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7화
고됐던 이튿날의 촬영이 모두 끝나고. 모든 스태프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숙소로 바로 가 뻗어 버렸다. 낮까지만 해도 가볍게 맥주 마시고 자자, 놀다 자자 하던 사람들이었지만 하루의 촬영이 너무 힘든 탓에 모든 유흥은 다음 날로 미루기로 했다. 별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루 종일 용선에게 깨지고 혼나고. 촬영은 촬영 대로 늦어지고. 용선보다 먼저 방에 들어온 별이는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겨우 이끌어 세수와 양치만 하고 바로 이불 위로 철푸덕 누워버렸다. 용선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려고는 하는데 자꾸 눈꺼풀이 내려오는 게 잠을 이기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별이는 이불도 제대로 덮지 않은 채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들어 버렸다.
모두가 방에 들어가 잠을 청할 때. 용선은 숙소 1층에 위치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잘 풀리지 않았던 오늘 촬영에 대해 자책도 하고, 내일 촬영은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 용선의 테이블엔 대본과 콘티가 놓여 있었다. 용선은 새벽이 깊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방 문을 여니 환한 빛이 용선을 반겼다. 별이가 불을 켜둔 채 잠이 든 탓이었다. 용선은 이불도 덮지 않고 불편하게 누워 있는 별이를 흘끗 보았다. 그리곤 들고 있던 대본과 콘티를 식탁 위에 올려 두고 별이가 누워 있는 곳으로 한 발짝씩 걸어 갔다.
"끄응... 끄응..."
무슨 안 좋은 꿈이라도 꾸는 모양인지 찌푸려진 얼굴로 끙끙 대는 별이를 용선이 바로 누여주었다. 엎어져 있던 자세에서 바로 누우니 좀 편한 모양인지 별이의 표정도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용선은 별이에게 이불을 잘 덮어 주고 일어나 방 불을 껐다.
*
남해에서의 세 번째 날이 밝았다. 어제는 힘들었지만 어제는 어제, 오늘은 오늘인지라 모두들 다시 활기가 넘쳤다. 무엇보다 오늘은 지방에 함께 내려온 배우들과 스태프 모두 함께 촬영을 마치고 가벼운 회식이 잡혀 있었기에 더더욱 활기가 도는 것 같았다. 촬영도 수월하게 진행 됐다. 속도도 빠르게 진행 됐고, 분위기도 좋았다.
"OK, 컷. 수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촬영을 끝내는 용선의 컷 소리. 모두가 신이 나서 기지개를 피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오늘 회식 장소는 전체 문자로 보내드린 곳입니다! 단체 톡방에도 올려 놨습니다!"
수영이 큰 소리로 소리 쳤다. 별이는 서둘러 정리를 시작 했다. 별이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연출부 박스 안으로 짐을 넣고 정리하고 있을 때, 그 위로 무전기가 놓여졌다.
"고맙습니다, 선배애......?"
당연히 수영이 갔다준 걸로 알았던 별이가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하다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무전기를 건네고 자기 앞에 서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용선이었다. 용선은 놀란 표정으로 일시정지된 별이를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왜."
"아니. 그... 아니에요."
별이가 당황하며 허둥지둥 마저 짐을 정리했다. 용선이 직접 자기가 쓰던 물건을 갖다 준 경우는 처음이었다. 항상 자기가 쓰던 물건은 모니터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는데 직접 주다니. 별이는 지금의 용선이 많이 낯설었다.
"빨리 해. 우리 팀이 제일 늦잖아."
말을 마친 용선이 별이를 뒤로 하고 촬영 버스쪽으로 걸어 갔다. 별이는 정리하던 손놀림을 잠시 멈추고 멀어져 가는 용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식당에 두 주연배우가 들어선 순간 큰 환호성이 터졌다. 살짝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들어오는 혜진과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며 들어오는 지웅.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리가 비어 있는 용선의 앞 자리로 와 앉았다. 별이는 용선의 옆에 앉아 있었다. 셋과 같은 테이블은 아니었지만 촬영장이 아닌 이런 사적인 자리에서 배우들을 보는 감회가 참 새로웠다.
"안 피곤해요?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어도 됐는데."
"아니에요. 다들 회식한다는데 저도 오랜만에 회식 자리 오고 싶었는걸요."
용선의 말에 지웅이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지웅은 나름 인지도와 인기를 가지고 있는 배우였다. 그는 자기가 존경하는 감독, 작가, 선배와 이 작품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얼마나 영광인지에 대해 막 이야기를 늘어 놓기 시작했다.
회식 분위기는 무르 익으며 테이블에 술병도 하나 둘 늘어났다. 벌써부터 다른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사진을 찍으며 지금을 추억하고 있었다.
"정말 대본이 너무 좋은 거 같아요. 진짜 읽을 때마다 감탄해요. 나중에 전체 회식 때는 정 작가님도 만나 뵐 수 있겠죠?"
지웅의 말에 용선과 혜진이 동시에 멈칫하였다. 용선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이죠."
"감독님! 안녕하세요!"
그때. 지웅의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스태프가 잠시 화장실로 자리를 비운 사이 배우 오레오가 냉큼 자리를 차지해 들어왔다.
"선배님들도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용선과 혜진은 말없이 목례로 그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선배님들 진짜 제가 많이 배웁니다. 정말 함께하게 돼서 너무 영광입니다!"
술이 들어가 목소리가 커진 레오가 고개를 푸욱 숙였다. 혜진은 민망한 듯 웃었고 용선은 무덤덤한 얼굴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근데 지금 무슨 얘기 하고 계셨어요?"
"그냥 정 작가님 얘기 하고 있었어요."
"아 정 작가님! 우리 천재 드라마 작가 정휘인 작가님!!"
큰 목소리로 우렁차게 휘인의 이름을 말하는 레오를 보며 용선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감독님! 정 작가님이랑 친하시다면서요. 그래서 이 드라마도 같이 하는 거랬는데. 맞죠?"
"아. 네... 뭐."
"아아! 맞다 맞다! 혜진 선배님도 정 작가님이랑 친하다고 들었는데. 친구라면서요!"
가만히 앉아 물에 담긴 컵을 바라보고 있던 혜진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혜진에게 휘인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기엔 그리 좋은 주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이 곳에 오직 용선뿐이었기 때문에 마냥 그 주제를 피할 수만은 없었다.
"네... 뭐..."
"정말요? 혜진씨 정 작가님이랑 친구셨어요?"
지웅은 몰랐던 눈치인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5년 전에 <피아노맨> 같이 하면서 친해졌다고 들었어요."
"아 그렇지. <피아노맨>이 정 작가님 꺼였죠."
"두 분이 동갑이라면서요. 그래서 바로 친해졌다는 거 같은데."
지웅과 레오 둘은 신이 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속은 불편함으로 들끓지만 애써 웃어보이며 앉아 있는 혜진을 보며 용선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정휘인 작가님 미혼이라고 들었는데 그래도 사귀는 사람은 있겠죠? 그렇게 예쁘신데. 아 물론 감독님도 정말 예쁘시고요! 하하."
"오레오씨는 참 들은 얘기가 많네요."
용선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차갑고 딱딱해진 표정과 말투에 혜진이 슬쩍 용선을 쳐다보았다.
"오레오씨 우리 스탭들한테 들어보니까 좀 불편한 얘기들이 들리던데."
"네?"
분위기 모르고 떠들던 레오의 표정이 용선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굳어졌다.
"아니 그냥. 들린다구요."
"죄, 죄송합니다."
레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용선은 빈 물컵에 물을 따랐다.
"서울 올라가면. 다시 잘 해봅시다."
용선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보였다. 레오는 연거푸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열심히 하겠습니다!" 소리쳤다.
레오가 자리를 비우고 다시 두 주연배우와 용선 만이 남았다. 어색한 공기가 세 사람 사이를 감돌자 분위기를 바꿔볼 목적으로 지웅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중엔 정 작가님하고도 같이 자리하면 좋을 것 같아요. 하하."
눈치가 없는 건지, 타이밍을 못 맞추는 건지. 용선은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기며 멋쩍게 웃고 있는 지웅을 한번 보았다. 그때, 쭈뼛거리며 영은이 지웅 쪽으로 다가오며 용선의 눈치를 살폈다. 영은이 두 손으로 폰을 꼭 잡고 있는 걸 본 용선은 영은에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곧 영은이 밝게 웃으며 지웅의 옆으로 다가왔다.
"저... 혹시 사진 한 장만 찍을 수 있을까요?"
"앗. 네 물론이죠!"
영은이 폰을 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하자 곧 지웅의 주위로 다른 스태프들이 몰려 들기 시작했다. 용선은 혜진에게 "잠깐 나갈까요?" 작게 소근 거렸다.
*
시끌벅적한 식당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온 용선과 혜진이 크게 숨을 들이 마셨다.
"감독님. 괜찮으면 잠깐 같이 걸어도 될까요?"
혜진의 말에 용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시끌벅적한 식당과 멀어지며 밤 바다의 파도 소리가 가까워졌다. 바닷 바람이 시원하게 두 사람의 머리를 흩트렸다.
"그... 저..."
산책로 울타리에 기대 자리 잡은 혜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두 손을 꼼지락 거리는 게 쉽게 입이 떨어지지 만은 않는 모양이었다.
"정 작가는 잘 지내요. 뭐, 아직 마지막 화가 안 나와서 답답해 하는 것 같지만."
용선이 먼저 선수를 쳐 휘인의 이야기를 꺼냈다. 혜진은 차마 떨어지지 않았던 휘인의 이야기를 용선이 먼저 꺼내주자 고마운 눈치였다.
"혜진씨는 정 작가 어떻게 생각해요?"
"네?"
"아니 그냥. 지금의 혜진씨는 휘인이를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서."
혜진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머릿속도 마음 속도 정리 된 게 하나도 없었다. 정리된 게 없다보니 무어라 쉽게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용선은 말없이 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서울 하늘과 달리 탁 트여 있는 남해의 하늘엔 간간히 별들이 빛을 보이고 있었다.
"미안해요."
혜진의 목소리는 작고 여렸다. 그리고 갈라져 있으면서도 촉촉했다.
"너무 미안해서... 너무 미안한데..."
용선이 고개를 돌려 혜진을 보았다. 올려다 보았던 하늘에 있던 별이 혜진의 눈에 담긴 것 마냥, 혜진의 눈이 반짝였다.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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