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02
<그들이 사는 세상>
*2화
늦은 밤까지 이뤄졌던 촬영이 끝나고 크고 화려하지만 적막하고 쓸쓸한 집으로 돌아온 혜진이 소파에 몸을 담았다. 혜진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요 며칠 동안 쉴새 없는 촬영 속에 정신 없이 보냈던 혜진이었다. 사전제작 드라마라 여유는 있는 편이었지만, 오랜만에 찍는 드라마라는 사실이 혜진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혜진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건 제 손에 들어오는 대본이었다.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이 쓴, 휘인이 쓴 대본.
천천히 눈을 뜬 혜진의 앞에 테이블에 올려진 대본이 보였다.
데칼코마니. 안혜진 배우님. 감독 김용선. 작가 정휘인...
혜진은 손을 뻗어 대본을 들었다. 촤르르. 대본이 넘어가는 소리가 적막한 집 안에 울렸다. 형광펜과 메모의 흔적이 담긴 혜진의 대본. 대본 연구를 열심히하는 편인 혜진의 대본은 항상 수험생의 문제집 같았다.
'이야. 보기보다 열심히라니까?'
혜진의 대본을 보며 휘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본의 마지막 장이 넘어가고. 혜진은 말없이 대본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넌 참 좋은 글을 써."
조용히 읊조린 혜진이 대본을 다시 테이블 위로 놓았다. 그리고 제 옆에 놓인 핸드폰을 들었다. 화면을 키고, 연락처로 들어가고. 목록을 쓱쓱 내려가다 멈춰선 이름.
휘니♥.
휘인과 사귀던 때부터 저장된 이름이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휘인과 헤어지고, 또 2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이름. 혜진은 휘인의 번호를 지우지도 못했고 이름을 바꾸지도 못했다.
다른 사람을 만날 땐 그닥 신경 쓰이지 않아서. 휘인과 헤어졌을 땐 미련 때문에. 2년이 흐른 지금은... 그리움 때문에.
그 때. 갑자기 혜진의 손에 들린 핸드폰이 진동을 내뿜었다. 그리고 화면에 뜨는 발신자는 다름 아닌 혜진이 계속 보고 있던 이름이었다.
혜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자기가 헛걸 봤나 싶어 눈을 비비기도 하고 눈을 크게 떠보기도 하고. 이리보고 저리봐도 지금 전화를 건 인물은 휘인이었다. 이유를 찾을 정신은 없었다. 혜진은 떨리는 손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2년 만에 처음 하는 통화였다. 2년 동안 수도 없이 하고 싶었던 통화이기도 했다. 혜진의 손이 얼마나 휘인의 이름 앞에서 방황했는지, 그건 혜진만 아는 일이었다. 술을 마신 날이면 더더욱 혜진의 손가락은 휘인의 번호를 찾았고, 수많은 고민과 눈물 속에 거뒀었다.
"......여보세요."
혹시라도 제 떨림이 드러날까, 조심스럽게 혜진이 먼저 입을 뗐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상대의 반응에 혜진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야."
아.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핸드폰을 타고 넘어온 휘인의 목소리에 가슴이 확 막혔다. 건조하면서도 따뜻한 그 목소리. 대본 리딩 때 아무리 마주 보고 싶어도 마주 볼 수 없었고, 대화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휘인이 지금 자기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응... 오랜... 만이네."
혜진의 입에서 옅은 미소가 새어 나왔다. 지금 휘인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자기처럼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있을까.
"다름이 아니라... 내가 오늘 편집본을 봤거든. 여전히 네 연기 좋긴 한데... 초반부는 그렇게 어둡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상대 배우 볼 때, 눈빛이... 그냥 내가 느끼는 건데 너무 감정이 없어."
혜진의 입에서 소리 없는 탄식이 나왔다. 난 대체 뭘 바란 걸까. 혜진은 머리를 짚었다.
"용선 감독님이 알아서 잘 해주시만... 내가 특별히 원하는 느낌도 있고 해서 직접 전화 했어."
"응. 그래... 미안. 내가 연기를 좀 쉬어서 감을 잃었나봐."
"감을 잃은 건 아니고. 그냥, 내 드라마라고 생각하지 말고 연기해줬으면 좋겠어."
"응?"
"그게 널 누르고 있는 것 같아. 불편하게."
"아니야!"
휘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혜진이 크게 부정했다. 좀 급작스러웠던걸까. 휘인이 다시 조용해졌다. 혜진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사실 혜진은 알고 있었다. 촬영을 하는 내내 혜진의 머릿속엔 휘인이 가득했다는 걸. 이 드라마는 휘인의 드라마라는 것... 제가 지금 내뱉고 있는 이 대사는 휘인이 쓴 대사라는 것. 그게 촬영 내내 혜진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널 캐스팅한건 단지 차지연이란 역할과 어울렸기 때문이야."
그래. 그렇겠지. 숙여지는 고개에 따라 혜진의 머리칼이 내려와 얼굴을 가렸다.
"다음 촬영부터 주의할께."
"응... 다음 촬영부터 지방 씬이라며. 거기가 드라마의 큰 전환점이기도 하니까 신경써줬으면 좋겠어."
"그래."
"......그럼 쉬어."
"응."
전화가 끊기자 혜진은 거칠게 핸드폰을 소파에 내리 꽂았다. 반동으로 튀어오른 핸드폰은 통통 튀어 바닥으로 떨어져버리고, 혜진은 무릎 속에 얼굴을 묻었다.
"뭘 바란 거야..."
혜진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렇게 혜진은 한동안 어둠 속에 고개를 박았다. 뜨거웠던 눈가도 뜨거웠던 심장도 서서히 제 온도를 찾을 때, 혜진이 고개를 들어 바닥에 덩그러니 떨어진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화면을 타닥타닥 두드리고, 마지막 움직임과 함께 화면에 나타나는 이름. 2년간 바꾸지 못했던 이름이 2년 만에 새 이름을 얻었다.
정휘인 작가.
새로운 이름을 우두커니 쳐다보던 혜진이 화면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선배! 제가 그렇게 잘못했어요? 네? 아니 왜 감독님은 항상 나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에요 왜!"
방송국 근처 고깃집에 자리한 별이와 수영. 이미 상에는 소주 2병과 맥주 3병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붉어진 얼굴로 신세를 한탄하는 별이와 앞에서 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고 있는 수영이었다.
"진짜... 오늘도... 오레오가 자꾸 시간 끌어서 늦은건데 왜 나한테 뭐라고 해요 왜! 스타병 걸린 그 새끼가 문제지!"
"야야 누가 듣겠다."
오레오는 드라마 상에서 두 주인공을 방해하는 캐릭터였다. 잘생기고 반반한 얼굴로 인기를 끈지 얼마 안 되는 배우여서 그런지 소위 스타병이라고 하는 증세가 조금 있었다. 혜진이나 혜진의 상대역처럼 자기보다 선배인 사람들과 할 때는 지각도 하지 않고 좋은 사람인 것 마냥 행동하면서 자기 단독 씬이나 자기보다 후배인 배우들과 할 때는 거들먹거리고 빈둥거리기 일쑤였다.
"식사하시라고 말 거는 것도 저 무서워서 못하겠어요..."
별이가 입을 삐죽였다.
"제가 말만 걸려고 하면 눈을 이케! 팍! 떠가지고! 엉! 너 무슨 말이라도 해봐 가만 안둬 이런 눈으로 본다고요!"
별이가 두 손으로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용선의 흉내를 냈다. 물론 용선의 눈꼬리는 그렇게 올라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너 진짜 잘하고 있어. 용선 선배님 밑에서 너 정도로 잘하는 애 없었다니까?"
수영이 별이를 달래기 위한 사탕발림이 조금 담긴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 말이 또 듣기 좋았던 모양인지 별이가 헤실헤실 웃음을 보였다. 수영은 별이의 앞접시에 고기를 한 점 놓아주었다.
"그르니까~ 그만두지말고 끝까지 가자. 알았지~?"
수영의 입장에서 막내가 또 도망가버리는 건 불편한 일이었다. 다시 사람을 구해야 하고, 일을 가르쳐야 하는 과정이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이미 방송국 내에 쓸만한 막내들은 죄다 수영에게 제발 용선의 드라마만은 부르지 말아달라고 애걸복걸을 하고 있으니...
"진짜 마녀야! 그러니까 애인도 없고 후배들이 팀에도 안 들어가려고 하고 그러는거지! 분명이 모쏠일거야. 그런 사람을 누가 만나냐!"
"그래도 용선 선배 인기 많은-"
"다들 얼굴만 보고 그러는거죠! 얼굴만 예쁘면 뭐해, 성격이 더러운데!"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거야. 예전에 선배님이 그랬는데, 이 바닥이 많이 힘들고 고되잖아. 그니까 잘 버티라고-"
"그니까 그걸 좀 좋게 말해주면 어디 덧나요? 당근과 채찍이란 말이 왜 있는데? 아니 맨날 채찍질만 아주~ 맨날 찰싹 찰싹."
수영의 말을 계속 끊어가며 별이가 소리쳤다. 채찍을 휘두르는 듯한 동작까지 취해가며 말을 하고 있던 그 순간 별이의 테이블에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수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순간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버렸다.
"미안한데 좀 작게 말해줄래?"
별이가 채찍을 휘두르던 움직임을 거두고 목소리가 들리는 제 위로 고개를 들었다.
"헉......"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별이가 급히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지금 입을 아무리 막아봤자 자기가 내뱉은 말들을 다신 주워담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들어오는 입구부터 소리가 들려. 안 듣고 싶어도 그렇게 말하면 들을 수밖에 없잖아."
용선이 차가운 눈으로 별이를 내려다 보았다. 그 중압감에 별이는 지하로 파묻히는 기분이었다.
"그, 그, 그게..."
"내 욕 한 두번 듣는 것도 아니고. 욕하는 건 상관없는데 이왕이면 너무 들리게는 하지 말자. 여기 다른 사람도 많다?"
용선이 미소를 지었다. 분명 미소긴 미손데... 미소가 아니다. 용선이 별이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다. 용선의 손이 닿을 때마다 별이의 온 몸이 반응했다.
"어, 어, 언제 오, 오, 오셨, 어요...?
덜덜 떨며 별이가 겨우 겨우 말을 내뱉었다.
"'마녀야!' 부터?"
별이의 눈 앞이 새까맣게 물드는 순간이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돌리고 싶었다. 아니 시간을 돌려봤자 자기는 용선 욕을 했겠지. 중학교 때 성적표를 조작했던 걸 부모님한테 걸렸을 때보다, 고등학교 때 야자 튀고 떡볶이 먹다 담임한테 걸렸을 때보다 더 무서운 지금이었다.
"니가 나 욕했다는 걸로 너 대하는 태도는 안 변하니까 수영이 힘들게 하지 말고 휴일 잘 쉬고 다음 촬영 때 나와."
별이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차라리 화를 내지. 침착한 모습으로 너무나도 차분하게 말하는 용선의 모습에 별이는 더 공포감을 느꼈다. 그만둬야 겠다. 별이의 머릿속에 그토록 밀어냈던 결심이 자리를 잡으려고 했던 순간.
"혹시라도 그만둘 생각이면 내 팀에서 나가는 게 아니라 방송국 나갈 각오하고 그만 둬."
할 말을 마친 용선은 수영에게 재밌게 놀라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일행들이 있는 쪽으로 사라졌다. 용선이 사라지고 나서도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앉아 있는 별이의 얼굴은 완전 혼이 나간 얼굴이었다.
"별...아...?"
수영이 조심스럽게 별이를 불렀다. 별이의 고개가 고장난 로봇마냥 삐그덕 거리며 돌아 수영을 마주했다.
"저 어떡해요...?"
"잘 될.... 되겠지?"
수영도 이런 일은 처음인 모양인지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별이는 절망 속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한편, 일행 사이에 앉은 용선은 고개를 살짝 돌려 얼굴을 가리고 있는 별이를 힐끔 쳐다보았다. 별이의 주변으로만 먹구름이 가득 낀 것 같았다. 다시 고개를 돌리는 용선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