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18

백뚠 2019. 3. 29. 16:48

[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18화

 

 

 

CF 촬영 현장. 스튜디오에서 스태프들이 세팅을 준비하는 사이 혜진은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대기실에서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혜진의 손에는 촬영장에 오기 전 매니저에게 부탁한 따뜻한 쌍화탕 한 병이 쥐어져 있었다. 손에 꼭 쥐면 쥘수록 아직 가시지 않은 온기는 혜진의 손을 타고 온 몸으로 느껴졌다.

 

 

"콜록콜록."

"감기 걸렸어요?"

 

 

혜진의 옆에서 혜진의 화장을 봐주던 스타일리스트가 고개를 돌리며 작은 기침을 하자 혜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감기까진 아닌 거 같은데 몸이 좀 춥긴 해요."

"요즘 일교차가 심해서 그런가. 조심해요."

"네. 언니도 몸 조심하세요."

 

 

혜진은 손에 쥔 쌍화탕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곤 손에 계속 쥐고 있던 쌍화탕을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다.

 

 

"먹어요."

"와! 고맙습니다!"

 

 

혜진의 손 안에서 온기를 간직한 쌍화탕이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네졌다. 혜진은 자기 손을 떠난 쌍화탕을 보며 줄곧 머릿속에 떠오르던 한 사람을 떠올렸다. 용선의 통화 내용을 듣고 휘인이가 아프단 얘길 들었을 때, 혜진은 신경쓰지 않으려 계속해서 노력했다. 그러나 아프단 얘기를 듣자마자 떠오른 생각은 '또 아프구나' 였다. 마감과 함께 찾아오는 휘인의 저주같은 몸살 병은 옛 연인이었던 혜진도 너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어김없이 아픈 휘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땐 속상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와 헤어진 이후로 혼자 아파했을 휘인의 모습이 떠올랐으니까. 그러나 혜진은 딱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혼자 속으로 아파하고 걱정하는 그 정도. 이젠 정말 휘인과의 인연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았으니까.

 

 

"혜진씨. 촬영 들어갈께요~"

 

 

현장 스태프가 대기실로 와 혜진을 불렀다. 혜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덮고 있던 담요를 내려 놓았다.

 

 

 

 

*

 

 

 

"컷! OK!"

"와아!"

 

 

용선의 마지막 싸인에 촬영장에 큰 환호성이 퍼졌다. 박수를 치며 스태프들은 서로에게 수고했단 인사를 건넸다. 용선도 헤드셋을 내려놓으며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길었던 <데칼코마니> 드라마의 촬영이 모두 끝이 났다. 매일 아침부터 나와 늦은 밤까지 하루가 아깝게 촬영했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힘들었던 새벽 촬영, 밤샘 촬영. 그리고 추억이 깃든 지방 촬영까지. 뜻깊었던 하나의 촬영이 또 이렇게 마무리 되어졌다. 용선은 이번 촬영도 무사히 지나간 것에 감사 인사를 드렸다.

 

 

"김감독! 수고했어!"

"감독님! 수고하셨어요!"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끌어온 이 팀의 선장 용선에게 다가온 스태프들은 용선에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워주고 있었다. 용선 역시 다른 스태프들에게 감사 인사와 수고했단 말을 전하며 촬영의 마지막을 매듭 짓고 있었다.

 

 

"선배. 수고하셨어요."

 

 

많은 스태프들이 용선을 지나치고, 마지막으로 다가온 사람은 별이였다. 수줍은 얼굴로 다가온 별이를 보며 용선이 작게 웃음 지었다.

 

 

"너도 고생했어. 내 밑에서 일하기 힘들었을텐데 그동안 잘 따라와줘서 고맙다."

 

 

용선은 별이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곤 자리를 뜨기 위해 걸음을 뗐다. 

 

 

"좋았어요."

"어?"

"좋았다구요."

"뭐가?"

"선배요."

 

 

지나치려는 용선을 붙잡은 별이는 그렇게 작은 진심을 고백했다. 부끄러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눈은 피하지 않고 올곧이 마주쳐오는 별이를 보며 용선은 마음이 간질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나도 좋았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용선도 별이에게 작은 진심을 담은 말을 건넸다.

 

 

 

 

*

 

 

 

 

고깃집 하나를 차지한 <데칼코마니> 팀들은 먹어라 마셔라하며 마지막 날을 남겼다. 오랜 시간 함께 일한 만큼 친해진 사람들. 첫 만남과는 다른 따뜻하고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모든 사람들의 얼굴엔 웃음이 한 가득이었다.

 

 

"얘 처음 들어왔을 때 엄청 욕먹은 거 알아? 일을 지지리 못해야지!"

"벌써 다음 촬영 들어가세요? 뭔데요?"

"인마! 너 우리 팀으로 올 생각 없어? 내가 잘해줄께!"

"진짜 얘 갈수록 초췌해져가는거 보고 웃겨 죽는 줄 알았어."

 

 

가지각색의 대화가 오고 갔다. 날이 날인지라 술을 잘 하지 않는 용선도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서 빨간 얼굴이 되었고 별이는 이미 신이 머리 끝까지 난 상태였다.

 

 

"2차 가야지 2차! 우리 노래방 갑시다!"

"어우 좋지! 노래방 가면 술은 제가 쏩니다!"

"와!!!"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며 별이는 헤실헤실거리며 이 대화 저 대화에 참여했다. 별이 입장에서도 매우 오랜만에 갖는 즐거운 자리였다. 매일같이 보던 사람들과 이젠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아쉽기도 했고, 다음 드라마 들어갈 때까진 그래도 여유가 생길테니 다행이기도 한 시원섭섭한 기분이었다.

 

 

"일어날까요? 2차 갑시다, 2차!"

 

 

실컷 배를 채우고 떠든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부터 노래방을 잡아놨다는 말에 사람들은 2차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별이는 다른 스태프들과 함께 노래방으로 걸음을 옮기려다 식당 앞에 멈춰선 용선을 보곤 그쪽으로 걸어갔다.

 

 

"김감독님 안 가세요?"

"저는 편집이 남아있는걸요."

"아휴. 하루만 좀 쉬어요. 방송 아직 한달 정도 남았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긴한데 최대한 빨리 해달라고 하니까."

 

 

촬영은 끝났지만 편집이 남아있는 용선은 1차에서 마무리하려는 눈치였다. 용선의 주위에 있던 스태프들은 아쉬움을 표하며 언제든 오고 싶을 때 오라는 말을 남기곤 2차 장소로 이동했다.

 

 

"선배. 들어가시게요?"

"응. 가서 더 놀아."

 

 

고깃집에서 하도 다른 스태프들과 웃고 떠드느라 용선과 대화다운 대화도 해보지 못한 별이는 아쉬운 티가 역력했다. 식당을 가득 채웠던 사람들이 모두 빠지고 나니 조용해진 식당 앞에서 별이는 애꿎은 바닥만 발끝으로 치고 있었다.

 

 

"왜애. 뭐가 불만인데."

"선배가 없는거요."

 

 

확실히 술이 들어가긴 했는지 더 대담해진 별이의 대사였다. 용선은 살짝 놀라 동그란 눈으로 별이를 쳐다보았다.

 

 

"나 없으면 좋지. 너네 나 있으면 눈치 보여서 제대로 놀지도 못할껄."

"저 그런 눈치 안 봐요."

 

 

별이답게 대꾸하는 모습을 보며 용선이 작게 웃음을 비쳤다.

 

 

"얼른 가서 놀아. 내일은 너도 수영이도 나오지 말고 집에서 쉬어. 수영이한테도 내일 나오지 말라고 말해줘."

 

 

계속 보내려는 용선과 달리 별이는 쉽게 발을 떼지 않았다. 계속 아쉬운 듯, 계속 이 자리에 있고 싶은 듯 그렇게 용선의 곁에서 쉽게 떠나지 못했다.

 

 

"싫어요."

"뭐?"

"저 선배랑 같이 있고 싶어요."

 

 

정말 오늘따라 대담한 별이었다. 반대로 용선은 당황한 눈치였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적극적으로 몰아치는 별이를 보며 용선은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헷갈린 눈치였다.

 

 

"너 취했어?"

"있잖아요."

"어?"

"우리 둘이만 따로 2차 갈래요?"

 

 

꽤 많은 용기가 필요한 말이었다. 별이는 왠지 오늘을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다. 촬영도 끝난 마당에 이제 마주치는 건 방송국뿐일테니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싶었다.

 

 

"영화 보러 가요. 촬영 끝나면 같이 영화보기로 했잖아요."

 

 

용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황한 얼굴로 멍하니 서있는 용선을 보던 별이가 용선의 손목을 잡았다. 놀란 용선이 잡힌 자신의 손목을 보다 앞에 서있는 별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용선의 손목을 잡은 별이의 손은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이젠 용선의 손을 잡은 별이가 다시 한번 용기를 얹은 말을 건넸다.

 

 

"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