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9화
"컷. OK. 수고했어요. 5분만 쉬었다 갈까요."
용선이 쓰고 있던 헤드셋을 벗어 내려놓았다. 막 혜진과 지웅 두 사람이 함께 찍는 씬들이 모두 끝이 난 참이었다. 지웅은 주변 스태프들에게 수고하셨단 인사를 전하고 있었다.
"아! 감독님 고생하셨어요."
용선이 혜진과 지웅의 근처로 걸어 오자 지웅이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네. 지웅씨도요. 서울 가서도 남은 촬영 잘 부탁해요."
"제가 드릴 말씀이죠. 혜진씨. 저 먼저 가볼께요. 서울에서 봬요."
"네. 다음에 봬요."
"안녕히계세요."
지웅은 매니저와 함께 스태프 사이를 뚫고 사라졌다. 혜진과 둘이 남은 용선은 들고 있던 대본을 살폈고 혜진은 아직 떠나지 않은, 저 멀리 서있는 휘인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휘인은 촬영장 끄트머리에 있는 나무에 기대 폰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개 좀 들어주지- 그런 아쉬운 생각이 들려는 찰나, 용선이 혜진에게 말을 걸었다.
"혜진씨."
"네?!"
놀라 반응하는 혜진을 보며 용선은 넌지시 휘인 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4일 동안 진짜 고생했어요."
"제가 뭘요. 감독님이 더 고생하셨죠."
"남은 씬들 웬만해선 OK 갈테니까 빨리 끝내 볼까요?"
용선의 말에 혜진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선은 혜진의 어깨를 살짝 톡톡 두드리곤 다시 본인의 자리로 걸어갔다. 걸어가며 힐끔 본 휘인은 여전히 폰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저기요. 죄송한데 여기 계시면 안 되거든요."
본인의 맡은 바 업무를 투철히 실행하기 위해 별이는 낯선 누군가에게 다가갔다. 인적이 있는 편이 아닌 장소였던지라 낯선 사람은 곧 외부인이었기에 별이는 촬영장 통제를 하기 위해 휘인에게 향했다. 별이의 목소리에 계속 숙여 있던 휘인의 고개가 들어졌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푹 눌러 쓴 모자와 한쪽 어깨는 흘러 내린 채 입은 연청 자켓. 작은 키와 어려보이는 외모. 휘인의 실물을 본 적이 없는 별이는 자신의 앞에 서있는 상대가 이 드라마의 작가라는 건 꿈에도 알아채지 못했다.
"아. 죄송해요."
휘인이 보고 있던 폰을 내리며 말했다. 별이는 어느새 휘인의 앞까지 걸어갔다. 죄송하다 말을 남긴 다음엔 보통 자리를 피해주기 마련인데, 말만 하고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서서 자기를 빤히 쳐다보는 휘인을 보며 별이는 다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니까..."
"문별이."
가만히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용선이 두 사람에게 걸어왔다. 휘인에게 가있던 별이의 시선이 용선에게 닿았다.
"너 뭐해."
"네? 저, 그, 통제."
보면 모르나. 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건데. 별이는 자기가 또 뭘 잘못한게 있나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너는 어떻게 우리 드라마 작가도 못 알아봐."
용선의 말에 별이의 동공이 확장됐다. 그리고 용선에게 향해있던 고개를 천천히 돌려 다시 휘인을 바라 보았다. 휘인은 어깨를 한번 으쓱 해보였다.
내가 생각하던 작가 이미지가 아니야... 아... 정휘인 작가님이 되게 예쁘고 세련됐다고 듣긴 했는데. 와 그래도. 난 진짜 어디 배낭여행 온 사람인 줄 알았지. 작가였어? 한대 맞은 것 마냥 멍한 표정이 된 별이는 그 자리에 굳어 휘인이 시선의 부담을 느끼든 말든 빤히 쳐다보았다.
"문별이."
"......"
"문별이."
"... 네?!"
"그렇게 쳐다만 볼꺼야?"
"아...! 죄송합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처음 뵙겠습니다."
뒤늦게 별이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휘인이 나무에 기대 있던 몸을 제대로 세워 가볍게 목례로 답했다.
"안녕하세요. 정휘인이에요."
"제가 작가님을 처음 뵙는 거라... 인터넷 검색 해도 작가님 사진이 안 나와서 작가님 얼굴을 몰랐어요... 죄송해요."
"인터뷰 사진은 있을텐데?"
별이의 변명에 끼어들어 초를 친 용선이 얄밉게도 별이를 쳐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 죄송해요... 제가 잘 찾아 봤어야 했는데."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장난이 담긴 용선의 눈빛을 보니 휘인은 대충 별이의 정체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기본 태도가 엉망이야. 정휘인 작가면 안 유명한 작가도 아니고. 기본적인 건 알고 있어야 되는 거 아냐?"
"죄, 죄송합니다아..."
하도 용선에게 혼나왔던 터라 별이는 이번에도 역시 혼나는구나- 라는 생각으로 고개를 떨궜다. 지금 용선의 말과 행동이 진짜 별이를 혼낼 목적이 아닌 별이를 놀릴 목적이라는 걸 알아보는 것 쯤은 예리한 휘인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하루라도 잔소리를 안 하게 하는 날이 없어."
"이제 잘 찾아볼께요."
"말대꾸 하는 거야?"
"아니요. 말대꾸 아닌데..."
울상이 된 별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휘인은 눈썹을 찡긋하며 두 사람의 대화를 재밌게 지켜보고 있었다.
"가서 촬영 준비해."
"네."
입술이 살짝 튀어 나온 별이가 두 사람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곤 촬영장으로 종종 뛰어 들어갔다.
"쟤야?"
"어?"
"새로 들어왔다던 막내."
"아~ 응."
"근데 너무 괴롭히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애들이 도망가고 그러지."
"괴롭히긴 무슨."
별이가 떠나고 둘만 남자 휘인이 다시 나무에 등을 기댔다. 자켓 주머니에 두 손을 콕 박고 스태프들 사이에 섞여 들어간 별이를 쳐다 보았다.
"완전 얼굴에 '내가 너 괴롭힐거임' 써있거든."
"우리 작가님 너무 상상력이 풍부해."
"그것도 맞는데. 예리하다고 해줄래?"
"그럼 지금 누가 널 엄청 보고 싶어한다는 것도 알겠네?"
휘인은 무어라 말을 하려 입을 열었지만 차마 얘기하지 못한 채로 입을 닫았다.
"누가 지금 여기, 니 옆에 엄청 오고 싶어한다는 것도 알겠고~"
"그래서 뭐."
"까칠하긴."
"언니한테 들을 소린 아니거든."
"바로 가야 되는 거 아니지?"
어느덧 대부분의 세팅이 완료된 듯 스태프들이 모두 자리를 잡은 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제 용선만 들어가면 촬영은 바로 재개였다.
"나 바쁜 사람이야. 우리 감독님이 자꾸 대본 독촉을 하셔서."
"내가 언제 독촉을 했다고."
"촬영이나 해. 5분만 쉬자더니 자기가 더 쉬고 있어."
"나 최대한 빨리 끝낼 거니까 어디 가지 마."
"내 맘이다."
용선은 피식 웃곤 휘인에게 눈인사를 남겼다. 감독 의자로 돌아온 용선이 자리에 앉아 헤드셋을 목에 걸자 스태프들이 하나 둘 제자리를 잡으며 촬영 준비를 시작했다.
"촬영 들어갑니다!"
수영의 외침에 수다꽃이 피던 현장이 조용해졌고, 용선은 다시 모니터로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모니터 속 혜진 역시 감정을 이어가기 위해 두 눈을 꼭 감고 대사를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
"컷. OK."
길었던 3박4일간의 촬영이 모두 끝이 났다. 모든 스태프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수고했다, 고생했다 서로를 격려하며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모두 얼굴이 활짝 폈다. 휘인은 용선의 마지막 OK 싸인이 떨어지기 무섭게 걸음을 뗐다.
"감독님. 수고하셨어요. 저, 오늘은 좀 급해서 먼저 갈께요."
스태프들과 인사를 주고 받으며 빠른 걸음으로 온 혜진이 용선에게 말했다. 혜진의 신경은 온통 촬영장을 벗어 나고 있는 휘인에게 쏠려 있었다. 터덜 터덜 느린 걸음으로 점점 멀어지는 휘인의 뒷모습을 보며 혜진은 1초라도 빨리 달려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네, 수고했어요. 서울에서 봐요."
용선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혜진은 자길 따라오는 매니저에게도 잠깐 기다리란 말을 남긴 채 멀어지는 휘인에게 서둘러 걸어갔다.
"휘... 휘, 휘인아...!"
자길 부르는 목소리에 휘인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여전히 푹 눌러쓴 모자는 휘인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혜진은 아직도 휘인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모자 챙을 당장이라도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 그러니까..."
막상 휘인을 불러 세우긴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할지 감이 안 잡히는 혜진이었다. 휘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모자에 가려져있던 얼굴이 드러나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이렇게 눈이 마주쳐본 게 얼마 만인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게 얼마 만인지. 그 까마득한 기억을 찾다 울컥한 혜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둘 중 먼저 입을 뗀 사람은 휘인이었다.
"바빠?"
"어?"
"밥 먹을래?"
말을 내뱉은 휘인이 보조개가 푹 들어간 한쪽 볼을 긁으며 살짝 시선을 피했다. 어느새 휘인의 귀는 살짝 분홍빛이 돌고 있었다.
"응...!"
벅찬 감정으로 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휘인은 말없이 몸을 돌려 주차해 놓은 곳으로 다시 걸음을 뗐다. 혜진은 혹시라도 놓칠까, 급히 휘인의 뒤를 따랐다.
*
모든 짐을 챙긴 스태프들이 촬영 버스에 올라 탔다. 모든 일정이 끝났다. 이제 서울로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노곤했던 사람들은 모두 좌석에 빨려가듯 몸을 맡겼다. 누군가는 벌써부터 잠을 청했고 누군가는 못했던 연락에 대한 답장을 했다. 별이 역시 무겁고 뻐근한 몸을 기대며 창 밖을 바라봤다. 버스가 출발하며 점점 숙소와 멀어지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새 정이 들었는지 뭔가 허한 마음이 들었다. 깜깜해진 하늘엔 달과 별이 떠올랐고 도로의 가로등엔 불이 들어왔다. 용선은 이번에도 가장 앞 자리에 앉았다. 별이는 이번엔 용선의 바로 뒷 자리로 자리를 잡았다. 어렴풋이 창을 통해 용선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IC를 통과할 때까지 용선은 언제나처럼 대본만 살펴보고 있었다. 별이는 이 깜깜한 버스 안에서 혼자만 밝게 켜진 용선의 좌석 등을 올려다 보았다. 진짜 대단한 사람이구나- 별이는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용선 좌석의 등도 불이 꺼졌다. 용선도 이제 눈을 붙이려는 모양이었다. 이젠 정말 어둠밖에 없어 보고 싶어도 보이지 않는 용선의 모습에 별이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고... 버스 안에 가라앉은 어둠과 고요 속에 잠깐 잠이 들었던 별이가 눈을 떴다. 별이가 살짝 뒤를 돌아보니 불빛 하나 새어 나오는 곳이 없었다. 고된 촬영에 지친 스태프들은 모두 잠에 빠져 있었다. 버스 앞에 있는 전자 시계도 저녁 10시가 채 10분도 남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별이는 조용히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이는 용선의 옆에 앉았다. 다른 스태프들처럼 용선 역시 잠에 빠져 있었다.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 살짝 기울어진 고개. 아쉽게도 고개는 창 쪽으로 향하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보고 싶다. 얼굴...'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용선이 몸을 뒤척였다. 혹시라도 용선이 깬 건 아닌지 식겁한 별이가 그 자리에 굳어버려 숨을 참았다. 다행히도 잠에서 깨지 않은 용선은 창으로 향했던 고개를 별이쪽으로 돌리기만 하고 다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렇게 10초 정도를 일시정지 상태로 굳어있던 별이가 용선이 잠에서 깨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꼭 나쁜 짓하는 것 같잖아. 아. 몰래 이러고 있으면 나쁜 짓인가? 하지만 그런 생각은 용선의 얼굴을 보자마자 하얗게 날아갔다. 별이의 바로 앞에 잠든 용선의 얼굴이 있었다. 어깨에 닿은 볼이 찹쌀떡처럼 살짝 눌려 있었다. 귀엽다- 그런 생각을 하는 별이의 얼굴엔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감돌았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와 보드라워 보이는 눈썹. 평상 시엔 예쁘게만 보이지만 촬영만 들어가면 무서워 보이는 눈이 지금은 감긴 채 평소엔 제대로 볼 수도 없었던 속눈썹만 보였다. 오똑 솟은 코와 앙 다물어진 입술. 용선의 입술을 천천히, 모양을 따라 쳐다보던 별이는 갑자기 몸이 확 달아 오름을 느꼈다.
미쳤네 문별이. 별이는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더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이러다 정말 들키기라도 할까 별이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제 자리로 돌아갔다. 자리로 돌아와서도 여전히 가라앉지 않는 열기에 별이는 손 부채질을 하며 쿵쿵 뛰고 있는 심장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두근, 두근, 두근. 그렇게 별이는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다시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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