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17
[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17화
늦은 밤. 퇴근하던 사람들을 붙잡아 두고 있는 길거리 포장마차. 어묵탕과 소주병이 놓여진 테이블에 앉아 있는 별이는 안주는 입에도 대지 않은 채 연거푸 소주만 들이 마시고 있었다.
"야. 그만 마셔."
앞에 앉아 있던 수영의 제지에 별이가 흐린 미소를 지으며 마시려던 소주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너 진짜 괜찮아?"
"넵. 괜찮아요."
"아닌거 같은데."
"진짜 괜찮아요."
"아니야. 너 그 날 이후로 계속 이상해."
그 날. 수영이 말한 그 날이란 단어에 그 날의 장면이 비디오처럼 재생됐다. 방송국에 들어와 처음 듣는 용선에 대한 뒷담화. 좋지 않았던 말. 선배를 꼬셔 B팀 감독이 되었고 거기서 더해 메인 자리까지 꿰찼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았고, 아무리 아니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같이 고민만 늘어갔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못하는 고민이. 왜 이런 고민이 생긴걸까. 살며 많은 이들의 안 좋은 뒷담화를 듣지 않았나. 왜 유독, 용선의 이야기에 이렇게 흔들리고 있을까. 별이는 답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이에요...?"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별이가 입을 뗐다.
"나도 정확한 건 몰라."
별이가 다시 소주잔을 잡았다.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급히 수영이 별이의 손을 잡아 끌어내렸다.
"야, 너 그만 마셔. 우리 내일도 촬영이잖아."
"아... 죄송해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휑한 눈으로 앉아 있는 별이를 보며 수영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알다시피 기훈 선배 드라마였던 <하얀 바람>에 B팀 감독으로 들어간 건 용선 선배가 맞아. 그리고 중간에 기훈 선배가 하차하고 용선 선배가 메인을 맡았지. 여기까진 다 사실이야."
수영이 자기 앞에 있던 소주를 한잔 털어넣었다.
"기훈 선배가 하차한 건... 장소 이동하다가 사고가 났어. 그래서 스태프들도 기훈 선배도 크게 다쳤지. 기사로는 부상이 심해서 하차한다고 나오긴 했는데... 사실 기훈 선배 별명 악덕 감독 맞아. 촬영 엄청 타이트하고 빡쎄. 테이크도 엄청 많이 가고 배우들한테 요구도 많이 하고. 그 사고도 거의 생방송처럼 진행되다가 급하게 장소 이동하다가 난 사고였어."
거기까지 들은 별이는 작은 안도를 느꼈다. 선배가 나쁜 게 아니야. 별이는 계속 머릿속에 그 말을 새기고 있었다.
"그래서 배우들이랑 스태프들한테 불만이 많이 나온 것도 맞아. 근데, 기훈 선배가 진짜 하차한 이유는 선배나 윗 분들이나 알겠지. 사고때문에 하차한건지 아님 정말 스태프들의 불만 때문인건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 용선 선배 때문인지."
다시 별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쁜 게 아니라고, 계속 되새기던 그 말이 다시 흐릿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훈 선배랑 용선 선배랑 진짜 뭐...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건진 나도 몰라. 아니 솔직히 드라마국에 있는 사람들 아무도 모를껄? 기훈 선배가 그렇게 말하니까 그렇다고 하는거지..."
수영에게 이야기를 들으면 조금 나아질 줄 알았다. 복잡했던 생각이 조금 정리되고 안정될 줄 알았는데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별이의 머릿속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럴거면 차라리 묻지를 말껄. 그런 후회마저 드는 별이였다. 별이는 다시 소주잔으로 손을 뻗었다.
*
"저기서 현수가 걸어오는데 지연이가 딱 알아보는 건 약간 텀이 필요하니까 조금 느리게. 자체 슬로우를 살짝 거는 거예요."
"네, 알겠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바스트 잡을 때... 아, 잠깐만요."
혜진에게 촬영 장면과 연기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용선이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잠시 말을 멈췄다. 발신자를 확인하곤 의외라는 듯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린 용선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여보세요."
용선이 통화를 하는 사이 혜진은 자기가 지을 표정을 연습하며 이 표정, 저 표정 지어보였다.
"휘인이 또 몸살 났어요?"
휘인이? 휘인이란 단어에 드라마 속 지연이었던 혜진이 안혜진이 되어 반응했다. 반응하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혜진은 용선에겐 시선을 두지 않았다.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그리고 휘인이란 단어를 잊기 위해 다시 드라마 속으로 빠져들어 연습을 재개했다.
"아, 아니에요. 저한테 전화 잘하셨어요. 걔 성격에 혼자 끙끙대고 있을 거 뻔한데요 뭐. 내일 어차피 휴차니까 제가 들를께요. 네. 고마워요."
전화를 끝낸 용선이 다시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있는 혜진을 힐끔 보았다.
"어디까지 얘기했죠?"
"아... 바스트 샷이요."
"아 그쵸. 거기선..."
말을 하며 용선이 계속 혜진의 얼굴을 살폈으나 혜진은 굉장히 무덤덤해보였다. 전혀 자기와 상관없는 통화를 들은 사람마냥.
"네. 그렇게 해주시면 돼요."
"네."
"아... 그럼 바로 슛 들어갈까요?"
오히려 눈치를 보는 건 용선 쪽이었다. 괜히 혜진의 눈치를 보던 용선은 딴 생각말고 촬영에 집중해야겠단 생각으로 고개를 크게 흔들곤 모니터 테이블로 걸어갔다.
*
밤새 편집에 매달린 용선은 숙직실에서 아침부터 잠깐 쪽잠을 자고 점심쯤 되서야 눈을 떴다. 지금쯤 출발해야 휘인의 점심을 챙겨줄 수 있었기에 무거운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이동했다.
'어? 문별이 저기서 뭐하는거야.'
부스스하게 일어난 머리를 슬슬 긁으며 용선이 화장실 앞에서 들어가지도 않고 망부석처럼 서있는 별이를 발견했다. 정말 바닥에 뿌리라도 내린 듯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는 별이. 게다가 별이는 자기 뒤로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진짜?"
"응! 준형선배한테 들었다니까! 기훈 선배님이랑 김용선 선배랑 사귀었다고!"
"대~박. 하긴 비주얼로는 어울리긴 한다. 선남선녀긴 하잖아."
"근데 김용선 선배가 완전 이용만 하다 버렸대."
"뭐어?!"
그래서 이렇게 있었던 거구나- 용선이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화장실 앞에 다다르자 들리는 대화소리. 그건 용선에 대한 이야기였다. 기훈이 복귀하고 수도 없이 들리던, 아니, 그 이전부터 많이 듣던 이야기. 별이의 뒤에서 가만히 대화를 듣던 용선이 손을 뻗어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돌처럼 굳어 있던 별이의 고개가 들리고, 용선의 얼굴을 확인한 별이는 깜짝 놀란 얼굴이 되어 이번엔 다른 의미로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그 선배 얼굴로 많이... 헉."
"아...아... 안녕...하세요..."
화장실로 들어온 용선을 발견한 두 사람은 급히 입을 막으며 용선의 눈치를 봤다. 용선은 무표정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나쳐 세면대 앞으로 갔다. 그리고 거울을 통해 용선이 그들을 쳐다보니 도둑질하다 걸린 것마냥 급하게 두 사람은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선...배..."
그리고 그 빈 화장실에 미처 들어오지 못했던 별이가 들어왔다. 아주 슬픈 눈을 하고.
"너 왜 그런 표정을 짓냐."
용선이 물을 틀고 세수를 시작했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으니 잠도 정신도 말짱하게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별이는 용선의 뒤에서 가만히 그런 용선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 나였네."
니가 아니라 내가 문제였어. 수도를 잠근 용선이 세면대에 두 팔을 기댄 채 조용히 읊조렸다. 젖은 머리카락에 가린 용선의 눈은 슬픔을 담고 있었으나 별이는 머리카락에 가려진 그 눈을 볼 수 없었다.
"별아. 그냥 내가 선배로서 조언 하나만 해줄까."
용선이 젖은 얼굴 그대로 별이에게 몸을 돌려 말했다. 물방울이 뚝뚝 용선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젖은 얼굴의 용선은 마치 눈물을 흘리는 사람 같았다.
"어디나 그렇겠지만 이 바닥에선 더더욱."
용선과 별이의 눈이 마주쳤다. 용선은 계속 말을 이었다.
"사람도 말도 함부로 믿으면 안 돼."
말을 다 뱉은 용선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별이는 슬픈건지 불만인건지 모를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나 왜 이런 말을 너한테 했지."
용선은 젖은 얼굴을 다시 두 손으로 한번 쓸었다. 얼굴에 가득찼던 물기가 손과 함께 쓸려 내려갔다.
"오랜만에 휴찬데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
거기까지 말을 마친 용선은 별이를 지나 화장실을 나갔다. 화장실에 홀로 남은 별이는 얼마 있지 않아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아 머리를 짚었다.
*
띠리링. 도어락이 열리고 용선이 휘인의 작업실 안으로 들어왔다. 휘인의 작업실은 개미 한 마리 살지 않는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용선은 사온 죽과 떡볶이를 식탁 위에 올려 놓고 휘인의 방으로 걸어갔다.
똑똑똑.
"휘인아. 자?"
"뭐야. 언니 왜 왔어?"
안에서 들리는 이미 반쯤은 나가버린 휘인의 목소리에 용선이 피식 웃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나 들어간다."
"엉."
방 안의 휘인은 여전히 이불에 몸을 꽁꽁 싸매고 있는 중이었다. 여전히 창백하고 기운없는 얼굴은 휘인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연례행사야 아주."
"언니까지 잔소리할거면 가. 안 그래도 지영이한테 많이 들었어."
휘인이 잔소리는 듣기 싫다는 듯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안 그래도 적당히 있다 갈거거든?"
용선이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누워서 안 심심해? 태블릿에 영화 좀 받아 왔는데. 머리 아파서 못 보나?"
"모레 쯤엔 볼 수 있어. 놓고 가."
"하도 아프니까 이제 언제 어떻게 아프고 안 아플지도 알고. 좋네."
"놀리는거지?"
휘인이 다시 이불 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런 휘인을 보며 미소짓던 용선은 여기 오기 전 화장실에서의 일이 생각나 잠시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 미세한 차이를 놓칠리가 없는 휘인이 말을 꺼냈다.
"언니 무슨 일 있어?"
"나 가끔 니가 무섭다니까."
"걔 때문이지? 그 감독."
용선이 씁쓸하게 웃었다.
"참 언니나 나나 답답하게 사는 거 같아."
"알긴 아네. 자기 답답한 거."
"남 말 하지마시죠, 김감독님."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둘 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휘인은 이불에 박혀있던 몸을 꺼내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 앉았다.
"힘들면 누워있어."
"아냐. 너무 누워있어서 허리아파."
"이야. 완전 환자네. 얼굴이 반쪽이야."
"그래서. 그 새끼가 또 루머 퍼트리고 다녀?"
"그거야 원래 있었던 일이지 뭐."
"초장에 잡았어야 했어. 그냥 놔두니까 일이 이렇게 커졌잖아."
"이것도 한달 정도 있으면 조용해져."
"그럼 뭐해. 사람들이 다 그 새끼 말만 믿고 언니 나쁜 년이라 그러잖아."
휘인이 탁자에 놓인 컵을 집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말라 부르튼 입술이 물에 젖어 잠시 촉촉해졌다.
"넌 나 나쁜 년 아닌 거 알잖아."
"뭐야? 징그러! 지금 난 너만 있으면 돼, 뭐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지?"
"아니, 로맨스 드라마는 잘도 쓰면서 이런 건 엄청 오글거려한다니까."
"못하니까 글로 쓰는거야."
"아아~ 그래~?"
용선은 휘인을 귀엽다는 듯 쳐다보며 씩 웃었다.
"근데 걔도 그 소문을 들었더라. 하긴... 방송국에 있는데 당연한 일인가."
용선이 별이를 떠올리며 어딘가 씁쓰름한 표정을 지었다.
"걔가 누군데? 아...! 걔? 막내?"
눈치가 빠른 휘인은 곧바로 '걔'의 정체를 알아내고 바로 말을 이었다.
"걔가 뭐래?"
"뭐라는 건 아니고. 좀 충격인가봐. 애가 넋이 나가있어."
"그렇겠다."
휘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했다.
"근데 걔는... 그 말 안 믿었으면 좋겠더라고."
용선이 어디에서도 말하지 못했던 진심을 작게 꺼내 말했다. 용선의 말을 들은 휘인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휘인은 동그란 눈으로 동그란 용선의 머리를 보며 잡고 있는 컵을 만지작거렸다.
"그럼 말해줘야지. 아니라고."
휘인의 말에 용선이 고개를 들었다. 다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둘 다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이 짧은 시간 급속도로 친해진 건, 이렇게, 너무나도 닮은 구석이 있어서였다. 둘은 그 사실을 너무 잘 알았다.
"밥이나 먹자. 울 휘이니~ 언니가 밥 줄께요~"
"애 취급 하지마!!"
자기 머릴 쓰다듬는 용선의 손길을 필사적으로 피하며 빨개진 얼굴의 휘인이 열심히 발버둥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