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썬/휜화] 그들이 사는 세상 06
<그들이 사는 세상>
*6화
아침을 깨우는 알람 소리에 별이가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았다. 시끄럽게 울려 대던 알람을 끄고서도 한참을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별이를 보며 용선이 시계를 살폈다. 집합 시간까진 3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이미 30분 전에 일어난 용선은 벌써 씻고 외출 준비도 끝내 있는 상태였다. 용선은 미동도 없이 잠에 빠져든 별이를 보다 어제 사다 놓은 바나나 우유를 냉장고에서 꺼내 들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 후로도 5분 간격으로 별이의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울릴 때마다 재깍재깍 잘 끄기는 하는데 이불 속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별이를 보며 용선은 살짝 고민에 빠졌다.
집합 시간 10분 전. 이 정도면 깨워야겠지?
용선이 멀찍이 떨어져 별이를 불렀다.
"문별이."
죽은 듯이 누워있는 별이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용선은 머리를 긁적이며 별이의 옆으로 걸어갔다. 엎어져 베개에 짓눌린 별이의 표정이 꽤 귀여워 보였다. 용선은 별이의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다가 별이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일어나. 촬영 안 가?"
"5분 만요..."
눈도 뜨지 않은 채 찌푸려진 얼굴로 별이가 베개 속으로 얼굴을 묻었다.
5분은 무슨. 용선은 확- 이불을 들췄다.
"그냥 일어날래, 맞고 일어날래?"
으스스한 용선의 말에 별이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제야 별이의 정신이 서서히 깨어났다. 자기는 지금 지방 촬영을 왔으며, 용선과 한 방을 썼고, 집합 시간에 늦지 않게 일어나야 하며, 지금 누가 날 깨우고 있는데, 지금 날 깨우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용선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찬물 샤워를 한 것 마냥 정신이 번쩍 든 별이가 눈을 크게 떴다. 천천히 베개에 파묻었던 고개를 돌리니 팔짱을 끼고 자길 내려다보는 용선이 보였다. 용선 얼굴 한번, 시계 한번. 상황을 깨달은 별이는 급하게 몸을 일으켜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
어찌저찌 늦지 않게 집합 시간을 맞춘 별이를 태운 촬영 버스는 인근 바닷가로 향했다. 촬영 장소에 도착한 스태프들은 각자 촬영 준비를 마치고 슛만 기다리고 있었다. 곧 지금 찍을 씬의 두 주인공인 혜진과 남자 주인공 지웅이 도착해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눴다.
"슛 들어갈게요!"
큰 소리로 수영이 외치자 모두 소리를 죽였고, 두 배우는 용선의 큐싸인을 기다렸다. 모니터 테이블에 앉아 헤드셋을 쓴 용선이 모니터를 유심히 살폈다.
"액션."
용선의 큐싸인으로 두 사람의 연기가 펼쳐졌다. 모두가 하나같이 숨을 죽이고 카메라는 화면을 잘 잡기 위해, 조명은 올바른 밝기를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모든 스태프들은 집중했다.
"컷!"
컷을 외친 용선의 표정이 꽤 만족스러웠다. 용선은 헤드셋을 잠깐 내리고 혜진을 보았다.
"혜진씨,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네? 어... 아뇨? 딱히 특별한 일 없었는데."
혜진이 멋쩍게 웃었다. 촬영장에선 정말, 절대로 흔히 볼 수 없는 미소를 띤 용선이 말을 이었다.
"연기가 다시 살아난 거 같은데. 사실 그동안 좀 죽어있었잖아. 그건 혜진씨도 알죠?"
나름 정곡을 찌르는 말에 혜진이 민망한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좋아요. 지금처럼만 하면 진짜 좋을 것 같아요. 우선 지금꺼 킵하고, 한번만 다시 갈께요."
1년차 별이는 아직 구별하지 못하는 혜진의 미세한 연기 변화를 알아챈 용선은 한 씬이 끝날 때까지 좋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별이는 혜진의 연기가 전이나 지금이나 그닥 차이가 없어보여 용선의 그런 반응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런 프로페셔널한 모습에 용선이 색달라 보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하룻밤 같이 잤다고 용선과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별이었던지라 왠지 오늘 촬영은 행복하게 흘러갈 것만 같았다.
*
장소가 옮겨지고, 스태프들은 다시 새롭게 촬영 준비를 하고 용선은 혜진과 촬영 감독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 씬은 그림을 좀 신경 써서 갈께요. 우선 이쪽 구도로 가고, 드론 샷은 마지막에 찍는 걸로 해요."
"네. 그러시죠."
촬영 감독은 용선과 혜진의 곁을 떠나 촬영팀과 구도를 살폈다. 혜진과 둘이 남은 용선은 같이 대본을 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우선 12씬, 13씬 쭉 진행하고 혜진씨 감정씬은 뒤로 빼서 갈께요. 그게 낫겠죠?"
"네. 좋아요."
혜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근데 진짜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뭐, 감독 입장에서 배우 연기가 좋아진 건 좋은 일이지만."
용선이 대본을 거두며 얘기했다.
"그냥... 맞춤 과외를 받았다고 할까요?"
혜진이 수줍게 웃었다. 아리송한 혜진의 대답에 용선의 큰 눈은 더 동그래져서 껌뻑거렸다. 그 맞춤 과외를 해준 선생님이 누구냐 묻고 싶단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용선은 바로 생각을 거두고 그냥 살풋 웃었다.
"그럼, 지웅씨 오면 바로 촬영 들어갈게요. 준비해주세요."
"네."
곧 지웅이 오며 촬영은 재개되었고, 중천에 떠있던 해도 서서히 수평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
"컷!! 촬영장 통제 제대로 안 해?!"
순탄히 진행될 것 같았던 촬영은 저녁이 가까워지며 장애물이 한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용선이 얼굴을 찌푸리며 헤드셋을 거칠게 내렸다. 촬영 장소 근처로 동네 주민들이 하나 둘 몰려들더니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음뿐 아니라 화면에 잡히는 것 까지, 여러가지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었다.
별이와 수영, 영은이 급하게 뛰어 주민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촬영장에서 조금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촬영 장소 근처로 소풍을 온 학교가 있는 모양인지 학생들까지 모이며 촬영 진행에 어려움이 계속 됐다.
"김수영! 문별이! 너네 오늘 여기로 애들 소풍 오는 거 몰랐어?"
줄곧 평화로웠던 용선의 얼굴이 화로 가득 찼다.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는 모습에 별이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죄송합니다. 확인했어야 했는데."
"너는 5년차가 되서 이것도 확인 못 해? 지금 촬영 자체가 불가능 하잖아!"
수영이 혼나는 모습에 되레 별이가 겁을 먹고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았다.
"확인을 못했으면 통제라도 잘 해야 되는 거 아냐?"
용선의 눈치를 살핀 수영이 재빠르게 뛰어 FD들과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겁을 먹고 사고 회로가 정지된 별이는 그 자리에 발이 붙은 것 마냥 우두커니 서있었다. 용선은 그런 별이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넌 왜 가만히 있는데? 니가 지금 가만히 있을 때야?"
정신이 든 별이는 어정쩡한 모습으로 수영의 뒤를 급히 따랐다. 한숨을 크게 내쉰 용선은 수영과 별이가 상황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모니터 테이블로 돌아갔다. 상황은 20분이 지나서야 좀 잠잠해졌고 그제야 다시 촬영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해가 떨어지면서는 바람이 갑자기 강해진데다 오디오도 말썽을 일으켜 촬영 딜레이가 계속 됐다. 오늘 첫 촬영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밝고 기분 좋았던 분위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지치고 어두워지고 있었다. 계획했던 시간보다 2시간 늦게 끝난 촬영에 스태프들은 녹초가 되었고 용선은 잘 풀리지 않았던 촬영에 착잡함을 느끼고 있었다.
"컷. OK.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이 끝나고 용선은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찾아 다니며 순탄치 않았던 오늘을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넸다.
모든 팀들이 각자 정리를 시작하고 용선은 촬영장에서 천천히 멀어졌다. 어느정도 거리가 떨어졌을 때 용선은 주머니에 놓인 담배갑을 꺼냈다. 하지만 끝까지 안 풀릴 속셈이었는지 담배갑 속은 텅텅 비어 있었다. 한 개비도 남아 있지 않은 빈 담배갑을 거칠게 구긴 용선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용선이 뒤를 도니 쭈뼛거리며 서있는 별이가 제 눈치를 보고 서있었다.
"왜."
딱딱한 용선의 말투에 별이는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손을 넣었고. 그 안에서 꺼낸 물건이 빛을 받으며 용선의 눈에 들어왔다. 용선이 피는 담배와 같은 브랜드의 담배였다.
"뭐."
"담배 떨어지셨길래."
담배는 완전히 새거였다. 용선은 가만히 담배를 내려다보다 다시 별이를 올려다봤다.
"너 담배 피니?"
"네? 아니요!!"
피면 피는거고 아니면 아닌거지. 뭘 저렇게 놀라. 내가 미성년자한테 물어본 것도 아닌데. 별이의 격한 반응을 보니 오늘 하루 풀리지 않았던 촬영이 잠깐 잊혀진 기분이 든 용선이었다.
"하나만 줘. 다 필요없어."
"다 가지셔도 되는데."
"나 뇌물 안 받는다."
"뇌물 아닌데."
"그럼 뭔데."
잠시 생각하는 모양인지 별이가 눈을 깜빡거리며 눈알을 굴렸다. 그러더니 생각이 끝났는지 용선과 눈을 맞췄다.
"선물."
말을 마친 별이는 용선의 손목을 잡아 직접 용선의 손 위에 담배를 내려 놓았다. 용선은 살짝 놀라 별 다른 말이 없었다.
"자주는 피지 마세요."
할말을 끝낸 별이는 용선을 두고 잽싸게 뛰어 다시 정리하고 있는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별이가 담배를 올려놓은 모습 그대로 가만히 서있던 용선은 비어버린 앞과 그 앞에 서있던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리곤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손에 놓인 담배를 까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