그런 휘인의 모습이 항상 답답했다. 자길 맞춰주기만 했던, 자길 위해주기만 했던 자신의 전 연인이.
"그래서 니가 듣고 싶은게 뭔데? 너 보려고 내가 여기까지 왔다고? 그걸 듣고 싶은거야?"
"정휘인. 삐딱하게 굴지마."
"니가 듣고 싶은 말 해주잖아. 뭐가 문제야."
"넌 왜 한번도 니 속을 드러내질 않아? 한번쯤은 솔직해져도 되잖아. 이젠 솔직해져도 되는거 아니야?"
"그래서. 넌 솔직해서 이 사람 저 사람 다 만나고 다니는거야? 그냥 이 사람이 좋으면 좋다고 여기서 놀고, 저 사람이 좋으면 좋다고 저기서 놀고?"
결국 터진 휘인의 거친 말에 혜진의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휘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거칠게 말을 이었다.
"그래, 너는 솔직해서 좋겠다. 미안하면 그냥 미안하다고 말하면 되고. 그러면 넌 마음 편하겠지."
"내 마음이 편하다고?"
"아니야? 너 별 생각 없잖아. 그냥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잖아. 니 맘대로, 너 끌리는 대로."
"야 정휘인!!"
차 바닥으로 알감자가 굴렀다. 소리를 지르며 휘두른 혜진의 팔에 맞은 탓이었다.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는 혜진의 손은 주먹이 꽉 쥐어진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너랑 다시 마주치는 거 자체가 잘못된 거였어."
혜진이 휘인을 노려보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곤 벌컥,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두컴컴하고 휑한 휴게소 주차장을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목적지도 없이 혜진은 무작정 걸었다. 그냥 지금은 휘인과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어디가는데."
점점 멀어지는 혜진을 보다못한 휘인이 차 문을 열고 급히 뛰어나왔다. 앞서 걷는 혜진의 팔을 붙잡고 돌린 휘인의 눈에 이미 울고 있는 혜진의 얼굴이 보였다.
"니가 없는 곳."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은 혜진이 거칠게 휘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휘인은 다시 혜진의 팔을 붙잡았다.
"니 맘대로 하지마. 지금은 내 맘대로 할거야."
휘인이 살짝 힘을 주어 당기자 한 걸음 가까워진 혜진의 몸이 휘인의 바로 앞에 닿았다.
"그러니까, 지금은 내 옆에 있어."
혜진의 팔을 잡은 휘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혜진을 꼭 잡은 휘인은 그렇게 다시 주차된 차로 한 걸음씩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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